단종애사(端宗哀史) / 이광수 /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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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애사》(端宗哀史)는 이광수가 1928년에 발표한 역사소설로, 조선의 단종(端宗)과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 작품입니다.
1. 작품 개요
- 발표 연도: 1928년
- 장르: 역사소설
- 주제: 단종의 폐위와 유배, 그리고 사망에 이르는 과정에서 충신들의 충절과 비극적인 운명
2. 줄거리
《단종애사》는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과정에서 희생된 단종과 그를 지키려 했던 신하들의 충절과 희생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 단종의 즉위와 정치적 혼란
- 세종의 뒤를 이어 문종이 왕위에 오르지만, 건강이 악화되어 일찍 사망합니다.
-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즉위하지만, 당시 어린 나이(12세)였기 때문에 실권은 대신들이 행사합니다.
-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왕위 찬탈
- 권력을 장악하려는 세조는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계유정난(1453년)을 일으켜 김종서 등 단종을 지지하는 대신들을 제거합니다.
- 결국 단종은 1455년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상왕으로 격하됩니다.
- 단종의 유배와 죽음
- 단종을 복위시키려 했던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등)이 처형당합니다.
-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고, 결국 세조의 명령으로 사사(죽음에 이르게 함)됩니다.
- 충신들의 충절과 비극
- 단종을 지키려 했던 신하들의 충절이 강조되며, 역사적 비극성을 극대화합니다.
- 특히 사육신과 금성대군 등의 희생이 감동적으로 그려집니다.
3. 작품의 특징
-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 재해석: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의 감정을 풍부하게 묘사하며, 애국적 정서를 강조합니다.
- 비극적 서사: 단종과 충신들의 희생을 중심으로 인간적인 갈등과 충절의 가치를 부각합니다.
- 유교적 가치관 반영: 충(忠)과 의(義)를 강조하며, 조선 시대 유교적 도덕관에 근거한 서사를 전개합니다.
4. 평가와 의의
- 《단종애사》는 조선 시대 역사 속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충절과 인간적인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입니다.
- 하지만 이광수의 친일 행적과 그의 후반기 사상적 변화 때문에, 그의 역사소설 역시 평가가 엇갈리기도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종애사》는 근대적 문체로 단종의 비극을 효과적으로 서술한 작품으로 한국 역사소설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광수(李光洙, 호 춘원(春園) 1892년 3월 4일 ~ 1950년 10월 25일)는 한국 근대 문학을 개척한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언론인이며,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입니다.
1. 생애와 활동
- 출생과 성장: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한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 유학과 문학 활동: 1905년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상실한 후, 1907년 서울로 와서 신학문을 배우고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와세다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며,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문학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 <무정>(1917):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는 작품으로, 개화와 근대화 사상을 바탕으로 한 계몽적 성격이 강합니다.
2. 문학적 업적
이광수는 한국 근대 문학의 기틀을 다진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문학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뉩니다.
- 계몽주의적 소설:
- 무정(1917): 근대적 사고와 신교육을 강조하는 작품
- 개척자(1918): 조선인의 자립과 근대화 의지를 강조
- 흙(1932): 농촌 계몽을 다룬 작품
- 친일 문학:
- 1930년대 이후 일제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황민화(皇民化)’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 대표적인 친일 작품으로 이순신(1940), 나의 친구여 조선의 청년이여(1943) 등이 있습니다.
3. 친일 행적과 논란
-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동조하며 친일 문학과 논설을 발표했습니다.
- 1940년대에는 ‘내선일체’(조선과 일본은 하나)와 ‘황국신민화’를 강조하는 글을 쓰며, 전쟁을 찬양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 광복 후 친일 행적 때문에 사회적으로 큰 비판을 받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으로 끌려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광수는 한국 근대 문학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문학적 업적과 도덕성이 모두 논란이 되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근대 문학의 선구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친일파 문인’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는 복잡한 인물입니다.
顧命篇
지금부터 사백 구십년 전, 조선을 가장 잘 사랑하시고 한글과 음악과 시표(時表)를 지으시기로 유명하신 세종대왕(世宗大王) 이십 삼년 칠월 이십 삼일. 이날에 경복궁 안 자선당= 동궁이 거처하시던 집에서 큰 슬픔의 주인 될 이가 탄생하시니 그는 세종대왕의 맏 손자님이시고, 장차 단종 대왕이 되실 아기시었다. 아기가 탄생하시기는 진시 초였다. 첫가을 아침 별이 경회루 연당의 갓 피는 연꽃에 넘칠 때에 자선당에서는 아기의 첫 울음 소리가 난 것이다.
궁녀는 이 기쁜 기별을 일각이 바쁘게 대전마마께 아뢸 양으로 깁소매 남치마를 펄펄 날리며 달음질로 경회루로 달려 왔다. 이때에 왕께서는 매양 하시던 습관으로 집현전( 集賢殿)에 입적(入直)하는 학사들을 데리시고 경회루 밑에서 연꽃을 보시고 계시었다. 이날에 왕을 모신 학사는 신 숙주(申叔舟)와 성 삼문(成三問) 두 사람 이었었다.
왕은 연꽃을 보시면서도 자선당에서 기별이 오기를 고대하시었다. 세자빈( 세자빈)께옵서는 지난밤 술시부터 아기를 비르지시와 밤새도록 심히 신고하시었다. 왕께서는 옷을 끄 르지 아니하시고 때때로 나인(內人)을 보내시와 물으시고 친히 내의(內醫)를 불으시와 약을 마련 하시며 거의 밤을 새이시었다.
두 나인이 달려 오는 것을 먼저 본이는 왕이시었다. 아직도 젊은 두 학사는 연꽃 보기 와글 짓기에 정신이 팔리어 있었다.
나인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바라보시고 용안에는 근심되는 긴장한 빛이 보였다.
『상감마마 세자빈께옵서 시방 순산하시어 계십니다.』하고 앞선 늙은 상궁(尙宮)이 읍하고 허리를 굽힐 때에야 비로소 용안(龍顔)이 풀리시며 웃음이 돌았다.
『매우 신고하옵시다가 옥 같으신 아들 아기를 탄생하시옵고는 세자빈께옵서는 곧 잠 이듭 시고 아기씨는 자선당이 쩡쩡 울리도록 기운차개 우시옵니다.』
왕께서는 원손(元孫)이 나시었다는 기별에 매우 만족하시와 용안에 웃음이 가득하시어 두 학사를 돌아보시며, 『 이해에 경사가 많구나. 종서가 육진(六鎭)을 진정하고 돌아오고, 또 왼손이 났으니 이런 경사가 또 있느냐.』
『막비 성덕이시옵니다.』
하고 숙주, 삼문이 허리를 굽힌다.
『내 몸에 무슨 덕이 있을꼬. 막비 조종의 성덕이시라. 하늘이 큰 복을 이 나라에 내 리심이로다. 이봐라. 그래 아기가 크더냐?
"네 크옵시오."
하고 한 상궁이 아뢰니 다른 상궁이,
"갓 납신 아기로 뵈옵기 어렵삽고 몸이 크옵심이나 울음 소리 웅장하옵심이나 삼칠일 은지 녑신 듯하옵니다."
왕께서는 만족하신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 학자를 돌보시며,
"어떠할 꼬? 오늘로 국내에 대사를 내리어 팔도 죄수를 다 놓아 주려 하나 어떠할꼬. 법도에 어그러짐이나 없을까?"하심은 혹시나 그릇됨이 있을까 삼가시는 성인의 뜻이시다.
신 숙주가 나서며,
"대사를 내리심은 하해 같은 성은이시니 어찌 법도에 어그러짐이 있사오리까. 또 국가에 원자 원손이 나옵시면 죄인을 대사하옵고 환과고독(鰥寡孤獨)을 진휼(賑恤)하옵심은 열 성조( 列聖祖) 의 유범(遺範)이신 줄로 아뢰오."
한즉 왕은 다시 성 삼문을 보신다. 무슨 다른 의견이 있는가 하심이다.
삼문도 왕의 뜻을 살피고 국궁 하며,
"하해 같으신 성은으로 대사를 내리시옵고 환과고독을 진휼하옵심이 지당하온 줄로 아뢰오."
한다. 왕은 두 학사의 말이 일치함을 기꺼하시어 고개를 끄덕이시었다.
왕은 오늘 조회(朝會)에 어떤 모양으로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고 어떤 모양으로 팔도 죄수에게 일제히 대사령을 내리실 것을 생각하시면서 새로운 기쁨을 가지시고 연당 가으로 옥보를 옮기신다.
수은 같은 이슬 방울을 얹고 밝은 가을 물 위에 뜬 연잎과 금시에 아침 하늘에서 내려 온 듯한 우뚝우뚝한 향기로운 분홍 꽃, 다 핀 꽃, 덜 핀 꽃, 있다가 필 봉오리 이따금 꿈틀꿈틀 물결 일으키는 물고기. 늙은 손나무와 무성한 나무숲 사이로 불어 오는 첫가을 아침나절의 서늘 한 바람, 그것에 날려 오는 새소리. 연당 가으로 걸어 돌아 가는 대로 눈에 뜨이는 중 남산( 終南山), 인왕산(仁旺山), 백악(白嶽). 파랗게 맑은 하늘에 활짝 날아 오를듯한 근정전( 勤政殿) 의 가초 끝. 어느 것이나 태평 성대의 기쁨을 아뢰지 아니함이 없었다.
게다가 보산(寶算)이 겨우 사십 오세 밖에 아니 되신 영기와 총명이 겸비한 임금과 그 를 모신 이십 칠팔세 되는 충성 있고 재주 있는 두 신하.
왕은 문득 거니시던 발을 멈추신다. 두 학사는 무슨 말씀이 계실 것을 살피고 왕의 좌우로 한 걸음쯤 뒤떨어 지어 선다.
왕은 몸을 돌리어 두 학사를 이윽히 바라보시더니,
"경들에게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 나를 섬기던 너의 충성으로 이 어린 손자를 섬겨 다고."
하신다. 그 어성은 심히 무겁고도 슬픈 빛을 띠었다. 왕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빛나는 듯 하였다.
젊은 두 학사는 왕의 말씀에 전신이 찌르르하여 굽힌 허리를 오려 들지 못할 뿐이요,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아니하였다.
왕은 두 신화의 분명한 대답을 들으려 하였다.
『숙주야.』
하고 왕은 숙주를 먼저 돌아 보시었다. 숙주는 삼문보다 나이 위이므로 왕은 언제나 삼 문보다 숙주를 먼저 하신다. 그것도 장유으 차례를 소홀히 아니하시는 깊으신 뜻이었다.
"네."
하고 숙주는 더욱 감격하여 왕의 앞에 두 손으로 땅을 짚고 엎드렸다.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 내가 천추 만세한 후에라도 내 부탁을 잊지 말아라."
숙주는 이마를 조아리며,
"상감 마마. 성상을 섬기옵고 남는 목숨이 있사옵거던 백 번 고쳐 죽사와도 원손께 견마의 역을 다하옵기를 천지 신명 전에 맹세하옵나이다.
이렇게 아뢰는 숙주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 엎디인 박석(薄石)을 적시었다.
왕은 다시 삼문을 향하여 같은 부탁을 하시니, 삼문은 다만 땅에 엎드려 느껴울 따름이요, 대답이 없다.
왕은 두 학사의 충성된 맹세를 들으시고 만족하시나 용안에는 추연한 빛이 맽히어 풀리지를 아니하였다.
"일어나거라. 진시 중이 되었을 듯하니 조회가 늦어서야 되겠느냐. 오늘 일을 기록 하여 후세에 전하여라."
하시고 걸음을 내전으로 옮기시었다.
왕께서 내전에 듭심을 허리 굽히어 지송하고 숙주, 삼문 두 사람은 서로 눈물에 젖은 얼굴 바라보며 맥맥히 말이 없었다. 살이 죽이 되고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새로 나신 아기에게 충성을 다하리라고 천지 신명에게 속으로 거듭거듭 맹세한 것은 무론이다.
땅땅하는 쇠 소리가 들리는 것은 벌써 내불당(內佛堂)에서 아기의 수명 장수를 축원 하는 발원을 함인가.
왕께서 이렇게 아기의 전도를 근심하시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세자궁(世子宮)께서 병약하심이다. 세자궁은 이제 삼십밖에 안 도신 젊으신 몸 이 시 지 마는 나면서부터 포유지질(蒲柳之質)이신 데다가 연전에 한 일년 동안 이름 모를 병환으로 누워 계신 뒤로부터는 더욱 몸이 연약하여서 성한 날보다 앓는 날이 항상 많으시었다.
그러한 데다가 동궁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이신 세종께 혼정신성을 권함이 없으심은 물론 이어니와 조석 수라를 숩실(잡수신다는 뜻)때에는 반드시 결에 읍하고 서서 수라 끝나시 기를 기다리시고 또 밤에도 자리에 모시면 아무리 밤이 깊더라도 「물러가거라」는 명이 계신 뒤에야 물러나시었다.
이 모양으로 낮에 온 종일을 부왕께 모시고 나서 밤 깊어 자선당에 돌아오신 뒤에도 곧 침소에 듭시는 것이 아니라, 늦게 저녁 수라를 숩시기가 바쁘게 좌필선(左弼善) 정 인지( 鄭麟趾) 와 우문학(右文學) 최 만리(崔萬理) 두 사람을 비롯하여 신 숙주, 성 삼문, 유성원( 柳誠源), 이개( 李塏), 최 항(崔恒),이 계전(李季甸),박 팽년(朴彭年), 하 위지(河緯地)같은 젊은 어학우(御學友)들을 부르시와 삼경이 넘도록 성리(性理)를 토론하시고 민정을 들으시었다.
그 중에 정 인지는 스승으로, 신 숙주 성 삼문은 벗으로 가장 경해하시와 오경이 되도록 붙드신 일이 가끔이었다. 이러한 일이 모두 세자의 건강을 해한 것은 물론이다.
세자께서 형제에 대하여 우애지경이 지극하심도 내의 가 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바다.
세자께서 세종 대왕의 맏아드님이시고 같은 모후(母后)심씨(沈氏)를 어머니로, 둘째가 후일에 세조 대왕이 되실 수양 대군(首陽大君)이시고, 셋째가 풍채와 문장과 글씨로 일세를 진동한 안평 대군(安平大君)이시고, 그 밖에 후일에 단종 대왕을 회복하려다가 청주( 淸州) 옥에서 돌아간 금성 대군(錦城大君), 세종께서 가장 사랑하시었던 영응 대군( 永膺大君) 같으신 이들이 계시어 팔 대군(八大君), 이 공주(二公主), 십 군(十君), 이 옹주(二翁主)나 동기가 있으시었다.
세자께서는 한달에 몇 번씩은 반드시 이 여러 형제들을 번갈아 부르시와 우애하는 뜻을 표 하시었고 여러 아우님들도 무슨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형님 되시는 세자궁께 달려 와서 청하였다.
열 여덟 아우님 중에 가장 말썽꾸러기로 부왕께 걱정을 듣는 이는 수양 대군과 안평 대군두 분이었다. 수양은 호협하고 안평은 방탕하였다. 수양은 열 네 살에 남의 ㅈ비 유부녀 의방에서 자다가 본서방에게 들키어 발로 뒷벽을 차서 무너뜨리고 달아나기를 십리나 하였고, 열 여섯 살 적에는 왕방산 사냥에 하루에 노루와 사슴을 스무 마리나 쏘아 잡아서 전신이 피 투성이가 되어 이 영기(李英奇)로 하여금,
"뜻밖에 태조대왕(太祖大王)의 신무(神武)를 다시 뵈옵니다."
하고 눈물을 흘리게 하였다.
세종께서는 수양 대군이 너무 날래고 날뛰는 것을 지르기 위하여 항상 소매 넓은 웃옷과 가랑이 넓은 바지를 입히시고,
"너같이 날랜 사람은 넓은 옷을 입어야 쓴다."
하여 경계하시었다.
이렇게 수양 대군은 부왕께는 걱정거리가 되고 궁중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세자께서는 그것이 가엾어서 더욱 이 아우님을 돌아보시었다. 그래서 한번은 수양 대군의 피 묻은 활에다가,
"철석 기 궁( 鐵石其弓) 이요, 벽력기시(霹瀝其矢)로다. 오견기장(吾見其張)이나 미견 기이( 未見其弛) 호라. (활은 철석 같고 살은 벽력 같도다. 내 그 켕김을 보았으나 늦춤을 보지못하다.)"
라고 쓰시었다.
안평 대군은 소절(小節)을 돌아 보지 아니하고 주색을 즐겨하였으나 수양 대군과 같이 우락부락하고 왁살스러워 말썽군은 아니었다. 다만 세상이 무에라거나 나는 술이나 마시련 다 하는 태도였었다. 그렇지만는 안평 대군에게도 숨길 수 없는 영웅의 기상이 있는 것은 말 할수 없었다.
그 밖에 금성 대군은 사리에 밝고 의리가 있고, 영웅 대군은 얌전하고…… 이 모양으로 여덟 분 대군이 모두 한가지 특색을 가지시었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성미를 가진 아우님 들을 한결 같은 우애로 사랑하시는 세자에게는 성인의 도량과 인자함이 있으시었다.
이러한 모든 사정을 생각할 때에 세종께서 아기의 전도를 염려하심은 당연하다고 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세종께서 세자를 사랑하시고 아끼느니만큼 세자의 병약하심이 더욱 가슴에 찔렸고 남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세자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아니한 것같이 생각키었다.
아드님 팔 형제(적지만)중에서 다른 아드님 다 건장하신 중에 세자 한 분이 가장 어 지시 면서 병약하심이 아버지의 마음에 더욱 애처로왔다.
게다가 세자께서는 삼십이 되시도록 자녀간 새육됨이 없었다. 휘빈 김씨( 徽嬪金氏) 와 순 빈 봉씨(純嬪峯氏)가 다 생산이 없이 폐함을 당하고 지금 아기를 낳으신 현덕 빈 권씨( 顯德 嬪 權氏)도 열 네 살에 양제(良娣)로 동궁에 들어와 오년 전에 양원(良媛)으로 봉함이 되어 처음으로 잉태하시매 세자빈에 봉함을 받아 경혜 공주(敬惠公主)를 낳으시고는 다섯 살 터울로 이제 원손을낳으시니 세자의 기쁨인들 어떠하며 세자빈의 기쁨이야 더욱 말할 것도 없지마는 세자를 애처롭게 생각하시는 왕께서 기뻐하심이 결코 심상할 것이 아니다.
불행히 세자는 비록 왕위에 올라 보지도 못하고 돌아가시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아기가 자라면 그 뒤를 이을 것이라 하여 왕의 마음은 기쁘시었다.
그러나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수양 대군, 안평 대군 이하 「칠 대군이 강성하여」하고 일컫는 여러 대군들이 있고, 그 중에도 수양 대군 같은 패기 만만(覇氣滿滿)한 이가 있으니, 원 천석(元天錫)의 말과 같이 장차 형님 되시는 세자를 극(克)하려는 기미도 있거든, 하물며 세자마저 돌아가시고 어린 아기가 등극하시게 되면 필시 무슨 불길한 사단이 있을 것은 누구나 상상하기 어렵지 아니한 일일뿐더러 더구나 이 아드님 저 아드님의 성미와 장처 단 처를 잘 아시는 명철하신 부왕의 마음이시랴.
왕이 신 숙주, 성 삼문에게 아기를 부탁하심도 이 때문이다. 숙주, 삼문이 지금은 비록나 읻 어리고 벼슬도 낮지마는 아기가 자라 왕위에 오르실 때에는 황 희(黃喜), 황보 인 ( 皇甫仁), 정 분(鄭笨),김 종서(金宗瑞)같은 이들은 벌써 늙어 죽거나 살아 있더라도 권세에서 물러났을 것이다.--- 이렇게 왕께서 생각하신 것이다.
그러나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하여 그날 조회가 끝난 뒤에 황 희, 황보 인, 김 종서, 정분, 정 인지 다섯 사람을 머물리시고 다시 아기의 후사를 부탁하시었다.
사흘 안에 대사의 은명이 팔도에 다 돌아 여러 천명 죄수들이 일제히 청천 백일을 바라보게 되고 전국 백성들은 국가에 원손이 탄생하시었다는 것보다도 인자하고 병약하신 세자궁께서 아드님을 얻으심을 진정으로 송축하였다.
불쌍한 환과 고독들은 넉넉히 진휼함을 받았고, 벼슬아치들은 일품씩 가자를 받았고, 전국 각 대찰에서는 일제히 새로 나신 원손의 수명장수를 축원하는 큰 재를 베풀어 중들과 거지들이 배를 불리게 되었다.
왕께서 불도를 숭상하시므로 아기 나신 날부터 칠월 이십 오일까지 사흘 동안 일체 짐승을 죽이지 말라시는 전교를 내리시어 금수까지도 아기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었다. 진실로 팔도 강산에 귀신과 사람과 짐승이 한가지로 이 아기 나심을 기뻐하였다. 이렇게 축복 받아나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되랴.
그러하건마는 아기에게는 벌써부터 슬픔이 오기 시작하였다.
아기가 나신 이튿날, 칠월 이십 사일에 아기의 어머니 되시는 세자빈 권씨는 사랑하는 아기에게 젖꼭지 한 번도 물려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시었다. 아기의 첫 울음소리를 들으신 때부터 꼭 일주야 동안 아기를 만져 보시었다. 고통이 심하고 기운이 탈진항 도저히 살지못 할 줄을 알으신 때에 세자빈께서는 그의 친정 어머니 되는 화산부 부인 최씨( 花山府夫人崔氏) 와 세종 대왕께 모시어 한 남군(漢南君), (永豊君)영풍군 두 아드님을 낳고 장차 아기에게 진유(進乳)할 혜빈 양씨(惠嬪楊氏)에게 아기를 부탁하시었다.
세상에 나오신지 일주야만에 어머님을 여의신 아기는 혜빈 양씨의 젖으로 자라나시었다.
혜빈은 본래 천한 집 딸로서 인물이 아름다운 까닭으로 열 세 살에 나인으로 뽑히어 들어와 중전마마의 귀염을 받으며 궁중에서 자라났다. 십 오륙세가 되매 대단히 자색이 아름답고 또 영리하여서 점점 왕의 총애하심을 받게 되어 열 여덟 살에는 한남군(漢南君)을 낳았고 스물 네 살인 작년에는 둘째로 영풍군(永豊君)을 낳았다. 영풍군은 아직 돌을 바라보는 어린 아기로서 원손 아기와 젖을 나누어 먹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아기를 위하여 따로 유모를 구하려 하였으나 왕께서는 특별하신 처분으로 총애 하시는 혜빈으로 하여금 아기에게 젖을 드리게 분부하시었다. 혜빈도 세자궁과 동갑일 뿐 아니라 혜빈이 지체가 낮다 하여 궐내에서 항상 휘둘려 지낼 때에 세자빈께서는 부왕이 사랑 하시는 서모로 정답게 대접하시었음을 매양 감격하게 여기던 차라 왕의 분부가 계시기 전에도 아기에게 젖을 드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왕의 뜻이나 혜빈의 뜻이니 비록 기출 되는 영풍군에게 다른 유모의 젖을 드리더라도 아기에게는 남의 젖을 아니 드릴 결심 이었다.
그러나 우애지심이 많으신 세자께서는 아드님 되시는 아기를 위하여 아우님 되시는 영풍으로 하여금 어머니의 젖을 잃게 하기를 차마 하지 못하시와 혜빈의 젖을 두 아기에게 같이 나누어 드리도록 분부가 계시었다. 그 때문에 따로 유모 하나를 가리어 부족한 젖을 채워두 아기에게 드리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매 혜빈은 한 달이면 이십일은 동궁인 자선당에 거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기는 마치 혜빈의 친아들과 같은 사랑을 받고 길러고 서삼촌 되는 영풍군과 아기와는 마치 쌍둥이와 같았다. 후일에 영풍군이 단종 대왕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것도 오랜 인연이라 할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세자께서는 반드시 아기를 부르시와 안아 주시었다. 세자께서는 아기를 안으실 때마다 돌아가신 세자빈을 생각하시와 낙루하시는 일도 있었다.
세자께서 아기를 불러 안으실 때에는 반드시 영풍군도 안아 주시고 그 귀애하심이 조 금도 차별이 없으신 듯하였다.
다섯 살 되는 경혜 아기는 반은 동궁에 있고, 반은 외조모 최씨를 따라 있었다.
최씨는 외마님인 세자빈이 국모(國母)라는 존칭도 못받아 보고 한창 살 나이에 돌아가신것을 슬퍼하여 아직 육십도 다 못되었건마는 갑자기 눈이 어두워질 지경이었다. 부인은 늦어도 열흘에 한 번씩은 궐내에 들어와 외손자 되시는 어린 아기를 안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세자의 특별한 주선인 것은 물론이다.
"눈 모습이, 눈 모습이…… "하고는 말이 맟지 못하여 목이 메었다. 아기의 눈 모습이 천연 그 어머니 되시는 세자빈 권씨 였다.
그러나 이 아기가 자라시면 장차 세자궁이 되시고 상감마마가 되실 것을 생각하면 슬픈 중에도 희망과 기쁜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웬견 이 아기 상감님 되시는 것을 보고 죽으리?
하고 부인은 입 밖에 말을 내지는 못하나 아기를 대할 때마다 늘 혼자 한숨을 쉬었다. 십 칠 년 후에 자기도 이 외손자 때문에 참혹한 죽음을 당한 것은 뜻도 못하였을 것이다.
어머니를 여윈 아기와 그 단 한 분 동기 되는 누님 경혜 아기는 남달리 인자하신 아버지와 늙은 외조모와 혜빈 양씨의 사랑 속에--- 또 조부님 되시는 왕의 특별하신 자애 속에서 모락모락 자랐다. 삼칠일, 백일 다 지내시와 아바마마께 안기실 때에는 그 기르신 수염을 잡아 뜯게 되시었다.
이렇게 아기가 목을 가누고 사람을 알아보게 되신 때부터 세종 대왕께서는 가끔 아기를 데려 오라 하시와 몸소 품에 안으시고 대궐 뜰로 거니시기를 자주 하시었다.
한번은 아기를 안으신 채로 집현전으로 행차하시었더니 마침 입직하던 신 숙주와 성 삼 문이 버선 발로 뛰어나와 지영하는 것을 보시고,
"이 애를 부탁한다."
고 한 번 다시 말씀하시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경회루 하교를 생각하고 황송하여 땅ㅇ 엎드려 눈물을 흘리었다.
어느덧 십 이년이 지났다.
아기가 자라나시어 왕세손(王世孫)이 되시고 왕세자가 되시었다가 임신(壬申) 오월 십 사일에 등극하시와 왕이 되시니 이 양반이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시는 단 종대왕( 端宗大王) 이 시다.
그렇게 조선을 위하여 큰일을 많이 하신 세종 대왕께서 경오(庚午)년 이월에 승하 하신지 삼 년이 지나서 지난 이월에 대상이 지나고, 그 후 석달이 못되어 임신 오월 십 사일에 우리가 지금껏 세자라고 불러 오던 문종 대왕께서 승하하시어 이게 열 두 살 되시는 아기께서 왕위에 앉으신 것이다.
오년 내에 연해 세 번(오년 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승하) 국상이 나고 어리신 임금 이 등극 하시니 국내는 슬픔과 근심에 찼다. 장차 큰 폭풍우가 오려는 천지와 같이 조선 팔도는 암담한 구름에 싸였다.
처음 세종 대왕께서 승하하시매 세자께서는 부왕의 영구(靈柩) 앞에서 왕위에 오르시었다. 왕께선 애통하시는 양은 진실로 차마 뵈올 수 없었다. 때는 이월이라 중춘절후라 할 만하건마는 그해 따라 늦추위가 심하여서 세종께서 승하하신 때에는 풀리었던 한강이 다시 붙 을 지경이었다.
그러하건마는 왕께서는 병약하신 옥체도 돌아 보지 아니하시고 잠시도 여막으 ㄹ 떠나 심이 없으시었다. 아무리 신하들이 추운 동안 방에 듭시기를 청하여도 왕은 우시고 듣지 아니하시었다. 본래 병약하신 몸인 데다가 지난 일년 동안 등에 큰 종처를 앓으시와 아직 합 차이 덜 된 몸이시니 가까운 신하들이 염려함은 물론이어니와 누구나 이 일을 아는 이는 인자하시고 병약하시고 효성이 출천하신 왕을 위하여 근심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세종 대왕께서도 오십이 가까우시며부터 매양 옥체 미명하신 날이 많으시와 승하 하시기 육년 전 을축년부터는 세자께 참결서무(參決庶務)하랍신 하교가 계시어, 이래 육년 간 세자께서는 부왕을 대리하시와 군국 대사르 참결하시었다. 이렇게 낮에 종일 정사를 보시고도 밤이면 부왕의 곁을 모시어 시탕의 정성을 다하시었다. 밤이 늦더라도 왕께서 두세 번 물러나 라시는 분부가 계시기 전에는 물러나시는 일이 없으시었다.
더구나 세종께서 승하하시기 전 두어 달 동안은 세자께서는 거의 하루도 옷을 끄르고 편안히 쉬신 적이 없으시었다.
이리하여 왕이 되신 뒤에도 첫째는 혼전에 모시기에, 둘째는 만기(萬機)를 친재( 親裁) 하시기에, 셋째는 학문을 연구하시고 민정을 살피시기에 잠시도 한가하신 적이 없으시었다.
그렇게 병약하신 몸으로 그렇게 번극하게 일을 보시니 건강은 갈수록 더욱 쇠약하실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판서(判書) 민신(閔伸)같은 이는 간일시사(間日視事)를 주장하였다. 자세히 말 하면 왕께서 하루는 쉬시고 하루는 정사를 보시게 하자는 뜻이다. 당시 영의정( 領議政) 이 던 황희( 黃喜) 도민 신의 뜻에 찬성하였고 다른 노신(老臣)들도 왕을 사랑 하는 진정으로 속으로는 민 신의 말에 찬성하였다. 그래서 가끔 왕께 간일시사하시고 이양 정신( 頤養精神) 하시 기를 간하였으나 왕은,
"임금이 게으르면 천년을 사들 무엇하리. 부지런히 정성을 다하면 일년만 살아도 족하다."
하시고 듣지 아니하시었다. 게다가 정인지(鄭麟趾) 일파는 임금이 정사를 게을리하심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 하여 민 신 일파의 의견에 반대하였다. 이리되면 기운 없는 늙은이들은 성인의 뜻을 내세우는 정 인지 일파의 의견을 반대하고 기어코 왕을 휴야하시게 할 용기가 없었다.
이래서 왕께서는 부왕의 거상을 다 벗자마자 그렇게도 지극히 사모하시던 부왕의 뒤를 따르시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하늘이 왕의 효성을 보사 삼년상을 마칠 수명을 왕에게 허 하신것이다.
현덕왕후(顯德王后)승하하신 뒤로 심년이 넘도록 문종 대왕은 다시 왕후를 책봉하신 일이 없으시고 지존의 몸으로 혼자 계시었다. 세종 대왕 승하 전에 세종께서도 세자비 책립에 대하여 근심이 계시었으나 세자께서 장남하실뿐더러 덕이 높으심을 아시므로 굳이 혼인을 하시도록 명하심도 없으시었고 혹 근신(近臣)이 그러한 뜻을 여쭈오면 왕은,
"남녀와 음식은 사람의 욕심 중에 가장 큰 것이지마는 나같이 병약한 사람은 그것이 다 긴치 않으이."
하고 웃으실 뿐이었다.
왕은 두 분 아기(세자와 경혜 공주)를 지극히 사랑하시었다. 정사가 끝나시고 내전에 드옵시면 두 분 아기를 부르시어 그날그날 배운 글도 외우라 하시고 온종일 무엇하고 논 것을 아뢰라 하시와 칭찬하시고 책망하실 것이 있으면 앞에 불러 세우시고 엄숙하고도 인자한 낯 빛과 말소리로 책망하시었다. 그리하되 과도히 익애(溺愛)하심도 없고 과도히 엄히 하 심도 없으시었다.
아기들도 아바마마 한 분을 아버지 겸 어머니 겸으로 사모하고 따르시어 아무리 장난에 정신이 없으시더라도 왕께서 내전으로 들어오실 시각이 되면 먼저 들어와서 부왕이 듭시기를 기다리었다 .
그러다가 작년에 경혜 공주가 참판(參判) 정 충경의 아들 영양위(寧陽尉) 정 종에게로 시집 간 뒤에는 오직 세자 한 분만을 곁에 두시고 사랑하시었다.
이 모양으로 왕은 다만 병약하실 뿐 아니라 가정지락이 없으시었다. 동궁으로 계실 때 에두 번이나 세자빈을 폐하게 된 것도 무론 왕의 뜻은 아니었다.
초취이신 휘빈(徽嬪) 김씨는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딸로 심히 자색이 아름다웠다. 그때 세자의 나이 열 다섯 휘빈도 동갑이었다. 세자는 어려서부터 골격이 강대하시고 얼굴이 동통하시어 이 어린 신랑 신부는 마치 빚어 놓은 듯이 아름다우시다고 근시하는 사람들이 혀를 찼었다.
두 분의 첫사랑은 자못 깊으시어 세자께서 공부를 폐하시는 난이 있고 얼굴에 핏기가 적어지 신다고 수근거릴지경이었다. 가례(嘉禮) 후 이태를 지나서 두 분이 열 일곱 살이 되어세자는 남자다운 기상이 더욱 씩씩하시고 휘빈은 아침 이슬 받은 함박꽃같이 환하게 피실 때 였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서로 사랑하는 젊은 한 쌍을 축복하는 이보다도 새우는 이가 많았으니, 그 중에 가장 심하게 새운 이가 세자의 모후(母后)이신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沈氏) 이시었음 은 물론이다. 며느리 귀애하는 시어머니 없다고 하거니와 원체 기숭하시기로 호랑이같이 두려움을 받으시는 왕후께서는 아드님이신 세자를 대단하게 사랑하시느니만큼 그 아름다운 며느님을 미워하시었다. 중전께서 세자빈을 미워하시는 눈치를 본 궁녀들은 나도 나도하고 휘빈의 있는 흉 없는 흉을 중전마마께 아뢰어 바치었고 원체 며느님이 미우신 왕비께서는 며느님을 흉보는 말이면 다 옳게 들으시었다.
문종(文宗), 세조(世祖) 두 분 대왕과 그에지지 않는 안평대군(安平大君), 금성대군( 錦城大君) 같으신 영걸을 낳으신 그가 결코 범상한 아낙네가 아닐 것은 물론이요, 동방의 요순( 堯舜)이라고 부르는 세종 대왕을 도우실 만할진댄 덕으로도 부족하시지 아니하련마는 휘빈을 미워하실 때에는 오직 시기뿐인 범상한 아낙네시었다.
마침내 자선당에서 요기로운 것을 찾았다. 김씨가 이것으로 세자를 혹하게 하였다 하여 어떤 물건을 휘빈 방에서 집어다가 중전께 바친 궁녀가 있었다. 이것이 휘빈이 열 여덟 살적 일인데 그것이 이유가 되어 휘빈은 폐함이 되었다.
휘빈이 세자를 호리기에 썼다는 요물이란 것은 부적이었다. 이 부적을 한 장은 몸에 지니고, 한 장은 남편의 옷속에 넣고, 한 장은 내외가 자는 방바닥에 감추고, 한 장은 땅속에 묻고, 한 장은 불에 살라 하늘로 올려 보내면 남편의 마음이 그 아내에게 혹하여 다른 계집에게로 가게를 못하는 것이라고 궁중에 출입하는 어떤 늙은 승이 중전마마께 설명을 하였다.
이러한 요기로운 부적이 휘빈의 방에서 드러났다 하여 궁중은 간 곳마다 수군거리고 휘빈에게 대한 흠담은 더욱 많아지어 그 말을 다 듣고 보면 휘빈은 마치 세상에 무서운 요물인 듯 하였고, 어떤 간사한 궁녀는 휘빈이 구미호(九尾狐)의 화신이어서 밤이면은 어디를 나갔다가는 이슬에 폭 젖어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는 년까지도 있었다.
마침내 세종께서는 중전마마와 자리를 같이 하시와 며느님인 휘빈을 부르시와 전후 시 말 을 물었다. 여러 날 괴로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여 초훼한 세자빈의 모양은 참으로 가련하였다. 시아버님 되시는 왕께서는 본래 휘빈을 귀애하시던 터이라, 마음에 측은히 여기시어 이 소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시었다.
"아가 듣거라. 네가 요기로운 부적을 몸에 지녔다 하니 그런 일이 있느냐. 만일 그렇다하면 그것은 용서하 수 없는 큰 죄로다. 필부의 집에서도 괴변이라 하려든 후일에 일 국의 국모가 될 자리에 있어서 말이 되느냐. 고래로 이런 일은 애매한 누명을 쓰는 수가 많은 것이니 네 바른 대로 아뢰어라."
하고 마음에 느끼시는 자애지정을 억제하시고 가장 엄숙하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왕께서 휘빈을 특별한 자애가 없으시면 이만한 일이면 휘빈은 대궐 마당에서 무서운 국문( 鞠問)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리 되면 좌우에 많은 사람들이 늘어서서 그 부끄럽고 욕됨이 비할 데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중전과 궁녀들은 물론이어니와 승정원( 承政院), 사헌부( 司憲府), 사간원(司諫院)의 말썽 좋아하는 신하들도 세자빈을 엄하게 국문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휘빈은 부왕의 물으심에 대하여 다만 느껴울 뿐이더니 겨우 정신을 수습하여 한 번 일 어절하고 들릴락말락 가늘고 떨리는 소리로,
"상감 마마 모두 미천한 소신이 덕이 없는 탓이옵니다."
이 말에 중전이 펄쩍 뛰며,
"흥, 그래 네가 애매하단 말이냐. 상감께옵서 인자하신 것을 믿고 그렇게나 말씀 사뢰서네 죄를 면해 보려고? 천지 신명이 다 아시고 미워하시려든!"
하고 독한 눈매로 마루 위에 엎드린 휘빈을 노려보았다.
왕은 중전의 성나신 양을 보시고 잠간 양미간을 찡그리시더니,
"듣거라. 말 한 마디에 네 목숨이 달렸으니 분명히 대답을 하여라. 네 방에서 요기로운 부적이 나왔다 하니 그것이 진실로 네가 지녔던 것이냐, 아주 모르는 것이냐."
휘빈은 입술을 물어 울음을 참고 이윽히 생각하더니 잠간 눈물 어린 눈을 들어 중전을 우러러 보고,
"신명을 그일지언정 어찌 상감마마를 그이리이까. 부적은 몸에 지닌 적이 없사옵고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본 적도 없사옵니다."
하고 느껴울었다.
이 말에 중전은 뛰어 일어서서 분을 이기지 못하는 듯이 펄펄 뛰며,
"오, 요망한 것이 이제는 나를 잡으려 드는구나. 내가 너를 해하려고 이 일을 꾸며 내었다는 말이로구나. 상감께서 밝히 살피시오."
하고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사내바람이 나서 부르르 띠신다.
왕은 부적을 찾았다는 궁녀를 불러 세자빈과 대질을 시키려 하였으나 세자빈은 다시는 입을 열지 아니하고 울지도 아니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면 도리어 벗어나지 못할 줄을 알았던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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