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x250
반응형

염마(艶魔)

채만식

1934

 

염마(艶魔) (채만식, 1934) 전문 줄거리 PDF 파일 다운로드 받기

 

원문 PDF 파일 다운로드 받기

채만식-염마.pdf
1.07MB

 

 

줄거리 및 작품소개

채만식의 <염마>는 1934년 조선일보에 '서동산'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된 최초의 근대적 장편 추리소설입니다. 주인 잃은 소포로부터 시작된 사건을 풀어가는 탐정의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문학과 예술,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담고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해 줍니다.

 

저자소개

채만식(1902-1950)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소설가, 극작가, 문학평론가, 수필가입니다. 대표작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 <탁류>, <태평천하>, <치숙>, <여인전기>, <미스터 방>, <염마> 등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문체로 유명하며,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艶 魔[염마]

1. 손가락 한 토막 1 겨울이 방금 물러가고 난 어설픈 자리에 아직 봄빛이 살오르지 못한 삼월 초생.

늦은 아침 산보객들의 그림자까지도 드물어진 계동 중앙학교 뒷산 송림의 베어 낸 소나무 등걸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있는 영호는 무엇인지 안타까이 기다리는 눈으로 헤어져 가는 산보객을 두루 여살펴보고 있다.

차차 분명해지는 햇발이 솔잎 사이로 비쳐 들어온다.

비치는 햇빛이 반갑다고 높다란 소나무 가지에서 솔새가 가느다랗게 재재거 린다.

무거운 침묵에 잠긴 대궐 뒤꼍에서는 아침거리를 찾는 솔개미가 한 마리 삐 뾰로로 울면서 공중을 두루 날고 있다.

중앙학교에서는 학생이 점점 모여드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차차 요란해 간다.

마침내 땡땡땡 종소리가 울린다. 종소리에 정신이 드는 듯이 영호는 앉았던 소나무 등걸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 무어 일거리가 좀 생겼으면…… 그저 시뻘건 피가 흐르는 사건…… 콱 부딪쳐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큰 사건이라도 하나 생겼으면…… , 괜히 쓸데없는 생각에 사람이 침울해져서!……"

미상불 무얼로 보나 영호는 침울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우선 천석거리나 되는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착실한 사음(舍音)에게 맡겨 두고 그 수입으로 생활을 하는 터요, 또 그의 인생관이나 관념이 낙천적이며 건실한지라 그 방면으로부터 갑자기 번뇌로운 변화와 타격이 생겼을 리는 없는 것이다.

나이도 스물일곱이니까 이십 안팎의 청소년에게서 보는 막연한 번민도 없을 것이다.

아직 결혼도 아니 했고 양친도 다 돌아갔으니 아무런 가정적 계루도 없다.

보통학교로부터 중학교 대학까지 정규로 마치었고, 스포츠에는 무엇에나 능하지만 그중에도 유도와 철봉과 권투에는 전문적 기능이 있다.

서적은 대개 과학서류를 보고 평소에 하는 일은 응용화학과 전기에 관 하여 ( 그의 집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도 부러워할 만한 실험실이 완비되어 있다) 연구를 하고 있다.

사람이 생김새도 싱겁게 크다거나 잔망스럽게 작지 아니하여 좋은 체격이요, 타고난 천성이 쾌활하여 까스럽지 아니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고 있다.

어느 외딸을 둔 과부·마나님이 있다면 사윗감으로 침을 삼킬 만한 좋은 청년이다.

이러한 그이니 무엇으로 보나 오뇌와 수심이 생길 리가 없을 터인데, 요 새 며칠은 그가 혼자 있을 때면 아주 알아보게 우울하여진 것이다.

물론 그새 해내려오던 일상생활은 변화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도장(道場)에 들어가 철봉과 권투의 연습을 한다.

목욕을 하고는 그 길로 중앙학교 뒷산으로 아침 산보를 올라간다.

돌아와서는 조반을 마치고 나서 책을 보고 연구실에 들어가 실험을 하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전에는 기쁜 마음으로 당길성 있게 해오던 것인데 요새 며칠 동안은 마치 도는 기계가 동력이 그쳐도 타성적으로 그냥 돌듯이 무심중에 내키지 않게 반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혼자 있는 때(실상 하루의 대부분을 혼자 지내지만) 더우기 아침 산보를 왔을 때에는 유달리 더 침울해지곤 한다.

오늘도 아침에 산에 올라와서는 약수먹기는 젖혀놓고 누구를 기다리는 것도 같고 찾는 것도 같이 이 골 저 골로 돌아다니다가는 이 소나무 등걸에 걸터 앉아서 평소에 정한 시간보다 삼십 분이나 더 보내고 겨우 중앙 학교 의상 학종 소리에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막 한 걸음 내어딛으려고 하는데 등뒤에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선생님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었다.

2

등 뒤에서 영호를 부르는 사람은 오복이라는 자동차 운전수다. 자동차 운전수라니, 영호 집의 자동차 운전수는 아니다. 영호가 사준 자동차를 가지고 경성자동차부라는 택시집에 붙여서 먹을 벌이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오복이가 이렇게 일찌기, 더구나 산에까지 찾아온 것은 예사일이 아닌지라 영 호는 직각적으로 '일거리가 생긴 거라고 짐작하고 침울하던 기분이 갑자기 긴장이 되었다.

"웬일인가?"

이렇게 인사하듯 묻는 말이나 그 속에는 막연한 기대를 머금었건만 오복이는 영호의 명상을 깨트린 것만이 미안한 듯이 그저 빙그레 웃으며 대답을 한다.

", 그저…… 좀 뵈러 왔지요."

", 그럼 집에서 기다리지."

이렇게 가벼운 실망을 느끼면서 대답하는 영호는 그래도 오복이가 대수롭잖은 일로는 이렇게 찾아오지 아니했으리라고 믿는지라 무어나 그의 얼굴에서 찾아내려고 유심히 훑어보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아니 오시길래 저도 산보삼어 올라왔지요."

사실 영호의 산보하는 시간은 매우 정확하였었다. 여섯시에 일어나 아침 운동을 한 시간 동안 하고 목욕하는 데 삼십 분, 그리고 산보하는 데 한 시간 ——— 그러니까 여덟시 반이면 으례 산에서 돌아오건만 오늘(뿐 아니라 연해 여러 날)은 아홉시가 지나도록 돌아가지를 아니한 것이다.

", 참 요새는 내가 산에 와서 시간을 너무 허비해서…… "영호는 자기의 잘못이나 수하 사람에게 들킨 듯이 얼버무린다. 그러고 나서 화제를 돌려 "그래, 요새 벌이는?…… 심심치나 않은가?"

"뭘요. 그저 그 대중이지요."

"인제 봄이 되고 하면 차차 나어지겠지."

"그렇지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시 말이 없이 걸어내려왔다.

영호는 오복이가 이렇게 긴히 찾아와서도 찾아온 요건을 곧잘 이야기 아니하는 것이, 그러면 또 교통사고나 일으키어 과료나 벌금을 물게 되니까 그 변통을 해달라고 오기는 와가지고 어려워서 섬뻑 말을 꺼내지 못하지나 아니하나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다. 오복이는 오늘 아침에 영호에게 보고 할 조그마한 일거리를 발견해 가지고 온 것이었었는데 그가 며칠 사이에 사람이 변한 듯이 우울해진 것을 보고 무슨 딴 근심이 생겼나 하여 그다지 신통 스러워 보이지도 아니하는 그 일거리를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이다.

"선생님, 요새 무슨 근심되시는 일이 계셔요?"

한동안을 묵묵히 걸어오면서 몇번이나 주저하다가 오복이는 필경 이렇게 물었다.

"?"

하고 영호는 오복이를 돌려보며 반문을 하였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내가 그렇게 남이 알아보도록 침울해졌나 허허. 이거 그래서는 안되지…… 이렇게 생각하고 일부러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자네 보기에 내가 무얼 근심하는 것 같은가?"

"."

"어쩌니……?"

"아까도 등 뒤에서 한참이나 서서 보았는데 꼭 정신 없는 이 같애요. 앉아 계신 것이…… 그러고 얼굴에도 수심이 가득하고…… "오복 이의 말에 대답이 없이 또 한동안 걸어오던 영호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면서 아주 지성으로 묻는다.

"자네 연애 해봤나?"

"?!"

너무도 의외의 말인지라 오복이는 발을 멈추고 서서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묻는가 싶어 영호의 얼굴을 아주 빠끔히 치어다본다.

"왜 그렇게 놀래나 ?…… 자네 연애해본 적이 있는가 묻는 말인데."

오복이는 비로소 싱그레 웃으며 인제 속을 알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더 웃는다. 그러나 시치미를 뚝 뗀다.

"연애요 ? 더러 해보았지요. 왜요?"

"글쎄 물어보는 말이야."

영호는 다시 말을 끊고 묵묵히 걸었다. 그들은 벌써 중앙학교 운동장 가운데까지 이르렀다. 넓은 운동장이 심심한 듯이 텅 비었다.

오복이는 이거 우리 선생님이 기어코 연애병에 걸리고 말았구나…… 그러나 다른 병과 달라 되레 다행이다 생각하고 더 물으려고도 아니하고 걱정도 놓아 버렸다.

그러나 중앙학교 문 밖을 나섰을 때에 영호는 다시 발길을 멈추고 오복이를 돌아보며 묻는다.

"자네 오스카 와일드의 The sphinx without a secret라는 소설 읽어 보았나?"

3

오복이는 정규로 중학까지 마친 터이나 제게 묻는 영호의 그 영어를 알아 듣지 못하였다.

"?"

"자네는 안 보았으리라 마는…… "하고 영호는 설명을 한다.

"더 스핑크스 위드아웃 어 시크레트란 단편소설인데 주인공이 어느 착잡한 거리에서 누른 칠을 한 마차를 타고 있는 썩 눈에 드는 여자 하나를 발견 했단 말이야. 그래 그 여자를 다시 좀 만나볼 양으로 매일 그 거리에 나와서 마차란 마차는 모조리 끼웃거리고 다닌다는 이야긴데, 그러다가 필경 어느 연회에서 만나가지고 연애를 잠시 하기는 했지만…… ""그러면 선생님도 인제 만나시기는 만나시겠읍니다."

오복이는 영호가 채 말도 끝내기 전에 웃으면서 말허리를 자른다.

"머 어째?"

영호는 나무라는 듯하나 눈으로는 웃는다.

"이 사람 소설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만나기는 누구를 만난단 말인가?"

"하따, 그렇게 시치미를 떼실 것도 없고, 또 못 만나신다고 걱정하실 것도 없읍니다. 아마추어 탐정 백영호씨요 또 그 수하에 이 오복이가 있는데 어떻게 한들 못 찾아내겠읍니까?"

오복이는 신이 나서 활개를 크게 치며 뽐낸다.

그러나 영호는 고요히 고개를 흔든다.

"그건 안돼…… 내가 무슨 탐정을 직업적으로 하는 바도 아닌데 그 방법으로 그이를 찾아내려 드는 것은 어쩐지 불순하고 죄스러운 것 같어서…… "이 말에 오복이는 하하 하고 크게 웃는다.

"제가 잘 알어맞혔지요 ? 어쨌거나 선생님이 연애병에 걸리신 것만은 사실이지요?"

"그렇다네."

영호는 힘없이 대답을 한다. 바로 한 십여 일 전 일이었었다.

영호가 아침 산보를 하고 내려오노라니까 그때까지 보지 못하던 이상한 산보 객의 한 쌍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것이었다.

하나는 남자 노인인데 허연 수염이 탐지게 났고 부대한 몸에 잘 얼리는 커 달란 외투를 입었었다.

그 옆에는 멀리서부터 보아도 가냘프고 청초하게 생긴 배젊은 여잔데 윤이 번질번질하는 털외투에 역시 새까만 전 없는 모자를 썼었다. 외투를 벗으면 하늑하늑 한 보드라운 양장을 했으리라고 영호는 생각하였다.

 

영호와 그 한 쌍 남녀가 가까이 마주쳤을 때에 졸연히 무엇에 놀라지 아니하는 영호건만 눈이 번쩍 띄었다.

영호는 자기가 평소에 애인으로 공상에 그려보던 그 여자를 현실에 만나는듯 하였다.

갸름한 얼굴에 여녀같이 노블한 코, 조그마한 입, 역시 어린 듯이 조그맣게 올라붙은 아래턱, 그리고 영롱한 두 눈 ——— 이 여자와 만난 것은 영호에게 커다란 경이요, 또한 견딜 수 없는 기쁨이었었다.

두 사람을 지나쳐 놓고 영호는 체모도 없이 돌아서서 그들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운동화를 신었기 때문에 늘 하이힐만 신었던 듯한 걸음매가 좀 부자연스러워 보이나 호리호리한 뒤태도까지도 영호가 심중에 그리던 그 여자와 꼭 같았다.

영호는 그렇게 놀라기는 하면서 그래도 탐정식으로 여러가지 것을 관찰 하였다.

즉 그 노인과 여자가 얼굴 모습이 비슷하니 부녀(父女)간이라는 것, 그들의 입은 외투며 더우기 노인의 쓴 모자로 보아 중국 방면에서 돌아왔으리라는 것, 여자는 무엇인지 고초를 겪어왔기 때문에 볼에 가벼운 그림자가 끼고 또 안색이 약간 창백하다는 것…… 그 뒤 닷새 동안 그렇지 아니하여도 명랑한 영호의 마음은 더욱 명랑 하여졌다.

그는 산보 시간을 변경하여 여덟시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해야 그는 그들과 같이 산보를 하고 또 물터에서도 만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취운정 산보터의 참새들은 이 새로 나타난 큰 노인과 어여쁜 여자의 이야기로 꽃이 피었다. 영호도 그 틈에 끼여 그 부녀의 내력과 근지를 들을까 하였으나 아무도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4

그들 부녀의 그림자가 산보터에 나타난 지 닷새 만에는 그들이 의외에 나타났던 것처럼 역시 의외에 사라지고 말았다.

영호는 그 나흘 동안 그들을 세세히 관찰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자체가 남의 눈에 몹시 띄게 된 존재임에 불구하고 그와 같이 남의 주의를 끌게 되는것을 꺼리어하는 눈치가 완연히 보였다.

누가 자기네의 행동을 감시하지나 아니하나 하고 줄곧 사방을 조심스럽게 둘러보곤 하였다.

그리하던 끝에 필경은 발자국이 뚝 그쳐버리고 말았다.

영호는 이래 침울하여졌다. 그는 레미제라블의 한 장면을 생각하였다.

장발장이 코세테를 데리고 공원에 산보를 늘 나오는데 줄리앙이 그들을 추근추근 하게 따르니까 그만 갑자기 자취를 숨겨버린 ——— 그와 꼭같은 경우라고 영호는 생각하였다.

그렇게 생각하매 영호는 연연한 생각 외에 그들에게 필시 깊은 속사정이 있으리라는 호기심까지도 버썩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몇번이나 하려면 할 수 있는 탐정적 수단으로 그들의 거처를 탐지 하며 그 근지와 내력을 알아내어 볼까 하였으나 그것이 어쩐지 죄스러운 성만 싶어 차만 손을 대지 못하고 혼자서 그와 같이 민민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영호와 오복이는 묵묵히 걸어서 집 문앞까지 이르렀다. 문앞에는 오복이의 자동차가 놓여 있다.

두고두고 참고가 되겠으므로 여기서 잠깐 영호 집의 구조를 이야기해 두기로 했다.

작년 가을에 영호는 계동 위생계터의 주택지의 동편 언덕 위에 그 중에도 훨씬 남쪽으로 당겨 자기가 손수 설계한 양옥을 지었다.

한 열두어 층 되는 석축을 올라오면 나직한 벽돌담에 역시 나직한 회색 철문이 달리어 있다. 문을 들어서면 그다지 넓지는 못하나 손으로 쓰다듬은 듯한 정원이 있다. 정원과 연하여 바로 서향의 석조(石造) 양옥이 서서 있다.

현관문을 열고 복도로 올라서면 바른편에는 이층으로 올라서는 층계가 있고 복도가 막다른 곳에 서생 겸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상준의 방이 있다.

그곳에서 다시 복도가 바른편으로 굽어가지고 좌우로 방이 하나씩 있고 복도는 그대로 부엌에까지 뻗히었다. 이 좌우로 있는 방 가운데 상준이가 거처 하는 방과 접한 왼편 방에는 침모 겸 식모로 있는 노인이 거처하고 바른 편 방은 주부의 방으로 예정한 것이나 지금은 식당으로 쓴다.

이층은 층계로 올라가면 한가운데로 복도가 있고 그 좌우로 전부 영호가 쓰는 방이 있다. 왼편 큰방이 실험실이요, 바른편으로 첫번에 있는 것이 응접실 겸 항용 거처하는 방이요, 그 다음 것이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서재 겸 침실이다. 이 방만은 심지어 소제까지도 영호 자신이 하지아 무도 들인 적이 없다. 아무도 들인 적이 없다니 말이지 그러한 곳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지하실이다.

지하실의 원 문은 부엌으로 통하였으나 굳게 잠기어 있고 그 밖에는 어디로 통하는지 아는 사람도 없다. 또 누가 알아내려고도 아니한다.

이층 복도에서 다시 더 나아가면 층계가 있어가지고 그것이 뒤 울안에 지은 도장으로 통한다.

이 도장은 한편이 광이요, 그 다음이 도장이요, 그 옆으로 목욕탕이 붙어있다.

아래층 식당에서 영호와 오복이는 맞상을 하여 조반을 먹었다. 조반 후에 영호는 이층으로 올라가고 오복이는 일단 자동차에까지 다시 나와 운전대 쿠션 밑에 넣어두었던 소포 같은 꾸러미를 꺼내가지고 디시 들어와 이 층으로 올라갔다.

영호는 응접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오복이를 기다리고 있다.

이 방은 복도로부터 들어오는 도어가 있고 동편과 남편으로는 두터운 비단 커튼을 가린 두 겹 유리창이 달리어 있다. 그리고 침실로 통하는 도어가 있다. 방안에는 한가운데 조그마한 둥근 탁자와 또 암체어와 소파가 두어 개있고 전화가 침실 편 벽에 달렸을 뿐 별로 눈에 띄는 것이 없다. 물론 사 방벽에는 그럼직한 그림의 액이 달려 있기는 하지만.———

영호와 오복이는 탁자를 사이에 주고 마주 대하여 앉았다.

탁자 위에는 지금 오복이가 가지고 들어온 소포 같은 꾸러미가 놓여있다.

이것이 장차에 커다란 파동을 일으킬 장본인 줄은 두 사람이 아직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5

영호는 소포 꾸러미를 집어 들고 앞뒤로 살펴보며 묻는다.

"이게 웬 거냐?"

"위선 좀 풀어보세요. 아무래도 무슨 조건이 붙은 것 같애요…… 제가 끈을 풀까요?"

하고 오복이는 손을 내어민다.

"가만 있어."

영호는 오복이의 하던 말은 듣지도 아니한 듯이 소포 꾸러미에 이상한 주의가 점점 깊이 끌리어간다. 그는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거 이상한데…… 경성 가회동 이백십오번지라고 썼지만 가회동에 웬게 이백십오 번지가 있나 ?"

"그렇지요…… 서울 안에 이백 번지가 넘어가는 데라고는 관철동하고 청진동하고 그 멫 군데밖에는 없읍니다."

"…… 그러면 이것부터 조건이 상당히 붙는 거야…… 가만 있자."

영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에 있는 실험실로 들어가더니 강도( 强度) 의 확대경( 擴大鏡)을 가지고 들어와서 소포에 붙은 우표와 스탬프를 비추어 본다.

", 이건 완전히 트릭야…… 스탬프는 광화문우편국 것인데…… 그리고 날짜가 이것 7 6 12라고 박혔으니 벌써 재작년 것이지…… 그런데 보게."

하고 영호는 확대경을 옆에 놓으면서 뒤집어놓은 소포를 가리킨다.

"발신지(發信地)가 군산 산상정 십팔번지라고 썼지 ? 분명 이 발신인 유대 설이란 것도 아무렇게나 지은 이름일걸세…… 그것뿐인가…… 이 소포를 싼 하도롱지를 보든지 잉크빛을 보든지 재작년 유월에 띄운 거라면 이렇게 말쑥하고 새로울 리가 없는 거야…… 지문이나 남아 있나 볼까…… 자네도 이리 오게…… "영호는 오복이를 데리고 건너편 실험실로 들어갔다.

조선 방으로 하면 무려 여섯 간은 됨직한 넓은 방에 가로는 약품과 기계들을 넣은 장이 군데군데 들려 놓여 있다.

실험대는 둘인데 하나는 화학실험대요 하나는 전기실험대다. 그리고 남편 구석으로는 사진 암실이 있다.

오복이는 가끔 이 방에 들오와 실험에 조력했기 때문에 서툴지가 아니하다.

영호는 물론 처음부터 조심해서 만지었고 오복이도 줄곧 장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에 만일 지문이 나타난다면 두 사람 중의 누구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영호는 조심스레 그리고 세밀하게 실험을 해보았으나 풀칠을 한 한 곳과 우표 붙은 한귀퉁이에 아주 희미하게 지문처럼 생긴 것이 있을 뿐 아무 것도 얻지를 못하였다.

원체 종이가 하도롱지인 까닭에 확실한 지문이 남아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두 사람은 소포 ——— 가짜 소포 ——— 를 풀어보기로 하였다.

이 소포가 가짜요, 그것이 오복이의 손을 통하여 이렇게 들어왔다 하면 거기에 미상불 약간의 위험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호가 과거 ——— 과거라야 최근 삼사 년 사이지만 ——— 암암리에 남의 원망을 산 몇가지 일이 있었던 때문이다. 즉 그의 탐정적 활동으로 인하 여 ——— 그러니 원혐을 먹는 사람이 위험한 폭약 같은 것을 이처럼 트릭을 써서 보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영호나 오복이나 말은 아니하지만 두 사람이 다같이 이런 생각을 가지었고, 더우기 오복이는 자기가 그것을 얻어가지고 온만큼 속이 죄었다.

그는 풀어보지 말고 그대로 경찰서에 습득물로써 가져다 주자고도 하고 싶었으나 여호의 고집을 잘 아는지라 말을 내지 못하였다.

영호는 그러는 사이에 벌써 손가위로 묶은 노끈을 자르고 와삭와삭 소리 가나는 하도롱 종이를 펴기 시작한다.

하도롱 종이 속에는 신문지가 한 겹 싸여 있고 또 신문지 밑에는 유지로 한 겹이 싸여 있다.

차차 깊이 들어가면서 오복이의 얼굴에는 물론이요 영호의 얼굴에도 긴장한 빛이 완연히 나타나 보인다.

유지를 풀고 나니 허연 솜뭉치가 나온다. 무슨 냄새가 나나 하고 영호는 코를 벌름거리었으나 아무 냄새도 나지 아니한다.

옆에 놓인 두 개의 핀셋을 집어 영호는 더욱 조심하여 솜뭉치를 헤치었다.

보통 양약국에서 파는 탈지면이라 둘둘 만 것이 곧잘 풀어진다.

다 헤쳤을 때에 그 속에서 나온 것!

영호와 오복이는 다같이 너무도 의외로움에 그리고 이상스러움에 '!’

하고 놀랐었다.

6

손가락 한 토막!

솜뭉텅이 속에서 나온 것은 바로 사람의 손가락 한 토막이다.

소포 꾸러미가 상당한 조건이 붙는 것이라는 것은 미리미리 짐작치 못 한 바가 아니나 명민한 영호로도 그 속에서 사람의 손가락 한 토막이 굴러 나올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이 너무도 그로 백%의 사실을 의외에 접한 영호 그리고 오복이는 잠시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영호의 탐정의식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핀셋으로 손가락을 집어들고 세밀히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손가락은 엄지손가락인데 바로 대 밑에서 잘랐기 때문에 형상으로 보아 왼 편인 것이 분명하다.

피가 몹시 엉겨붙은 것을 보면 산 사람의 것을 잘라낸 것이요, 살의 변색 한 정도와 피의 엉긴 정도로 보아 사흘이나 이틀 전에 자른 것이다.

검푸르게 변색이 되어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주름살이랄지 손톱으로 보아 젊은 사람의 것은 아닌 듯하고, 그러나 황한 일을 하거나 하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요, 손끝이 고운 신세 편한 사람의 것이다.

손가락 등에 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전신에도 털이 적고 수염도 별로 없을것이며 비교적 건강한 사람의 것이었었다.

영호는 마치 골동품 수집관이 무슨 진기한 고물이나 발견한 듯이 이 끔찍한 손가락토막을 흥미 깊게 세세히 조사하고 나서 다시 지문을 뜨고 또 석고( 石膏) 로 모형까지 떠놓았다.

그리하는 동안에 오복이는 묵묵히 영호의 눈치빠른 조수 노릇을 할 따름이다.

지문을 뜨고 석고로 모형을 뜨고 그러고 난 뒤에 영호는 손가락토막을 전처럼 전에 쌌던 재료로 감쪽같이 도로 싸놓았다. 그러고 나서 의자에 걸터 앉아 담배를 붙여 물고는 오복이더러 비로소 그것을 얻은 경로를 묻는다.

오복이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날 아침 오복이가 붙어 있는 경성자동차부에 여자 손님 하나가 나타났다.

마침 오복이의 번이기 때문에 그 여자 손님을 태우고 경성역까지 나갔다.

경성역에 도착한 것이 여덟시 오분.

여자 손님은 자동차에서 내리면서 일원짜리 두 장을 핸드백에서 꺼내어 오복이를 주었다. 오복이는 식전 마수에 너무 반가와 "너무 많습니다."

고 하니까 그 여자는 생긋이 웃으며 "…… 그냥 받아두세요."

하고는 대합실로 들어가 버렸다.

오복이는 속으로 오늘 마수거리를 잘했구나 싱글벙글 자동차를 몰아 들어왔는데, 자동차부에 돌아와 보니까 차실 안에 언뜻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지금 이 손가락토막을 싼 소포 꾸러미였었다.

항용 같으면 경찰서에 가져다 주든지 도로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겠지만 택시 값이 팔십 전인데 팁을 일 원 이십 전이나 주고, 또 고운 미소까지 보여준 마수거리의 어여쁜 색시였던지라 그의 미소를 또 한번 즐길 겸 오복이는 선 자리에서 자동차를 몰아 다시 경성역으로 나갔다.

대합실로부터 식당, 티룸, 이발소까지 고비샅샅이 찾아보고, 또 입장권을 사가지고 플랫폼까지 들어가서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그 여자의 그림자라 고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소포에 쓰인 대로 가회동 이백십오번지로 찾아가려 하였으나 가회동에 이백십오번지란 있지도 아니한 곳이니, 그러면 이게 분명 조건이 붙은 것이라고 영호에게로 가지고 온 것이다.

영호는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팁 일 원 이십 전이 그 소포를 경찰서에 가져다 주라는 수 수 룔세…… ""? 경찰에 가져다 주라고요?"

오복이는 의아해서 묻는다.

"그래…… 그러나 그건 차차 알고…… 그 여자가 대관절 어떻게 생겼 더나?"

"아주 상이야요……… 얼골이 갸롬하니 코가 오뚝하고 입이 어쩌면 그렇게 암상스럽게 예쁜지…… 턱은 더 예쁘지요."

오복이의 말에 점점 놀라운 빛을 띠던 영호는 갑자기 "옷은?"

하고 묻는다.

"양장이지요. 새까만 털외투에."

오복이가 말을 마치기 전에 영호는 "!"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7

영호는 반사적으로 다시 의자에 펄씬 주저앉는다.

그의 얼굴에는 일시에 피가 물려올라와 벌겋게 상기가 되고 눈은 참담하다 할 만큼 번쩍거린다.

"조고마한 감장 모자를 썼지. 키가 호리호리하니 날씬하고?"

영호의 놀라는 데 따라 놀란 오복이는 묻는 대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영호는 겉잡을 수 없이 머리가 혼란하여졌다.

손가락토막을 싼 가짜 소포를 오복이의 자동차 속에 버리고 간 것은 갈데 없이 산보터에 나타났던 그 여자다.

그 여자!

첫인상이 머리에 꽉 박혀가지고 연연한 그리움에 잊지 못하던 그 여자다.

그 여자가 이 확실히 범죄 ——— 범죄라도 아직 단언할 수는 없으나 상필 무서운 성질을 띤 이 범죄에 관계하다니?!

 

그는 오복이가 한 말에 자기의 귀를 의심하는 듯이 다시 한번 다지어 묻는다.

"얼골이 갸롬하고, 그런데 좀 창백하지?"

"네 네. 그렇게 말씀하시니 생각납니다마는 좀뿐 아니라 몹시 창백해요."

"눈이 영롱하고 코가 노블하고…… ""."

"입이 조고맣고…… 조고만 턱이 위로 올라 붙고…… ""네 네."

"그러고 윤이 반짝반짝하는 털외투에 까만 모자…… ""."

"!"

영호는 문득 생각난 듯이 묻는다.

"말소리는?…… 어때? 무슨 사투리가 없어?"

영호는 그의 말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글쎄요…… 약간 남도사투리가 섞였든 것도 같은데…… 그거 확실히는 모르겠 읍니 다."

"남도라도 전라도 사투리가 다르고 영남 사투리가 다르잖나?"

"글쎄 그것을 자세…… "오복이는 주의하지 아니한 실수에 무렴한 듯이 말끝을 흐린다.

영호는 팔로 몸을 짚고 새끼손톱을 야긋야긋 씹으면서 골똘히 생각을 한다.

"선생님 아시는 이야요?"

오복이는 머뭇머뭇하다가 물어보는 것이다.

"…… 그러나 자네만큼밖에는 나도 몰라."

"?"

오복이는 그 말의 뜻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영호는 설명을 한다.

"산모터에서 멫번 만난 것뿐이다."

오복이는 싱긋이 웃었다. 그러고 속으로.———

'하하 우리 선생님이 모처럼 애인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가 갑자기 어데로 사라졌다…… 그런데 그가 이 소포에 관계된 인물이다…… 그래서 저렇게 흥분이 되셨구나.’

영호는 오복이가 그 속을 짐작하는 것을 보고 역시 고미소를 띠고 일어섰다. 그의 심중에는 벌써 계획이 들어섰다.

 

", 한바탕 해보세…… 이 소포는 어쨌거나 저편이 고의로 세상의 주목을 끌려고 자네를 시켜 경찰서에 보내자는 것이니까 좌우간 경찰서에 가져다 주게…… 그러면 그것이 신문에 날 것이고 거기 따러 사건도 한걸음 더진전이 되겠지…… 그렇지만 그냥 누가 자동차 안에 ——— 정거장에 나갔을 때 말이야 ——— 자네 모르는 사이에 버리고 간 것을 가지고 왔다고 그래 응!

그 여자 말은 일체 입밖에 내지 말란 말이야."

"네 네."

"그러고 지금 내려가는 길에 재동파출소에 들러서 시치미를 뚝 떼고 가회동에 서광옥이라는 사람이 어느 번지에 사나 물어보란 말이야, 서광 옥이…… 이 소포의 수신인 말야…… 헛걸음이겠지만 혹시 또 모르는 일이니까."

"."

"그리고 역시 막상 모르니까 자네가 오늘 낮차 ——— 아니 밤차로 가도 관계 찮 겠지 ——— 밤차로 군산까지 가서 산성정 십팔번지를 좀 조사해 가지고오게."

"…… 그러면 위선 재동파출소에 가서 알아보고 전화를 건 뒤에 경찰서도 가겠읍니다."

"."

오복이는 소포를 들고 나갔다.

오복이를 보내고 나서 한 십오 분 가량 영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등 뒤에서 전화벨이 따르르 하고 울린다.

8

영호는 일어나서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전화는 오복이에게서 온 것이다.

"지금 와서 호적대장을 뒤져봤는데 그런 사람은 없대요."

"응 알았어…… 지금 경찰서로 가겠지?…… 가만 있자, 그걸 가지고 도루 오게."

무슨 생각으로 영호는 오복이더러 도로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오복이는 곧 돌아왔다.

"왜요? 더 조사해 보실 것이 있어요?"

"아니…… 그걸 자네가 직접 가지고 가면 괜히 자네한테 혐의가 돌아와서 성가시어."

그도 그럴 듯한 말이다. 불난 것을 보고 "불이야!"소리친 사람을 먼저 조사하 듯이.———

영호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책보 하나를 가지고 다시 올라와서 가짜 소포를 거기다 쌌다.

"경찰을 괜히 우롱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불려다니면 쓸데없이 성가시 고우리 활동만 방해되니까…… 이놈을 가지고 백화점으로 가란 말이야. 가서 변소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않게 슬그머니 속엣것만을 풀어놓고 책보는 포켓 속에 넣어가지고 나오면 백화점에서는 찾으러 오는 사람을 기다리다가 경찰서로 보내겠지…… 알겠나?"

"."

오복이는 보에 싼 것을 맡아가지고 일어섰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여관조합에 들러서 ——— 어딘지 아나?"

"모르지만 아무 여관에나 전화로든지 물어보면 알겠지요."

"응 알어가지고 찾아가서 여관일람표 한 장을 얻어가지고 오게…… 인쇄 해 두고 쓰는 게 있으니까."

오복이는 책보에 싼 것을 받아들고 물러나갔다.

영호는 남편 유리창 앞에 놓인 암체어에 푹 걸터앉아 창 밖을 내어다 보고있다.

몇 줄기 살이 오른 듯한 따스한 볕이 유리창으로 쪼여든다.

바로 눈아래 휘문학교 운동장에서는 새까만 학생들이 그득 들어서서 아물거리고 있다.

휘문학교 정원에 서 있는 포플라의 나무끝이 제법 파릇파릇하다.

멀리 보이는 남산에는 엷은 아지랭이가 끼어 아른거린다.

다른 날이라면 영호는 완연히 보이는 봄빛에 반가이 "벌써 봄인가!"

하고 즐겨했겠지만 지금은 딴 생각에 골몰하여 그러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아니하였다. 차라리 그의 눈에는 산보터의 그 여자의 환영이 보일 뿐이다.

산보터에서 만나던 그 여자…… 그리고 큰 범죄를 저지른 그가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소포처럼 싼 것을 자동차에 내버리고 달아나는 역시 그 여자.

"내보살 외야차(內菩薩外夜叉), 겉은 그렇게 상냥하고 착하게 생겼으면서 속은 악독한 범죄를 하는 요부 독부?"

영호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바로 고개를 흔든다.

"아니, 그럴 리가 없겠지…… 분명히 무슨 깊은 사정이 있는 일이 겠지…… , 이거 내가 이렇게 냉정하게 생각을 하지 못해 안 됐군…… " 영호는 일부러 냉정하게 생각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 여자에게 연연한 정이 끌리기 때문에 생각이 자꾸만 감정적으로 돌아감을 깨달은 것이다.

좌우간 일은 용이치 아니한 일이다. 사람의 손가락을 잘라서 그것을 일부러 경찰이 알고 세상이 알게 하느라고 가짜 소포를 만들어서 내버렸으니, 말 하자면 어느 큰 범죄의 준비 행동이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그 이면에 있는 인물들이 경찰의 수사쯤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그렇지 아니하면 결사적( 決死的) 내용을 가진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큰 도적질이 아니면 복수의 행동일 것이다.

이렇게 차차 추리를 해가고 있는 판에 서생인 상준이가 올라와서 손님이 왔다는 말을 한다.

"손님? 누구야?"

"웬 안노인이야요…… 전에 선생님이 계시든 집 주인이라는가 봐요."

마침 쿵쿵거리며 층계 올라오는 소리가 나더니 도어를 밀어젖히고 안노인하나가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선다.

영호가 작년까지 객지 생활을 하는 동안 한 이태나 하숙을 하고 있던 집노인이다. 노인이라야 오십밖에 아니 되었지만.———

"백서방, 나요 나야."

"네 네, 알었읍니다. 잘 오셨어요. 좀 앉으십시요."

영호는 노인이 무슨 일로 이다지 허둥지둥하나 싶어 궁금하였으나 우선 그렇게 인사를 하였다.

"아이구 앉는 게 무어유! 큰일 났는데…… "평소에도 좀 허겁스러운 마나님인지라 혹시 누가 밥값이나 잘라먹고 달아난 것을 이러나 보다 짐작하고 영호는 웃으면서 그를 의자에 앉히었다.

2. 이상한 손님 1 "글쎄 이 일을 어떡허누!"

노인은 연신 안절부절한다.

"글쎄 무슨 일이세요 ? 돌아가신 영감님이 살어오셨읍니까?"

영호는 노인의 허둥대기만 하고 말을 못하는 것이 우스워서 슬쩍 농을 한 것이다.

"! 백서방두! 영감이 살어왔으면 아이구 그놈의 영감이…… 아이구 그 놈의 영감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이야 ! 영감만 그렇게 일찍 아니 죽었으면 내가 왜 이런 고생을 다 허우!"

"글쎄 무슨 일이여요 ? 돌아가신 영감님이 살어오신 것도 아니고…… 그러면 마나님이 옥동자를 해산하셨읍니까?"

"아이구 망칙해라 ! 허기야 늙은이가 영감 없이두 옥동자는 말구 눈먼 딸년이라 두 하나 날 수 있다면 작히 좋겠수만…… 글쎄 백서방, 이것 좀 보구려! 내가 자식이 있수, 가까운 일가가 있수…… 답답하니깐 이렇게 찾어와 서 일 의논을 하는구려…… ""그러시구 말구요…… 무슨 일이세요?"

"글쎄 그이가 그저께 저녁에 나간 채 이내 소식이 없구려!"

"그이라니요?"

"우리 집에 있는 손님 말이야."

"그래 그이가 밥값을 아니 내었어요?"

"아니야…… 밥값을 한 달치를 선금 냈는데 보름밖에 아니 먹은걸…… ""그러면 되려 잘됐군요."

"그래두 그래서 쓰나!…… 그런데 그이가 아무래두 무슨 변을 당 한 거만 같구려!"

"대관절 누구야요 ? 그이라는 사람이?"

노인은 비로소 안정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영호는 큰 사건을 앞에 놓고 대수롭잖은 일에 참견하기가 속으로 짜기는하였으나 할 수 없는 사정이라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가 없이 되었다.

이 노인이 익선동에서 염집 하숙을 하고 있는 것은 영호가 그 집에 있었던 관계로 잘 아는 것이고.────

지금부터 보름 전에 노인의 집에 웬 점잖게 생긴 양복 입은 사람이 찾아와서 하숙할 방이 있는가 물었다.

뜰 아래로 두 개 있는 방은 다 손님이 들어 있고 행랑방과 건넌방이 비어있기 때문에 노인은 반겨 그를 두기로 하였다.

손님은 사십 좀 넘어 보이고 가지고 오는 금침이나 짐으로 보아 별로 군색한 사람인 듯싶지는 아니하였다.

밥값은 독방에 이십 원을 받는데 그는 특별히 오 원씩 더 내겠다고 자청하고 선금 이십오 원을 이사해 오는 그 자리에서 치르었다.

이만하면 밥을 싸짊어지고 다니면서 찾아도 구하기 어려운 고마운 손님이다.

그러나 그러한 반면에 좀 이상한 것을 하는 병통이 있었다.

그는 밥상은 으례 문앞에 가져다 놓게 하고 그것을 손수 들어 들여다가 먹 지 결코 사람을 방 안에 들이지 아니하였다.

그와 같이 방에 남을 들이지도 아니할 뿐 아니라 밖에 다른 방 손님이 있다든지 혹은 누가 와서 있으면 결코 나오는 일이 없었다. 하는 일이라 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낮 출입은 꼭 한번 밖에 한 일이 없었다.

낮에는 기침소리 하나 크게 내지 아니하고 조용히 들어앉아 여러 가지 가져오는 신문이나 보고 ──── 신문 보는 것도 누가 눈으로 본 것이 아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므로.

저녁을 먹고 나서는 바깔이 어둑어둑해지면 가만히 문을 열고 방에 들여놓았던 구두를 들고 나와서 역시 소리없이 신고 밖으로 나갔다가 자정이 가까와 서 돌아오곤 하였다.

편지 같은 것 한번도 온 적이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이 찾아오기는 고사하고 그는 주인에게 누가 혹시 찾아와서 찾더라고 없다고 따라시라는 부탁을 해두었다.

성명도 대어주지 아니하였다. 그러니까 주인에서는 그저 건넌방 손님이라고 불렀을 뿐이다, 그런데 한가지 더우기 이상한 것은 그가 밤에 나갈 때마다 없던 수염이 수북이 나는 것이었었다.

낮에 보면 위아래 턱과 볼이 말쑥한데 밤에 나갈 때면 아주 탐스러운 구레나룻이 수북이 난 것이 언뜻 몰라보게 의수하였다.

그리하여 돈을 그렇게 많이 내고 조용해서 좋기는 좋으나 어쩐지 좀 섬뜩한 생각이 들던 판인데 그가 온 지 한 일 주일 되어서 이상한 일이 생기었다.

2

마나님은 냉수를 청하여 벌컥벌컥 들이마신 뒤에 다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그날 밤 이슥한 뒤에 돌아온 건넌방 손님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무어라고 두 덜 거리며 다시 마루로 나와 주인을 찾았다.

마나님이 나가 보니까 상을 무섭게 해가지고 "누가 내 방에 몰래 들어왔었오?"

하며 금시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별렀다.

그러나 그것은 생트집인 것이, 그는 나갈 때면 앞문은 겉문을 닫아 안으로 걸고 샛문에는 커다란 자물쇠를 잠그기 때문에 아무도 들어가고 싶어야 들어갈 수가 없었다.

 

"들어가다니, 쇠를 그렇게 잠그고 했는데 누가 들어갑니까 원!"

마나님은 이렇게 변명을 하였으나 그는 곧이듣지 아니하였다.

"아니요. 누가 분명 곁쇠질을 하고 들어왔어요…… 내가 나간 뒤에 잠잤 읍니까?"

". 저녁 먹고 나서 깜박 잠이 들었었어요.……"

"그래 그동안에 어느 놈이 곁쇠질을 하고 들어왔어요."

"아니, 그럼 무엇 없어진 것이 있읍니까?"

"없어진 것은 없지만…… ""아이구, 그러면 다행이지요. 나는 가슴이 성큼 했어…… ""! 암만 그래도 못생겼다. 내가 그걸 함부로 두고 다닐까 바 ?……"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그는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듣고 있던 영호는 갑자기 흥미가 바짝 났다.

그는 그 손님이라는 것이 해외에서 들어온 ×××계통의 인물로 그와 같이 은신을 하고 있다가 경찰서에 검거된 것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방에 몰래 들어온 사람이 있다는 둥, 또 그가 혼자 중얼거리더란 그 말이 필시 사상 관계와는 딴이로 그럼직한 비밀을 담뿍 가진 듯 싶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나님의 말허리를 잘라 물었다.

"지금 집에는 그 건넌방 손님하고 또 누구누구 있어요?"

"손님? 머 뜰아랫방에는 두 방에다 그전 있든 손님이고, 백서방도 알지?

은행에 다니는 김주사허구 또 대학교 다니는 학생 허구…… "", 그이들은 나도 같이 있었으니깐…… ""그러고 문간방에 온 지 한 열흘 되는 젊은이 하나가 있구…… ""새로 왔어요?"

"."

"무얼 하는 사람인데…… ""모르지…… 시굴뜨기야…… 아주 반편스럽디 반편스럽게 생긴걸…… 뭐 서울 구경을 왔다나."

"철 아닌 서울 구경은 웬 거야!"

"그러니까 반편이라지!…… 그나마 지금은 떠나고 없어요."

"나이 멫 살이나 되어 보이지요?"

"그저 한 삼십 되었을까? 백서방보담 좀더 먹어 보이드구먼…… 사람이 반편스럽게 생겨서 나이도 잘 모르겠어."

"시골은 어느 시골이라고 그래요?"

"몰라."

 

"누구 찾어오는 사람도 없었어요?"

"없지."

"그 사람도 그저 방에 꾹 백혀 앉었어요?"

"."

"서울 구경 왔다면서?"

"…… 그래 내가 왜 구경도 아니하느냐니깐 그 대답이 멋지지! 길에 나갔다가 집을 잃어버릴까 바 못 나간다구."

"떠가기는 언제 떠났어요?"

"그게 글쎄 바로 야단이 나든 날이야…… 그러니깐 건넌방에 누가 들어갔다고 두덜거리든 그그이튿날 저녁이로군…… 건넌방 손님을 그 뒤는 나가잖고 밤에나 낮에나 들백혀 있고…… 헌데 그 시골뜨기가 저녁을 먹고 나더니 갑자기 떠나겠다고 그리겠지…… 그래 내가 행랑방에 나가서 같이 밥값 회계를 했다우…… 밥값 회계를 하는데 이 원수가 어떻게 둔한지…… 한 시간은 더 싸웠을 거야. 그래 회계하다가 말고 저도 진력이 났든지 뒷간에 잠깐 다녀온다고 나가서 뒷간에서 캑캑하는 소리가 나드군…… 그런데 갑자기 안에서 불이야! 하고 안잠자기가 외치겠지요. 아이구 어떻게 놀랐던지! 그냥 버선 발로 뛰어나가니깐 마루로 연기가 하나 가득이야!"

3

마나님은 미친 듯이 불이야! 소리와 한가지로 날뛰면서 그래도 부엌으로 뛰어들어가 바가지에 물을 떠가지고 나와 끼얹었다.

안잠자기 어멈은 처음에는 벌벌 떨고 서서 어쩔 줄을 모르다가 겨우 주인 마나님의 본을 받아 바가지로 물을 퍼다 끼얹었다.

행랑방에 들었던 시골뜨기는 변소에서 뛰어나와 괴춤을 잡은 채 엉거주춤하고 서서 어쩔 줄을 모른다.

뜰아랫방 두 방에는 마침 다 나가고 아무도 없었다.

불이야! 소리에 이웃집에서와 지나가던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마루에 연기만 그같이 가득차 있지 아무데서도 불길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한참을 서두르는 동안에 연기가 헤어지고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이 씻은듯이 깨끗해 졌다.

사람들은 마치 도깨비에게 홀린 듯이 멍하니 서서 있었다.

불이 아니었고 이같이 무사하게 되매 비로소 정신을 차린 마나님은 건넌방 손님이 어디로 갔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아무데도 그는 보이지 아니 하였다.

웬일인가 하고 마루를 올라가서 건넌방 문을 열어보려고 막 문에 손을 대는데, 뒤 울안으로 난 마루의 판자문을 와락 열면서 "누구야?"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는 것이 그였었다.

그의 소리에도 놀랐거니와 마나님이 더욱 놀란 것은 그의 얼굴이다.

그의 얼굴은 금시에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흉악하고 사납게 생겼었다.

마나님은 입때까지 그의 그와 같은 얼굴은 생각지도 못하였었다. 항용 보면 그다지 상냥한 얼굴은 아니라도 그렇게 무서운 얼굴도 아니었었다.

마나님은 질겁하여 잡았던 문끈을 놓고 물러섰다.

"아니랍니다. 야단 통에 보이시잖길래 나는 웬일이신가 허구 그랬지요."

그는 비로소 얼굴을 ── 그 무섭게 생겼던 얼굴을 고쳐가지고 마루로 들어서며 자기가 그와 같이 군 것이 미안한 듯이 변명을 한다.

"아니여요. 나도 놀래서…… 놀래서 겁결에…… 그런데 거 웬 연 깁니까?"

"나도 모르지요. 거 웬 연기랍니까?"

"어느 놈이 장난을 한 게로군요."

"장난이요?"우리 집에 누구 장난할 사람이 있나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이렇게 코대답같이 하고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소방서나 경찰서에서도 이 헛불 소동을 몰랐기 때문에 그 뒤에 아무 말썽도 없었으나 이웃 사람들은 흉가집 이야기나 하는 듯이 수군거렸다.

시골뜨기는 더욱 얼이 나간 것처럼 그날 밤에 떠나고 말았다.

그 뒤는 줄곧 아무 일도 없다가 그그저께 저녁에 필경 건넌방 손님이 종적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는 그 뒤 한번인가 밤에 출입을 했고 이내 줄곧 들어앉아 있다가 그날 밤에 나갔는데 나갈 때도 다른 때와 다름없이 구레나룻을 버티고 나갔었다.

저녁에 늦게 갑자기 비가 오기 때문에 혹시 딴 데서 자고 아침에 돌아오는가 하였으나 아침에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온종일 기다리고 어제도 기다리고 오늘 아침까지 기다려도 그는 돌아오지아니하였다.

혹시 딴 데로 떠났다면 나갈 때에 하다못해 손가방 한 개라도 들고 나갔을 터인데, 그냥 그저 일상 가지고 다니는 굵다란 단장 하나만 들고 나갔으니 딴 데로 떠난 것도 아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영호는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다.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일이다.

그 이상한 손님이라는 사람은 자기의 의사로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은 아니다. 분명 무슨 힘에 억류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힘이란?

만일 사상 관계나 또는 보통 사법 관계의 범죄인으로 경찰에 잡힌 것 이 라면 그새 벌써 사흘이나 되었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경찰은 그의 유숙하던 곳을 알아가지도 가택수색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나님의 말에 경찰서에서 누구가 왔다고는 아니한다.

가령 또 그가 사상 관계로 잡혔으나 무슨 서류를 발견당할까 봐서 유 하던 곳을 토하지 아니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맨처음 그의 방에 비밀히 누가 침입 했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을 하나?

이와같이 생각을 하고 있던 영호는 갑자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4

영호는 좌우간 현장을 한번 보려는 것이다.

마나님과 같이 그 집까지 가기로 말을 하고 침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 입고 나오는데 마침 오복이가 돌아왔다.

그는 시킨 대로 ××백화점의 변소에 그 가짜 소포를 버린 것, 그리고 조선인 여관조합의 일람표를 구해 가지고 온 것을 복도에 나와 영호에게 보고 하였다.

영호는 여관일람표를 받아 들고 죽 훑어본 뒤에 그것을 오복이에게 도로 내주며 말을 일렀다.

"이걸 가지고 안국동, 수송동, 재동, 계동, 동관, 낙원동, 교동, 관훈동, 인사동 그리고 전동, 공평동, 청진동…… 이렇게 다니면서 여관마닥 이러 이러하게 생긴 여자와 풍신 좋게 생긴 한 오십 먹은 수염 좋은 노인이 유숙 하지 아니했나 알어보게…… 이렇게 다니면서 여관마닥. 중앙학교 뒷산으로 산보를 왔으니까 그것을 참고해서 말이야…… 알겠지? 가령 저편 적선동이나 그 근처에 머물렀다면 사직공원으로 갔지 중앙학교 뒷산으로 왔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야…… 알어보되 여관 보이를 매수해 가지고 될 수 있으면 그 당자들이나 남이 눈치 채지 않도록 응."

"네 알겠읍니다."

오복이는 영호가 도로 내어주는 여관일람표를 받아 포켓 속에 접어넣는다.

 

"선생님도 어데 가세요?"

", 나는 자네가 그것을 조사할 동안에 또 저 마나님댁에 조고만 사고가 생겼다니까 잠깐 다녀올 테니…… ""군산 가는 것은요 ? 밤차에 가라고 그리셨지요?"

", 그건 어쩌면 가잖아도 관계찮겠지…… 자네는 그저 재주껏 그거나 조사 해내게."

집 문앞에서 오복이는 우선 계동 꼭대기에 있는 백제여관을 더듬어 볼양으로 위로 올라가고 영호는 오복이의 자동차에 마나님을 태워 손수 운전을 해가지고 아래로 내려갔다.

예전 측후소 골목으로 들어가 고팽이에 자동차를 세우고 마나님과 같이 영호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영호의 많이 다니던 골목이다.

마나님의 집은 건양사에서 지은 집이라 골목에 들어서면 집들이 모두 그 놈이 그놈인 것 같아 첨 다니는 사람은 구별하기가 쉽지 아니하다.

마나님네 집은 바깥대문을 들어서면 바른편이 바로 행랑방이다. 영호는 우선 그 방으로 들어갔다.

천정 한가운데 휴등 딱지가 붙은 먼지 앉은 전등이 매어 있고 방바닥에 먼지가 소복히 앉았을 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다.

그러나 영호는 사방 벽이며, 더우기 건넌방과 사이에 있는 벽을 바늘 찾듯이 세세히 살피어보았다.

그러나 필경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이 방에 그 뒤에는 아무도 들어 있지 아니했지요?"

"그럼…… 이내 비어 있었다우."

마나님은 영호의 하는 짓이 무언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대답을 한다.

"그 시골뜨기가 간 뒤에 쓸어냈어요?"

"그럼, 아주 말쑥하게 쓸어내고 털어내고 걸레질을 네 번이나 친걸."

"부지런도 하십니다!"

영호는 그 말이 안타까와서 한 것이었지만 마나님은 추어주는 줄 알고 도리어 좋아한다.

영호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영호가 있을 때부터 있던 안잠자기가 집을 보고 있다가 반기어 인사를 한다.

집안은 건넌방을 물론 뜰아랫방도 임자들이 나갔기 때문에 겉문이 닫기어있다.

영호는 마루로 올라섰다. 마루로 난 건넌방 덧문에는 커다란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어떻게 해요 ? 좀 들어가 볼까요?"

영호는 옆에 섰는 마나님더러 물어보았다.

"열쇠가 있어야지?"

마나님은 열쇠 걱정을 먼저 하는 것이다.

"그거야 열쇠 없이도 열랴면 열 수는 있지만…… 어때요? 들어가 보아도 괜찮을까?"

"글쎄…… 감쪽같이 열었다가 감쪽같이 도루 잠거놓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든 자물쇠라도 그것쯤 열기에는 영호는 큰 힘은 들지아니 한다.

그는 가느다란 철사를 가지고 요리조리 만지작거리다가 손쉽게 자물쇠를 열었다.

방 임자가 그렇게도 기를 쓰고 남에게 아니 보이려든 방이 필경은 쉽사리 ── 더구나 영호에게 보이게 되었다.

5

이상한 손님의 방…… 그의 행동이 기괴하던 것과 같이 절대로 남에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하던 그의 방은, 그러나 그대도록 신통한 무엇이 없었다.

웃목으로 중길 되는 트렁크가 두 개 놓여 있다. 하나는 꽤 낡았고 하나는 새 놈인데, 그 만든 모양으로 보아 조선서 산 물건 같지는 아니하였다.

트렁크에는 호텔 라벨을 몇 장 붙였던 모양인데 그것을 뜯어내어 자국 만남아 있다.

트렁크 위에는 한편에 감장 손가방이 놓여 있고 한편에는 만든 수염과 조그마한 손가위와 거울과 빗과 포마드 같은 것이 놓여 있다. 거울은 좀 큰 놈과 또 명함지만한 작은 놈 두 개가 있었다.

마나님은 영호가 방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그동안에 그 무서운 방 임자가 돌아오지나 않나 하고 자주 바깥을 내어다보았다.

영호는 트렁크 위에 놓인 작은 거울을 손끝으로 집어 들고 요리조리 마 슬러보다 가 "나 냉수 한 그릇 주십시요."

하며 마나님을 잠깐 밖으로 내보냈다.

마나님이 나간 사이에 그는 방 구석에 있는 신문지 틈에 낀 상점 비라에 작은 거울을 싹서 조끼 포켓 속에 감추었다.

이부자리는 일본 것인데 아마 이 집으로 옮겨오면서 사가지고 왔는지 아주 새것이요 감은 메이셍이라는 일본비단이다.

착착 개켜놓은 이부자리 위에는 값나가는 담요가 한 개 놓여 있다. 역시 외국 물건이다.

벽에는 심동에 입는 수달피로 대고 안은 솜으로 누벼 넣은 외투가 하나 걸려 있다.

낡은 넥타이도 두어 개 걸리어 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주의를 끄는 것이 없었다.

영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방을 열어보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봉함 엽서가 두 장 들어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트렁크를 열어보았다. 트렁크 속에는 두 곳에 다 사철에 입는 여러가지 양복과 내의 같은 것이 꽉 들어찼을 뿐 아무것도 다른 것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영호는 그 양복들을 일일이 집어 들고 안을 들추어 보았다. 혹시 성명이 새겨져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군데도 그러한 것은 없고, 또 포켓도 일일이 뒤져보았으나 종이조각이라고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밑의 트렁크 맨 밑창에는 큰 하도롱 봉투에 손이 베이질 듯한 십원 짜리 조선은행권이 오십 장 들어 있었다.

영호는 트렁크를 전대로 해놓고 일어섰다. 담배를 피우지 아니하는지 방안에는 재떨이도 없다.

툇마루로 난 밀창에는 유리가 한 조각 붙어 있고 그 유리를 통하여 엷은 커튼이 치어 있는 것을 영호는 문득 보았다.

영호는 밀창을 열었다. 걸어 잠근 덧문과 밀창 사이에는 여름에나 쓰는 하늘하늘한 커튼이 치어 있는 것이다. 커튼이면 아직 날이 추우니 하다못해 광 당목 같은 것을 썻을 것이요, 또 밀창 안에 쳤을 것인데 아무 방한( 防寒) 도 되지 아니하는 것을 더구나 밀창과 겉문 사이에 쳐놓다니, 그것이 영호에게는 이 방에 들어와 본 가운데 제일 주의를 끄는 것이다.

"이건 누가 해서 친 겁니까?"

영호는 마나님더러 물어보았다.

"그이가 끊어다가 내가 갓을 해서 친 거라우…… 밀창을 오려내구 유리를 붙이더니 그날 저녁에 나가서 그 감을 끊어 왔어…… "영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낮에는 겉문을 열어놓는데, 그러면 유리로 해서 방안이 굽어다보일 테니까 그것을 막느라고 그리한 것이다. 그 커튼이 방안에서는 바깥을 내어다볼 수가 있되 밖에서는 들여다보이지 아니하게 된 것이다.

 

영호는 무심코 커튼을 들춰보는데 왼편 ── 밖에서는 대문에서 들어오는 편 ── 에 한귀퉁이가 몽창 짤린 것을 발견하였다.

"이건 왜 이랬어요?"

마나님도 처음 보는 모양이다.

"글쎄…… 누가 그걸 그렇게 잘러냈을까? 내가 갓을 할 때는 그렇잖았는데…… ""이 방 손님이 자르잖았어요?"

"아니…… 그이가 왜?"

미상불 그렇다. 방 임자가 그것을 잘라낼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누가 아무도 몰래 그것을 잘라간 것이다.

무슨 필요로?

영호는 생각함이 있는지 혼자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6

마나님에게 말할 나위도 없이 영호는 트렁크 위에 있는 손가위를 집어다가 커튼을 그 베어난 자국에서 다시 한 조각 베어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이제는 이 방안에 더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전과 같이 문을 닫고 잠그고 마루로 나왔다.

"머 좀 어떻게 알어보았우?"

마나님은 걱정스럽게 영호더러 묻는다.

"글쎄요…… 가만 계십시요. 인제 정말 좀 알어보아야 하겠읍니다…… 내가 알어볼 대로 알어보고 인제 또 오겠읍니다."

영호는 벌써 구두를 신고 대뜰에 나섰다.

"그런데 참, 이 근처에 빈 집 없어요?"

"빈 집?…… 글쎄…… 없지 아마."

"그러면 요새 새로 이사해온 집은?"

"응응, 있어 있어…… 아따 우리 집에서 저 앞으로 두 채 집 건너 그 집이 비었었는데 메칠 전에 사람이 들었다지…… ""누가 들었는지 모르세요?"

"모르지…… 아마 식구가 단촐한지 짝 소리도 없드구먼."

"그래도 이사해 왔으니까 솥도 붙이고 도배도 하느라고 사람이 드나들었을 텐데…… ""그건 몰라…… , 어멈?"

 

하고 마나님은 어멈에게 물어본다.

"저 담담집에 누가 이사해 왔다지?"

"저도 몰라요…… 밤에 이사를 왔는데 이사만 해왔지 당췌 살림을 하는것 같잖다구 이 앞집에서 그래요."

"이 앞집에 안잠재기 있소?"

영호가 물었보았다.

"."

"좀 데려오구려?"

"데려오지요. 나허구 잘 아는데요."

조금 후에 앞집 안잠자기가 이 집 안잠자기를 따라왔다. 전에 영호가 이집에 있을 때 가끔 마을 와서 영호와 얼굴이 익은 노파다.

"안녕하시우?"

영호는 우선 이렇게 수작을 붙이었다.

"네 안녕하십니까 ? 오랜만에 오셨세요."

"…… 그런데 내 좀 물어볼 말이 있는데…… 당신네 그 앞집 말이요, 언제 이사해 왔소?"

노파는 까막까막 생각 하다가 "한 댓새 되나봐요."

". 닷새…… 식구는?"

"사내양반이 ── 젊은이허구 노인허구 둘이고 젊은 아낙네허구 셋인가 봐요."

"누구 그 집에 가본 사람 없답디까?"

"없어요…… 이사를 해왔으면 솥도 걸고 도배도 하고 하느라고 동리서 드나들었을 텐데 통 그런 게 없어요. 물지게장수도 안 다니는데요."

영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밤에 이사해 왔지요?"

"…… 그런데 첨 메칠은 사람 소리도 들리고 하더니 요새는 낮이면 문에다 강아지만한 자물쇠를 잠거놓고 짝소리가 없어요,

"영호는 마나님과 작별하고 닷새 이사해 왔다는 집 앞으로 가보았다.

대문에는 앞집 노파의 말마따나 강아지만한 자물쇠가 채워 있다.

번지만 붙어 있고 문패도 없다.

집이 생김새는 마나님네 집과 조금도 틀림이 없다.

대문이 있고 대문 안에 바른편으로 행랑방이 있고 왼편으로 뜰아랫방이 두 개 있고 그리고 벌어진 대문 틈으로 굽어다보니 좁다란 마당 앞에 장독대가 있고.

영호는 곁쇠질을 하고라도 좀 들어가보고 싶었으나 안에 사람이 현재 없는것은 확실하지만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꺼리어 발길을 돌이켰다.

그는 그길로 그 집을 관리하는 사람을 알아가지고 찾아가서 물어보았다.

"한 삼십 된 헙수룩한 사람이 이십오 원씩 석 달 선세를 내고 세로 얻었으나 그 밖에는 그의 가족이 어떠한지 모르겠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영호는 그 사내의 인상을 일일이 물어보았으나 마나님네 집 행랑에 들었던 시골뜨기와는 같지도 아니하였다.

그는 할 수 없이 자동차를 몰아 집으로 올라갔다. 오복이는 아직 돌아오지아니하였다. 그는 마니 님네 집 건넌방에서 집어가지고 온 거울을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아주 선명한 지문이 박혀 있다.

이 거울에 나타난 지문과 아까 소포에 싼 지문이 옆에 놓인 것을 무심히 집어 들고 비교해 보다가 영호는 갑자기 눈을 크게 홉떴다. 그는 급히 확대경으로 두 개의 지문을 자세히 비교하여 보았다.

7

가짜 소포 속에 들었던 손가락토막의 지문과 그 이상한 손님의 작은 거울에 남아 있는 지문, 그 두 개의 지문은 완전히 일치하였다.

이것은 즉 잘린 그 손가락이 이상한 손님의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호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사실이다.

두 사건의 일치 ── 손가락토막을 싼 가짜 소포 사건과 마나님네 건넌방의 이상한 손님의 실종 사건의 일치 ── 이것은 영호에게 기쁜 발견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울하여졌다.

이 기괴한 범죄의 이면에는 그 여자가 가령 장본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큰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불을 보는 것과 같이 명확한 사실이다.

영호는 머리를 우디고 앉아서 신음하듯이 혼자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가! 그 여자가! 이 기괴한 범죄의 이면에 서서 있다니!"

영호는 자기가 홀로 그와 같이 연연히 생각하는 그 여자인지라, 차라리 이 사건에서 손을 떼어 그 여자의 무서운 정체가 폭로됨으로써 받는 타격을 피 할까…… 도 생각하여 보았다.

 

다만 언제까지든지 그의 환영을 가슴에 품고 연연히 그리워하면서 지내면 그것이 되레 마음 편할 듯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저 ── 가슴 속에 잠겨 있는 로맨틱한 생각이요, 일이 이처럼 되어갈수록 그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 보겠다는 욕망은 한층 더 불타 올랐다.

영호는 오복이가 돌아오거든 기다리게 하라고 서생 상준이에게 부탁을 하여 두고 다시 집을 뛰어나섰다.

문앞에 놓아둔 자동차를 몰고 갈까 하였으나 그대로 걸어내려갔다.

영호가 마나님네 집 건넌방의 커튼 한귀퉁이가 잘려 없어진 것을 보고 첩경 생각한 것은 '방의 트릭이라는 것이었었다.

즉 그 이상한 손님을 꾀어들이기 위하여 문간이 같은 집을 구하고 또 방도 그가 거처하고 있는 것과 같이 외양을 꾸미자면 우선 문에 치어 있는 커튼을 장만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와 꼭같은 감을 얻으려고 누가 몰래 들어와서 한귀퉁이를 잘라 간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저편이 미처 생각을 못한 것이다.

이상한 손님이 밖에 나갈 때면 반드시 겉문을 닫아 걸므로 거튼 같은 것은 있으나 없으나 문제가 되지 아니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커튼을 한 조각 훔치고 그것을 견본삼아 꼭 같은 감을 끊으려고 애를 쓰기는 하였으나 가령 그것을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헛수고 이었을것이다.

집은 물론 마나님네 집에서 두 채 집 건너 있는 그 집일시 분명할 것이니 저녁에 조용히 가서 다시 한번 조사해 보기로 하고 영호는 우선 아까 잘라 넣은 커튼 조각을 가지고 포목점을 뒤져 볼 양으로 나선 것이다.

그 커튼감을 구해다가 그들이 유리하게 썼거나 아니 썼거나 그것은 관계 없고 다만 구하러 다니던 사람을 알아내자는 것이다.

영호는 저동으로 내려가면서 ××××상회, ××백화점, ××상회, ××× 상회를 다 들러 물어보고 또 그러한 감을 찾던 사람이 있더냐고 물어보았으나 다 실패를 하고 ×상회에 당도하였다.

×상회의 점원은 영호가 보이는 커튼 조각을 받 아들고 "조 곰 남었었는데 다 나갔읍니다."

하며 자못 이상하다는 듯이 영호를 훑어본다. 영호는 되었구나 속으로 생각 하였다.

"많이들 끊어갑니까?"

 

"별로 많이는 끊어가지 않지만 며칠 전에도 어느 여자 손님이 와서 마지막 남은 커텐 한 감을 가져가셨읍니다."

"여자 손님이요?"

영호는 어느 정도까지 기대한 말이 아닌 것도 아니나 무의식중에 이렇게 반문을 하였다.

점원은 더욱 유심히 영호를 바라보다가 우선 태도를 보드랍게 고쳐가지고…… 아마 형사로 알았던 모양이다.

", 여자 손님입니다."

"어떻게 생겼어요?"

영호는 점원이 자기를 형사로 여기는 눈치를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바로 대고 물어보았다.

8

점원은 기억을 더듬느라고 고개를 쳐들고 눈을 까막까막하는 것을 영호가 말을 시작하였다.

"새까만 털외투를 입고 양장을 하잖었읍니까 ?…… 감장 모자를 쓰고""네 네."

점원은 비로소 생각이 나서 대답을 하는 것이다.

"옳습니다. 그러고 키가 호리호리하고요."

"그러고 얼골이 갸롬하고…… ""네 옳습니다. 그러고 썩 잘났어요. 그래서 돌아간 뒤에 우리끼리 이야기까지 했읍니다."

점원은 좀 계면쩍은 듯이 싱긋 웃는다.

인제는 더 물어볼 나위도 없이 그 여자인 것이 분명하다.

영호는 ×상회를 나오면서 오복이가 돌아왔나 전화를 걸어보았으나 아직 돌아오지 아니하였다고 상준이가 대답을 한다.

때는 벌써 오후 두시나 되었다. 영호는 오복이가 가짜 소포를 버린 것 이 어찌 되었나 궁금도 하여 좀 살펴볼 겸 점심도 먹으려고 ××백화점으로 향 하였다.

××백화점에 들어가서 우선 변소를 모조리 뒤져보았으나 아무데도 보이지 아니하는 것이 벌써 누구 점원이 가져간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다가 영호는 아차! 하고 자기의 실책을 뉘우쳤다.

다행히 점원이 집어간다면 내일이나 모레쯤 경찰의 손으로 들어가겠지만, 그렇잖고 어느 손님이 변소에 들어왔다가 집어간다면 집어간 그 사람도 재앙 이 려니와 문제의 손가락 한 토막은 쓰레기통 신세를 지지 않으면 영영 표면에 나오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사건의 진전에 지장이 될 것은 물론이다.

초조한 생각에 점원을 붙잡고 물어라도 보고 싶으나 그러다가 괜히 말썽이나 되면 아니 되겠다고 참고, 다만 속으로 '연애와 탐정은 동시에 할 것 이 못 된다고 탄식을 하였다.

사실 영호가 그 여자에게 대한 연연한 생각 그것이 아니었으면 훨씬 더 냉정하게 일을 했을 것이요, 따라서 그렇게 허둥지둥하지도 아니하였을 것이다.

좌우간 손님이 누가 그것을 집어가지 아니하고 다행히 점원이 간수 하였다가 임자를 못 찾아 경찰서로 가게 되기를 운에 맡겨 기다리리라고 단념하고 식당으로 올라갔다.

영호는 점심을 먹으면서 이후의 작전계획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들어 있는 곳을 찾아내어야 할 것인데 혹시 일가나 친척의 집에 있지 아니하는 이상 여관 외에는 더 갈 곳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들 일행이 추리컨대 노인과 그 여자와 마나님네 행랑방에서 유숙 했다는 그 시골뜨기 같다는 사나이와 또 셋집을 얻으려 왔더라는 헙 수룩 하게 생겼다는 사나이까지 합하면 넷이나 될 것이니, 아무리 하여도 어느 여관에 묵고 있기가 십상팔구일 것이다. 익선동에 세로 얻어 든 그 집에는 그들이 거처하지 아니하는 것이 분명한 것은 솥도 걸지 아니하고 물도 받지아니 한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사실 그 집은 이상한 손님을 유인하겠다는 목적을 도달하였으니 벌써 비어내던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이 서울서 떠나지는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손가락 사건이 신문에 보도 되고 그 때문에 그들이 예기하는 사건의 진전을 따라 세운 활동을 개시 하려고 벼르고 있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선 전력을 다하여 북촌에서 찾지 못하면 남촌의 일 본 여관까지라도 샅샅이 뒤지어 그들의 있는 곳을 알아낼 것, 그리고 저녁에는 익선동의 그 집을 한번 습격해 볼 것. 이렇게 계획을 세우면서 영호는 점심을 마치고 천천히 집으로 올라갔다.

그는 길에서 오고가는 사람을 남녀노소 물론하고 일일이 주의하여 보았다.

행여 그중에 문제의 남녀 네 사람의 하나라도 눈에 띄지나 아니할까 하고.

──

 

상당히 시간이 걸리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곧 돌아왔으면 하는 오복인가 과연 일찍 돌아와 기다리고 있다.

"어쨌나?"

오복이의 눈치가 전연 실패를 하고 온 것 같지는 아니하였다.

"알었읍니다. 알기는 알었는데…… "", 알기는 알었는데……?"

영호는 성급히 다가 물었다.

追 跡[ 추적] 1 "알 기는 알었는데…… 그래 어쨌어?"

"벌써 어데로 떠나고 없어요."

"떠나고 없어."

영호는 잠시 우두커니 생각을 하다가 다시 묻는다.

"언제 떠났다고?"

"어제 아침에요."

"어제 아침."

가령 그들이 익선동 그 집으로 왔더라도 그곳에서 들으면 이사온 지가 닷새 된다고 하지 아니하였는가 ?

그러면 그들이 익선동 그 집으로 오지 아니한 것은 더욱 분명하고, 혹시 몸을 이리저리 피하느라고 자리를 옮겨앉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어데로 떠났다든가?"

"그런 말 저런 말 없이 그냥 떠났다구 그래요."

"짐은."

"가진 짐은 담요하고 꽤 무거운 추렁크 두 갠데 자기네가 손수 들고 갔 대요."

"대관절 일행이 멫 사람이라든가."

"셋이래요."

"? 넷이 아니고."

"셋이더래요. 그 여자하고 또 노인하고, 또 젊은 사나이하고…… ""그 젊은 사나이라는 게 헙수룩하게 생겼더라지."

"."

그렇다면 마나님네 행랑에 들었든 그 시골뜨기는 사건에 아무 관계가 없고 정말 시골서 철 아닌 구경을 하러 온 시골뜨긴가?

그러나 마나님네 집에서 그 거짓 화재소동을 일으키어 이상한 손님이 방으로부터 뛰어나온 기회에 그 방에 들어가려는 연극을 꾸민 것은 분명 그 시골뜨기의 짓인 듯한데.

"첨부터 끝까지 셋이라고 그리드나."

"."

"어느 여관에서 찾아내었나?"

"낙원동 제 일 여관이에요 ""오기는 언제 왔고?"

"한 보름 된다지요."

"숙박부에서 이름 적어가지고 왔겠지?"

오복이는 포켓 속에서 종이조각을 내어놓는다.

"원적, 현주소, 연령, 전 숙박지, 행선지 모다 숙박부에 쓰인 대로 적어 왔 읍니 다."

영호는 종이조각을 받아들었다. 휘둘러 쓴 오복이의 글씨로 다음과 같이 적히어 있다.

원적 ——— 전남 김제군 김제면 읍 내리이것을 보고 영호는 실소를 하였다.

"확실히 전남(全南)이라고 썼는가."

"."

", 속이는 사람도 어리석게 속이려 들었거니와 여관 사람들도 어수룩하다! 김제가 어찌 전남이야? 설마 자기 원적지가 김제(金堤)면서 그것이 전남인 줄 아는 사람은 없을 텐데…… "영호는 그 다음을 또 보았다.

현주소 ——— 원 적지 직업 ——— 농업, 장명희, 오십 삼 세 전 숙박지 ——— 원 적지 행선지 ——— 원적 지원적 ——— 전기인(前記人)과 동일 현주소 ——— 동상장 순희, 이십 일 세 원 적지 ——— 전기인과 동일 현주소 ——— 동 김병수, 삼십삼세, 상 영호는 다 보고 나서 종이쪽을 탁자 위에 놓으며 여전히 고소를 한다.

"원적이고 현주소고 성명이고 무엇이고 다 아무렇게나 지어서 쓴 걸세…… 그중에 나이만은 정말일지 몰라…… 그건 어쨌거나…… 숙박은 멫 등에 했다고?"

"특등이래요,"

", 그랬겠지…… 그러고 누구 찾어오거나 편지가 오거나 전보 같은 것이 왔는지 물어보았나?"

"물어보았는데, 아모도 찾어온 사람도 없었고, 또 편지도 전보도 다 아니 왔 대요. 실상 그 사람들이 떠난 뒤에 무엇 그런 것이 온 게 있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뺏어올 양으로 물어보았지요."

"그러고…… 그 여자가 그 노인더러는 아버지라고 불렀겠지?"

"."

"그 젊은 사내는?"

"그건 여관에서도 모르는데요."

"그러면 방은? 셋이 따루?"

영호는 그 헙수룩하게 생기었다는 사나이에게 적지 아니하게 질투를 느꼈다.

그리하여 그들이 방을 어떻게 나누어가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2

오복이는 영호의 그 말 묻는 뜻을 짐작하는지라 속으로는 싱긋이 웃으면서 겉으로 천연스럽게 대답을 한다.

"노인과 사나이가 한 방에 거처하고 그 여자가 독방을 쓰고 그랬대요."

영호는 그만만 해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그는 담배를 피워 물고 고요히 앉아 잠깐 생각을 하다가 상준이를 불러 올렸다.

나이는 아직 이십 안팎이지만 생김생김이 똑똑하게 생기고 또 영호의 손에 치어난 만큼 매우 재빨라 웬만한 일은 척척 해낸다.

"내 양복 새로 마추어 둔 것 있지, 세비로 말이다. 그놈 입고 추렁 크에다 자리옷이나 넣고 좀 그럴듯하게 차리고 오느라."

상준이는 웬 영문인지 몰라 대답은 하면서 두리번하고 오복이를 치어다 본다.

"자네는 좋겠네…… 차 타고 여행하고…… 오복 이의 이 말을 등 뒤로 들으면서 상준이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군산 보내실려면 아직 차시간이 멀잖아요?"

"아니 군산은 우리가 아니 가도 인제 경찰서에서 더 자세하게 조사를 해서 신문에 날 테니까 가잖아도 좋아…… 그 대신 상준이를 제일여관 특등 손님으로 하룻밤 만들어야 하겠네…… "상준이가 준비를 해가지고 올라올 동안에 영호는 오늘 마나님네 집에 가서 얻은 사실을 대강 이야기해 들려주었다.

오복이는 영호가 놀라고 긴장하는 만큼 지지 않게 놀라고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영호는 가짜 소포를 백화점 변소에 버린 데 대해서도 자기의 실책을 걱정삼아 이야기하였다.

오래잖아 상준이가 아주 귀공자같이 말쑥하게 차리고 수줍은 듯이 싱글싱글 웃으면서 올라왔다.

"아주 그만하면 어데 가든지 버젓한 귀공잔걸."

하고 오복이가 놀리어 준다.

영호는 지갑 속에서 십원짜리 두 장을 내어주면서 말을 이른다.

"이놈 가지고 경성역으로 나가거라. 나가서 택시를 잡어타고 낙원동 제 일 여관을 찾어가 운전수한테 추렁크를 척 들리고 들어가란 말이야. 가서는 특등 실에 들어…… 그게 멫호실?"

영호는 오복이를 돌아보며 묻는다.

"일호실하고 이호실입니다."

", 일호실이나 이호실에 들어야 한다…… 들어서 혹시 뽀이가 방을 소제 하려고 하거든 못하게 하고는 네 재주껏 그 두 방에서 무얼 좀 얻어 보아라."

상준이는 돈을 받아 물러선다.

"그러고 이따가 내가 들르마…… 모다 연극을 그럴 듯하게 해야 해, ."

"."

상준이는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물러나갔다.

상준이를 내보낸 뒤에 두 사람은 한동안을 잠잠히 앉아 있었다. 한참이나 각기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복이가 자기의 의견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이 시골로 가잖았다면 역시 이 서울바닥에 있을 텐데 또 한 번 나가서 찾어볼까요?"

영호는 고개를 끄덕 거리며 "나도 지금 그 생각인데…… 대관절 그 일행이 아침 멫시에 떠났다 더 냐?"

"열한시쯤이라지요."

"그러면 그때가 차시간도 아니니까 분명 어데로 자리를 옮아 앉은 것인데…… 가만 있자, 그렇게 무거운 추렁크를 들고 나갔으면 그 근처에서 멀리 가지 아니했으리…… 만일 멀리 갔다면 지게꾼에게 지우든지, 귀 골들이니까 전차는 아니 탔을 것이고 자동차로 갔을 테란 말이야…… ""그럴 바이면 왜 애초에 여관에서 짐꾼을 부르든지 자동차를 부를 텐데요."

"아니야. 그건 그렇게 하면 여관에서라도 나중에 그 운전수나 지게꾼더러 물어가지고 자기의 종적을 찾아낼 수 있게 되겠으니까 되겠나?"

"거 참 그렇긴 합니다."

"그러니까 자네가 다시 한번 나가서 이번에는 낙원동 근처의 복덕방을 뒤져 보게. 엊그제 집이나 방을 세로 얻어 든 이러저러하게 생긴 사람이 없느냐고…… 물론 근처의 여관도 또 뒤져보고…… 그러고 나서 소득이 없거든 근처의 지게꾼과 자네 동업자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이러저러하게 생긴 일행의 짐을 실은 일이 없느냐고, ? 알겠나?"

"네 알겠읍니다."

"그래서 밤 열시 안으로 돌아오게."

타합이 되어 오복이가 막 나가자마자 식모가 속달우편 하나를 가지고 올라왔다.

속달? 이것은 영호에게 전에 없는 일이다.

3

영호에게는 전화가 있다. 그러니까 그의 친구라도 무슨 급한 일이 있다면 더 빠르고 손쉽고 편리한 전화를 이용할 터인데, 일부러 속달편지로 한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예사로운 사람의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영호는 식모가 올려온 하얀 양봉투 편지를 받아들고 자세히 검사를 해보는것이다.

주소와 성명이 영호의 것인 데는 틀림이 없다.

글씨는 그다지 못쓴 글씨는 아니다. 만년필로 꽤 황하게 휘둘러 썼다.

스탬프는 안국동우편국 것이요, 그날 날짜로 오후 두시 반 것이 찍히었다.

그러나 발신인은 주소도 성명도 씌어 있지 아니하다.

그러면 누구 아는 동무가 장난삼아 한 짓인가 하고 글씨를 아무리 보아도 낯에 익지 아니하다.

영호는 한동안 생각을 하다가 속달편지를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는 우선 마스크로 코와 입을 가리고 핀셋과 가위를 가지고 봉투 한 귀를 잘랐다.

봉투 속에서는 네 겹 접은 편전지가 나왔다.

영호는 더욱 조심하여 핀셋 끝으로 편지를 펼쳤다.

역시 같은 잉크빛이나 좀더 또박또박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간단히 적히어있다.

"백영호군

부질없은 일에 참견을 하지 마라. 즉시 사건에서 손을 끊어라. 만일 고집 하면 이롭지 못하리라."

사연은 이뿐이다.

영호는 편지를 내려놓고 마스크도 벗어놓고 입맛을 쩍쩍 다시는 것이다.

그는 확실히 마음이 동요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편지의 위협 그것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미이라를 캐러 갔다가 미이라가 된다는 말이 있다.

영호는 남을 찾고 감시하려다가 되레 자기 자신이 감시를 받은 것이다.

이것은 영호의 자존심까지도 상하였다. 자기가 그와 같이 소홀하고 허둥대는 사람이든가 싶어서.———

영호는 생각하여 보았다.

대관절 어느 겨를에 영호가 이 사건에 참견한 것을 알았을까 ? 사건이 표면화하고 거기 대해서 직접적으로 나서기는 오늘 아침 열시부터니 불과 오륙 시간 밖에는 아니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그 여자가 오복이의 뒤를 감시하다가 영호 집까지 왔었고, 급기야 익선동에 갔던 행동이며, 또 오복이가 자기네의 행적을 조사한 것을 알아낸 것일까?

그럼직도 한 일이다.

그러나 누가 감시를 했건 자기네의 행동을 감시한 것만은 사실인데, 그들이 가장 확실한 눈치를 채기는 익선동에 가서 조사할 그때부터일 것이다.

어찌하면 영호가 다녀나온 뒤에 익선동의 그 이상한 손님이 돌아와서 시종 이야기를 마나님에게 다 듣고 그 지신이 영호에게 협박장을 보낸 것 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이라도 익선동을 가서 보면 알 것이다.

영호가 익선동에 가서 조사하는 데서 눈치를 채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은 정확한 추측이다.

 

사실 그는 감시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영호도 눈이 수백 개 있는 바 아니요, 길에서 거치는 사람이 그를 감시하는 줄은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영호가 마나님과 같이 마나님네 집에서 이 방 저 방 조사를 할 때에, 또 의문의 셋집 앞에 가서 굽어다볼 때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 두 개의 눈이 그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알아챌 수 없는 의외의 일 이었었다.

만일 영호가 직업적 탐정이었더라면 ——— 그래서 백영호의 이름과 얼굴이 큰 범죄 사건의 수사에 한몫을 끼였다는 것으로 세상이 다 안다면 영 호도 애초부터 주의를 게을리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호는 자기가 그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줄을 아는 만큼 애당초부터 감시를 받 으리라고는 생각지 아니했던 것이다.

좌우간 짜증을 내고만 있을 때가 아니다. 저편이 용이찮을수록 이편도 더욱 긴장과 면밀한 주의가 필요하다.

영호는 우선 그 협박편지에서 지문을 검사해 보았다.

4

봉투에는 큰 기대도 아니하였지만, 역시 이 사람 저 사람 다 다른 지문이 서너 개가 있었다.

그러나 진짬은 내용 편전지에 있을 것인데 편전지에는 지문이 남아 있지아니하였다. 그러면 봉투에 있는 네 개의 어느 것이든지가 모두 소용없는 딴 사람의 것일 것이다. ——— 내용 편전지에 지문을 아니 남기도록 면밀한 사람이 겉봉투엔들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니까.

영호는 협박편지를 봉투에 집어넣어 포켓 속에 넣고 집을 나섰다.

그는 그 길로 안국동 우편소로 와서 보았다. 눈치를 보니 서류 맡아 보는 곳은 그다지 바쁘지 아니한지 좀 까다롭게 생긴 어린 계원이 옆엣 사람과 잡담을 하고 있다.

영호는 되도록 무뚝뚝하고 거친 말씨로 "이 속달을 예서 취급했지요?"

하고 편지를 내어밀었다.

계원은 언뜻 소갈찌 사나운 눈으로 영호를 치어다보다가 갑자기 공손하게 대답을 한다.

"."

"어떻게 생긴 사람이 가지고 왔읍디까?"

 

"학생이 가지고 왔어요."

영호의 기대와는 아주 어그러지는 말이다.

젊은 여자 ——— 검정 외투를 입고 양장한 그 여자가 아니면 수염이 탐 스럽고 부대한 노인이나 헙수룩하게 생긴 젊은 사나이가 가지고 왔다라는 대답이 나올 줄 안 것인데.———

"학생?…… 어떤 학생이요? 중학생이요?"

"아니요. 사방모사를 쓴 대학생이야요. 모표에 대학이라고 했어요."

"얼굴이 어떻게 생겼읍디까."

"그것은 자세 생각이 안 나지만 해맑고 곱사름하게 생겼어요."

그렇다면 그 여자의 일행 가운데에 헙수룩한 사나이가 변장을 한 것도 아니요 완전히 딴 사람이다. 물론 익선동 마나님네 행랑방에 들었던 시골뜨기도 아니요, 건넌방의 이상한 손님도 아니다.

"그 학생이 확실하오? 틀림없소?"

"…… 오늘은 속달이 다 늦게 그것 한 장밖에 없어서 틀림없읍니다."

영호는 우편소를 나섰다. 등 뒤에서는 계원들끼리 형사 어쩌고 속살거리는 소리가 귓결에 들린다.

학생…… 대학생…… 그가 진짜 대학생은 아닐 것이다. 반드시 변장을 한 사건 가운데 인물의 한 사람일 것인데 지금까지 사건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역시 그 여자의 일파이면서 이번에 툭 튀어나왔나?

그렇다면 제일여관에 그들이 묵어 있을 때에 같이 묵어 있지는 아니 했다하더라도 찾아라도 다니었을 것인데, 오복이의 말을 듣건대 아무도 찾아온 사람이 없었다고 하지 아니하는가?

그렇다면 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그 여자들의 일파와는 별개의 한 일파가 역시 이 사건의 배면에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재료만 가지고는 그처럼 속단하기 어려운 일이나 그러한 가정을 세워놓고 그 가정으로부터 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은 방법이니까.

익선동 마나님네 집에 있던 이상한 손님을 사이에 놓고 그 여자네 일파와 또 다른 한 일파의 삼각적 착잡한 싸움…… 그리고 거기에 영호가 뛰어드는 것을 보고 예방주사를 한 대 놓는 셈으로 협박장…… 그러나 그 협박장이라는 것은 도리어 불을 보고 덤비는 나비와 같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니었으면 사건의 배면에 다른 일파가 있는 줄을 영호는 생각 지도 못했을 것이요, 따라서 그의 활동은 매우 제한된 일면적이요 기형 적임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영호는 머리로는 생각하고 눈으로는 전후 좌우에 자기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는지 둘러보고 그리고 다리로는 걸어서 익선동 마나님네 집에 당 도하 였다.

그는 허실삼아 건넌방 손님이 그새라도 돌아왔는가 물어보았으나 저편에서 되 레 찾아내었느냐고 물을 지경이라 그대로 나와 제일여관으로 향하였다.

이 근처에서는 더욱 조심하여 감시하는 사람이 있는가 살펴보았으나 아무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지금쯤 상준이가 귀공자같이 버티고 제일여관의 특등실에 들어 모처럼 당한 기회에 공을 세워보려고 방을 세밀히 조사하려니…… 그러노라면 무어라도 얻어지는 게 있으려니 생각하면서 영호는 성급히 목적지로 향하여 갔다.

5

제일여관은 다른 곳에 항용 있듯이 역시 들어가는 문간에 사무실이 있었다.

영호는 조금 전에 와서 특등실에 든 손님이라고 물으니까 바로 서슴지 아니하고 이리저리 들어가라고 가르쳐 준다. 보이를 시켜 안내해 주는 것보다 되 레 그편이 고마왔다.

가르쳐 주는 대로 중문 안으로 들어서니까 조그마한 딴채가 하나 있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좌우로 있는 것이 소위 특등실이다.

발자국 소리를 듣고 상준이가 빙글빙글 웃으며 나와 맞이한다.

그는 영호를 안내하여 방으로 들어갔다. 오복이의 조사대로 하면 그 여자가 들어 있었다는 이호실이다.

명색이 특등실이지 이류 삼류의 여관인만큼 별로 버젓하게 꾸민 것도 없다.

아랫목에 편 보료와 사방침도 실상은 모두 인조견 신세를 진 것이다.

웃목으로 둘러친 병풍도 값 헐한 것이다.

영호는 다시 한번 방을 둘러보았다. 그 여자가 며칠 동안 몸을 담아 있던 방이다. 무형(無形)의 그윽한 향내가 고요히 떠도는 것도 같다.

더구나 상준이가 방구석에서 얻었다고 내어놓는 조그마한 헤어핀은 한결 더 영호의 심정을 연연케 하는 것이다.

 

영호는 헤어핀을 요리조리 마치 귀한 선물이나 만지듯이 단순하게 만들어진 그것을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조끼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그때 마침 보이가 기침을 하고 들어와 땟국이 꾀죄죄한 숙박부를 내어 놓는다.

옆에서 보노라니까 상준이는 원적, 주소, 성명, 직업 모두 그럴듯하게 꾸미며 써놓고 있다.

상준이가 다 쓰고 나서 보이에게 도로 내어주려는 것을 영호가 받아 펼쳐 보았다.

오복이가 적어가지고 온 그 대목이 바로 그 옆에 있다.

글씨는 가짜 소포에 쓰인 것과 꼭 같았다. 그러나 연필은 아닌 것으로 보아 그 노인이 아니면 헙수룩하게 생겼다는 젊은 사람의 필적인 듯하다.

영호는 포켓 속에서 협박 편지를 꺼내어 보이가 눈치 채지 아니하도록 얼핏 대조하여 보았으나 그 두 필적은 얼토당토 아니하였다.

보이가 숙박부를 가지고 마루로 나가자 영호는 상준이의 귀에 무어라고 두어 마디 소곤거렸다. 그 말을 듣고 상준이는 보이를 도로 불러들였다.

"여보 미안하지만, 나 양말 한 켤레 사다 주구려."

"."

보이는 저편이 특등 손님인만큼 허리가 고분고분하다. 상준이는 지갑 속에서 십원짜리를 척 꺼내어 보이를 준다.

영호는 상준이가 아까 자동차 삯을 주기 위해서라도 십원짜리 한 장을 바꾸어 잔돈이 있을 텐데 일부러 십원짜리를 내어주는 것을 그럴 듯이여겨 혼자 싱그레 웃었다.

"좀 멀리 가더래도 백화점 같은 데 가서 존 걸로 사다 주구려…… 한 일원 넘겨 주는 놈으로."

"네 네."

보이는 속으로 삼십 전 하나는 붙여먹는구나 생각하였는지 연해 굽실 거리며 돈을 받아가지고 나갔다.

"빨러도 삼십 분은 걸리겠지."

보이의 발짝 소리가 멀어진 뒤에 영호는 상준이를 데리고 일어섰다.

", 위선 저편 방부터…… "저편 방이라는 일호실도 방이 조금 클 따름이지 이편 이호실과 아무 다를것이 없다.

영호는 병풍 뒤로 보료 밑으로 방구석 먼지 차인 데로 그리고 바람벽까지 일일이 조사해 보았으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그는 밖으로 나와 부엌 아궁이를 뒤져 보았다.

그저께 저녁에 불을 때고 만 채로 아궁이 속에는 무연탄이 타고 난 재가 고스 란 히 있는데 그 위에 똘똘 뭉친 조그만 종이뭉치 하나가 오꼼히 놓여있다.

영호는 손재게 그것을 집어내어 펴보고는 그대로 포겟 속에 집어넣었다.

다시 무엇이 더 없나 하고 찾아보았으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아니하였다.

이편 이호실 아궁이에는 벌써 불을 지피었기 때문에 무어 찾아볼 필요도 없이 도로 방으로 들어왔다.

방으로 들어와서 아까 아궁이에서 얻은 종이쪽을 펴보고 있는 영호의 얼굴에는 회심의 미소가 싱그레 떠오른다.

6

보통 쓰는 편전지에 다음과 같은 것이 적혀 있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 즉 언문의 자음(子音) 전부를 써놓고 그 옆에 아라비아 숫자로 번호를 매 겨놓은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줄에는 모음(母音)을 써놓고 역시 그 옆에 번호를 매 겼는데 그 번호는 앞의 자음 번호에 계속하여 시작되었다.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ㅠ ㅡ ㅣ 이 것은 암호(暗號)에 관한 조그마한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 를 대번 짐작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극히 초보(初步)의 것인 것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글씨는 보니 여자의 글씨다.

그들 일행이 버리고 간 것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와 같이 암호에 있어서 유치한 지식밖에 가지지 못 하였다면 그다지 곤란한 적수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렇거니와 그들은 이 암호를 이용하여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이 암호를 써서 무엇을 기록해 두려는 것인가? 그렇잖고 이미 기록되어 있는 암호를 풀려는 것일까?

좌우간 선결 문제는 역시 그들 일행의 종적을 찾아내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영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문앞까지 나온 상준이에게 내일 아침에는 돌아오되 모두를 미행을 당할 염려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당부를 하여 두었다.

그날 밤 열시에 오복이는 솜같이 지쳐가지고 돌아왔다.

그는 영호가 시킨 대로 우선 복덕방을 뒤지기 시작하였었다.

낙원동·교동 거리의 복덕방으로부터 시작하여 동관까지 다 뒤져보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인사동·관훈동 일대도 다 뒤져보았고 종로 이남도 뒤져 보았다.

그러나 아무데서도 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하였다.

몇 군데 양복 입은 젊은 사람 혹은 수염난 노인 혹은 젊은 여자에게 집이나 셋방 거간을 해주었다는 곳을 찾아가 보기도 하였으나 모두 딴 사람 들이었었다.

복덕방에서 실패한 오복이는 다시 낙원동으로 돌아와 지게꾼과 인력거 방을 모조리 뒤져가며 이러저러하게 생긴 사람 일행의 짐을 날라주지 아니하였느냐고 물어보았다.

필경 지게꾼 하나가 나섰다.

그는 공원 뒤에서 지게벌이를 하는 사람인데 어제 점심때가 좀 못되어 검정 외투를 입은 젊은 여자와 수염이 탐스런 노인과 헙수룩한 젊은이가 무거운 가방을 지고 가자고 하여서 대학병원 옆 네거리까지 갔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길바닥에 짐을 내려놓게 하고 지게꾼은 삯을 후히 주어 돌려 보냈다.

그들이 길에다 짐을 내려놓고 무엇을 했으며 어디로 갔는지 지게꾼은 삯을 받아가지고 돌아왔으니까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오복이는 다시 그 방면으로 가보고 싶었으나 이미 돌아오라는 시간도 되었고, 또 갔댔자 어둔 밤에 별 도리가 없겠으므로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영호는 오복이의 보고를 다 듣고 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건의 이면에 그 여자 일행 외에 또다른 일파가 있다는 것이 드디어 확실하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일행은 그 다른 일파의 감시로부터 요리조리 피하기 위하여 그와 같이 처소를 자주 옮기고, 또 옮기되 여과 사람이나 지게꾼에게까지도 주의를 하게 된 것이다.

영호의 눈에는 어느 무서운 악당들에게 쫓기어 허덕허덕 피해 다니는 그 여자의 그림자가 애처로이 비치는 것이다. 그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속으로 외쳤다. ——— 적은 협박장을 보낸 그 일파다 ——— .

 

오복이는 아래층 상준이의 방에서 영호는 자기 침실에서 세 시간 가량 잠을 자고 새로 한시에 다시 일어났다.

영호는 골프 바지에 헌팅을 쓰고 윗수염을 조금 붙여 간단히 변장으로 오복이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들의 포켓 속에는 영호가 자기 소용으로 만들어 둔 독와사 펌프와 간단한 방독마스크가 들어 있다.

그들은 정문으로 나오지 아니하고 비상출입문인 뒷문으로 조심조심 나와 근처를 잘 살펴본 뒤에 큰길로 나섰다.

7

영호와 오복이는 익선동의 그 집 문앞에 당도하였다.

물론 그 앞으로 몇번 왔다갔다 하며 근처에 감시하는 눈이 없음을 다진 뒤에.———

영호는 지나가는 사람이 혹시 있어서 본다면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척 대문에 잠긴 자물쇠를 열었다. 곁쇠질로 연 것이나 곁쇠질인지 무엇인지 모를만큼 그는 숙련하였다.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소리를 내지 아니하였다. 대문도 조금씩 조금씩 해서 소리를 내지 아니하도록 열었다.

안대문은 환히 열리어 있다. 집 안은 불빛 하나 비치지 아니하는데다가 죽은 듯이 교교하다.

영호는 회중전등을 내어들고 앞을 섰고 오복이는 독와사 펌프를 내어 들고 뒤를 따랐다. 둘이 다 마스크로 코와 입은 가리었고.

영호의 전등불은 우선 건넌방 앞문에 비치었다.

거기에는 영호가 예상한 대로 마나님네 건넌방 문에 친 것과 똑같은 커튼이 치어 있다. 영호는 속으로 헛수고를 하느라고 애들 많이 썼구나 생각 하였다.

두 사람은 마루로 올라서서 건넌방 샛문을 열었다.

앞에 선 영호는 다뿍 긴장이 되어가지고 회중전등을 방안에 비췄다.

전등불이 가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휙 내저었으나 역시 텅 빈 방이다.

방바닥에는 피 흔적과 흙발자국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도 그것이지만 영호의 기대는 더 큰 것에 있었던 것이다.

꼭꼭 결박을 지우고 게다가 재갈을 물렀기 아니면 클로로포름이나 에테르로 마취를 시켜 나자빠진 왼편 엄지손가락이 없어진 사람 ——— 마나님네 건넌방에 들었다가 종적이 없어진 그 이상한 손님 ——— 이 있을 것을 예측 하였 던 것이다.

그는 어떠한 수단이었었던지 모르나 그저께 비 오는 날 밤에 이곳에 들어와서 손가락을 잘리었다.

그 일행은 물론 노인과 여자와 헙수룩한 젊은이의 세 사람이다.

그 증거로는 방바닥에 피 흔적과 한가지로 여러 개의 발자국 가운데 굽 높은 구두의 자국도 섞여 있지 아니하냐.

그들은 이상한 손님이 손가락을 자른 뒤에 그의 몸을 뒤져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물이 없으므로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해놓고는 ——— 혹시 그 사람 자신이 되어 소리지르기를 피할지도 모르는 것이나 ——— 고문을 했을것이다.

그래도 종시 듣지 아니하니까 두고두고 고초를 주려고 그 일행은 일단 돌아갔고 붙잡힌 사람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 뒤에도 밤이면 그 일행이 와서 그를 심문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응당 있어야 할 그가 없으니 웬일일까?

영호는 안방문을 열고 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나 흙발자국으로 이겨놓은 방바닥이며 모두 찢어진 문이며가 눈에 띌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겉문을 처닫은 뜰아래 두 방 역시 찬바람만 휙 돌 뿐이지 아무것도 없다.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을 뽑아낸 자리가 숭업게 시커멀 뿐 사람은커녕 장작개비도 보이지 아니 한다.

부엌 옆으로 달린 광과 변소에도 없다.

영호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다락을 열어도 보고 또 마루 밑까지도 굽어다 보았으나 종시 찾으려는 것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면 어떻게 된 일일까?

그 이상한 손님이 이 집에 잡혀 ——— 혹은 꼬임에 빠져서 ——— 와가지고 손가락을 잘린 뒤에 완전히 자유를 잃었으리라는 것까지는 주위의 정경이며 그동안의 경과가 영호의 추리와 일치하였다.

달아났나?

달아났으면 그는 경찰서로 갔던지, 만일 경찰서로 가지 못할 사 정이 라면 자기가 묵어 있던 곳에 좌우간 들르기는 했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그는 도저히 달아나지는 못했을 것이 결박을 든든히 지었을 것이요, 또 대문은 겉으로 자물쇠를 걸었으니 어떻게 그리 손쉽게 달아날 것이냐.

 

그러나 또 그것보다도 그는 만 이주야 동안 먹지도 못하고 이 추운 곳에서 모진 고초를 받으며 지났으니 어떠한 일이 있든지 자기 자신의 기운이나 의사로는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8

그러면 어디로 자리를 옮겨놓았나?

그럼직도 한 일이다. 그들이 꺼려하는 다른 일파가 끊이지 않고 그들의 뒤를 따르는 모양이니까 그렇기도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고 그것은 용이치 아니한 일이다.

어쨌거나 불법하게 붙들어온 한 개의 산 인간이다.

그러니 그것을 그렇게 결박을 지운 채 백주에 공공연하게 어디로 운반 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밤에 비밀히 한다 하더라도 그들의 전용하는 자동차나 무엇이 있기 전에는 매우 위험한 노릇이다.

그러니 차라리…… 영호는 그 다음 생각이 무서운 듯이 몸서리를 부지중에 쳤다.

그러나 그 여자 일행이 가지고 갔다는 '두 개의 꽤 무거운 트렁크라는 그 말과 관련 하여 ' 죽여 버리지 아니하였냐?’

하는 생각이 자연 머릿속에 떠오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항용 범죄에 있어서 그 희생자가 살해되었다는 것쯤으로 무서워할 영호는 아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는 '그 여자가 중요 인물로 활동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영호는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모르고 어두운 마루에 서서 생각에 골몰하 다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영호는 다시 전등을 비추어가면서 이 방 저 방 고비샅샅이 검사해 보았다.

이번에는 묶여 있을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무거나 증거거리나 참고 거리가 되는 것이 없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별 신통스러운 것도 없었다.

두 사람은 방문들을 전대로 해놓고 밖으로 나왔다.

영호는 조심조심 소리가 나지 아니하도록 대문을 닫고 다시 쇠를 잠갔다.

 

두 사람이 이와 같이 대문 닫기에 열중하여 있는 그 일 분도 못되는 동안에 이곳으로 들어오는 골목 어귀에는 세 사람의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세 개의 그림자는 영호와 오복이가 대문 앞에 서서 있는 것을 희미한 건너 집 외등불에 비치어보자 일제히 발을 멈추고 거동을 살피었다.

일순간 후에 그중의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귀에 대고 무어라고 속삭이다 그는 잰걸음으로 어디론지 사라지고 말았다.

영호와 오복이가 대문 잠그기를 마치고 고개를 돌리며 할 때에 저편 입구의 나머지 두 사람은 갑자기 태도를 고치어 주정뱅이처럼 비틀걸음으로 골목 어귀를 지나쳐 버렸다.

그런 것은 모르고 심상한 영호와 오복이는 골목 어귀까지 나왔다. 늘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감시하는 사람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골목 어귀에 당도하니 아까 그 가짜 주정꾼 두 사람이 무어라고 지절 거리며 영호와 오복이가 가려는 편과는 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역시 그들에 대해 서는 영호나 오복이나 아무 의념도 가지지 아니하였다.

두 사람은 예전 측후소 앞을 지나 교동 큰거리로 나섰다.

그들이 막 북편으로 돌아서 갈 때에 그와 엇갈리어 아래편에서 손님 태운 휘장 친 인력거 한 채가 측후소 골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등뒤의 기척으로 인력거가 지나가느니라고 여겼을 뿐 아무 의혹도 품지 아니하였다.

오복이는 기왕 늦었으니 영호와 같이 올라가기로 하고 텅 빈 밤거리를 천천히 걸어올라갔다.

그들이 계동 어귀로 들어설 때에 이편 설렁탕집에서 웬 이상하게 생긴 젊은 사나이가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두 사람이 알 바가 없는 일 이었었다.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그 사나이는 설렁탕집에서 나와 교동 거리로 내려가 다시 측후소 골목으로 구부러져 들어갔다. 영호는 웬일인지 무엇이 꺼림칙한 게 ——— 아예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여 집에 돌아와서도 안정이 되지아니하였다.

무엇이나 익선동 집에 잃어버리고 왔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가지고 간 마스크, 회중전등, 독와사 펌프 ——— 다 그대로 아직 포켓 속에 들어 있다.

오복이는 차를 끓이느라고 실험실에서 딸그닥거리고 있다.

영호는 눈을 간소롬히 뜨고 일심으로 무엇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감전이나 된 사람처럼 후닥닥 일어나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가며 뒤로 대고 오복이를 불렀다.

 

9

오복이는 놀라 실험실에서 뛰어나와 아래층으로 따라 내려갔다.

영호는 벌써 마당으로 나갔고 놀라 뛰어나온 식모가 오복이와 마주쳤다.

밖에는 자동차 엔진 소리가 들린다.

오복이는 식모더러 실험실의 가스불을 죽이고 또 안팎문을 잘 잠그라고 이르고 자동차 옆으로 달려가서 두말 아니하고 조수대에 올라탔다.

자동차는 좁은 골목에서 위험하다 할 만큼 속력을 낸다. 계동 어귀에서 서 편으로 구부러지는가 했더니 다시 남으로 구부러져 오십 마일의 속력으로 닫고 있다.

일 초 동안인가 싶게 측후소 골목에 이르러 자동차를 멈추려 하던 영호는 다시 속력을 내어 그대로 종로까지 나갔다.

교동 어귀에서 또다시 주저하던 차는 서편으로 향하여 역시 오십 마일의 속력으로 내닫고 있다.

교동 어귀에서 영호는 오복이더러 "두 패잡이 인력거."

라고만 일렀다.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하는 인력거를 찾으란 말인 줄 오복이는 잘 알고 있다.

영호의 얼굴은 한껏 긴장이 되고 번뜩이는 눈과 꽉 다문 입은 방금 적을 목전에 두고 노리는 듯이 무시무시하였다.

차가 서대문 개명 앞까지 갔으나 그동안에 두패잡이 인력거라고는 만나지못하였다.

영호는 개명 앞에서 차를 돌리어 오던 길로 돌아오다가 광화문 네거리에 서북으로 꺾이었다. 속력은 여전히 오십 마일.

차는 총독부 앞에서 동편으로 꺾이어 안국동 네거리에서 잠깐 망설이다가 전동 큰거리로 해서 다시 종로로 나갔다. 종로 네거리에서 그대로 남으로 달리던 차는 명치정 어귀에서 다시 돌이켜 종로 네거리로 와가지고는 동 편으로 꺾이었다가 인사동 골목으로 들어섰다.

역시 두패잡이 인력거는 고사하고 요리집에서 늦게 돌아가는 기생 태운 인력거도 얻어보기가 어렵다.

차는 안국동 네거리에서 다시 동으로 꺾이어 동관을 지나 종묘 뒤의 새 길로 해서 대학병원 옆 네거리에 이르렀다.

오복이는 파출소 앞을 지날 때마다 속이 죄었으나 영호는 그런 것은 생각 지도 아니하는 듯이 종시 긴장한 얼굴로 속력을 놓아 차를 몰고 있는 것이 다.

대학병원 옆 네거리에서 잠시 망설이던 차는 왼편으로 꺾여 박석고개를 넘는 둥 마는 둥 동소문 파출소 앞으로 돌아 남쪽으로 세 길을 달리었다.

종로 오정목에서 차는 머리를 서로 돌리어 교동 어귀에서 다시 북으로 돌리었다. 역시 두패잡이 인력거는 발견하지 못하였다.

우리에게는 제육감(第六感)이라는 것이 있다. 이 제육감을 어느 사람은 비 과학적 의미에 가까운 것이라고 하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아니하다. 그것은 어떠한 사실이 우리의 뇌에 반영이 되었으되 그때에 뇌가 잠깐 바빠 그것을 접수 처리 못한 채 남아 있다가 기회를 얻어 한 완전한 의식으로 등장 하는것이다.

오늘 밤 영호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그는 익선동 그 집에서 나오면서 주정꾼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또 측후소 골목에서는 등 뒤에서 인력거가 그 골목으로 들어가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무심한 사람이 무심히 본다면이거니와 적어도 그때의 영호에게는 그저 오로지 무심한 일로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었다.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두 가지 ——— 주정꾼과 인력거 ——— 를 한번 더 살펴보고 감시도 해보았어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에 마침 영호에게는 그 이상한 손님이 응당 있으리라고 믿고 기습( 奇襲)을 한 그곳에 의외에도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 생각의 정리로 머리가 바빴던 것, '두 개의 꽤 무거운 트렁크에 대하여 일종의 공포를 느낀 것…… 그런 일 때문에 영호의 머리는 그 두 가지 사건을 접수 처리 할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머리에 들어온 것이 접수 수리가 못 되고 있을 때 그의 기분은 꺼림칙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아연히 깨달은 영호는 그처럼 미친 듯이 자동차를 달리고다니며 두패잡이 인력거를 찾은 것이다.

그러면 두패잡이 인력거란 대체 무엇일까?

10

우연……

이 우연이란 것은 참 신비 망측한 물건(?)이다.

가령 사람을 만들어내기는 하느님이 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일생을 좌우 하는 것은 이 우연이란 놈이다.

그러니까 우연은 사람에게는 하느님보다 더 힘이 큰 것이라고도 우겨 볼수가 있기는 하다.

물론 한편에서는 우연을 우연이 아니라고 한다.

미상불 그렇기도 하다. 세상에 정말 우연은 없다. 다 필연이다.

다만 사람이 멍청해서(사람이여 용서하라) 필연을 못 보고 있다가 결과만 가지고 그놈을 우연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논란은 그만두기로 하고 영호와 오복이가 우연히 오 분만 늦어서 그 집에서 나왔다면…… 또 그 여자 ——— 영호의 의중(意中)의 애인 말인데, 아직 그 여자라고 불러 둔다 ——— 가 우연히 오 분만 그 숨는 집에서 일찍 나왔더라면 이 사건은 앞으로 우리가 구경하는 것과는 딴판으로 전개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는 오 분의 이르고 더딘 차이가 꽤 말썽을 부리니 생각 할수록 우연이란 맹랑한 물건이다.

먼젓번에 영호와 오복이가 익선동 그 집 골목의 어귀에서 예전 측후소 편으로 사라지자 지금까지 건주정을 하고 저편으로 가던 두 사람은 갑자기 발길을 돌이키었다.

그들은 다시 골목 어귀까지 와서 어두침침한 곳에 몸을 숨기고 매 눈같이 눈만 내두르고 무엇인지 기다리고 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손님 태운 인력거 한 채가 들이달으며 그 골목 어귀를 돌아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이 그 인력거의 거취를 눈독들여 보고 있는 동안에 먼저 일행 중에서 사라졌던 한 사람이 허덕거리며 달리어왔다.

재동 네거리의 설렁탕집에서 영호와 오복이를 감시하던 인물이다.

"옳드냐?"

아까 그에게 귓속말을 하던 사람이 이렇게 묻는다.

". 계동으로 올라갔었읍니다."

"두 놈 다?…… 확실히 틀림이 없어?"

"."

"그놈 꽤 추근추근하다!"

——— 아마 일행 중의 두목인 듯한 사람 ——— 는 혼자 이렇게 두 덜 거리는 것이다.

"왔읍니까?"

영호와 오복이를 따라갔다 온 자가 묻는다.

 

"."

그들은 제가끔 검정 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가리고는 그 집을 향하여 가고있다. 무엇을 신었는지 발짝 소리도 아니 들린다.

문앞에는 인력거가 놓여 있다.

'그 여자는 어제 오려고 하였으나 새로 든 집을 이것저것 손대느라고 자기도 바빴지만, '헙수룩한 사나이도 틈이 나지 아니하였다.

'그 여자단독으로는 아버지가 보내려고도 아니한다.

그리하여 오늘이야 비로소 틈이 났지만 낮에는 나오지 못하고 밤이 들 기를 기다려 전례대로 인력거를 몰아 집을 나왔다.

인력거가 보통 것이 아니다.

근처 병문에 가서 낡은 놈은 빌어온 것이다. 끌기는 '헙수룩한 사나이가 끈다.

오늘 밤에는 여차직하면 놈을 인력거에 떠실어가지고 오자는 데 세 사람의 의견이 일치되었다. 놈이라는 것은 이상한 손님 말이다.

'헙수룩한 사나이는 인력거에 두 사람쯤 태우고 끌기에는 되레 힘이 남을 만큼 든든하다.

예대로 이리저리 돌림길을 해서 예전 측후소 골목에 당도했다. 양복장이두 사람이(영호와 오복이었다) 그곳에서 나오는 것이 좀 꺼림하였으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요 나오는 것인지라 안심하였다.

골목 어귀에는 네 개의 눈이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으나 알지를 못하였다.

무사(?)히 목적한 그 집 문앞에서 내려 대문에 채운 자물쇠를 열었다. 별 이상이 없다.

안중문에 들어서면서 회중전등을 비춰 우선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별 이상이 없다. 밤이 교교하게 깊었으니 조그마한 인기척도 알아챌 수가 있는데.———

'헙수룩한 사나이는 등 뒤에서 호위를 하고 있다.

마루로 올라서서 건넌방문을 열고 회중전등을 들어 비추는 순간 그 여자는 몹시 놀라, 그러나 소리를 죽인 부르짖음이 그의 입으로부터 흘러서 나왔다.

11

든든한 동바로 옴나위 못하게 결박을 짓고 다리를 묶고 그리고 클로로포름가 제로 재갈을 잔뜩 물린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이 간 곳 없는 것 이다.

영호가 그의 없음을 보고 놀란 이상으로 그 여자는 놀랐다.

그 여자의 머리도 영호와 같이 빨리 돌았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가 자기 의사로 자유로이 이곳을 벗어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되레 그가 그동안에 절명이 되었으면 되었지.———

그 여자는 등 뒤에 서 있는 '헙수룩한 사나이를 떠밀 듯하며 마당으로 내려 섰다.

위협이 박두해올 것을 직각한 때문이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어느 겨를에 들어왔는지 세 개의 시커먼 그림자가 앞을 막으며 보지 아니하여도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살에 칵 울리는 것을 가슴에 들이대는 것이다.

생과 사의 거리는 가슴에 들이댄 피스톨의 길이 이상을 나가지 못한다.

돌아다보니 보이지는 아니하여도 황소 같은 '헙수룩한 사나이의 이를 갈며 솟쳐오르는 기운을 억누르는 참담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다.

발악을 해도 소용이 없다. 발악을 해서는 원체 아니 되지만, 가령 발악을 한 대도 구조의 손이 이곳에 오기보다는 다섯 치 거리에서 피스톨의 탄환 이 심장을 꿰뚫는 것이 더 빠른 것이다.

동바로 두 사람이 다 결박을 당하였다.

수령 되는 자가 회중전등을 '그 여자의 얼굴에 들이댄다. 그 여자는 눈이 부시어 뜨지는 못하고 감은 채, 그러나 앙연히 고개를 쳐들고 있다.

수령 되는 자는 한참이나 노려보고 있다가 혀를 찬다.

"요년! 조고만한 계집애년이!…… 앙큼스럽게…… 요년아, 네 애비는 어데 있니."

그 여자는 보아란 듯이 다문 입을 더욱 꽉 다물어버린다.

수령 되는 자는 '그 여자의 머리를 모자 어울러 움켜쥐고 쌀쌀 내 두른다.

"요년아, 안 댈 테냐."

그래도 '그 여자의 입은 다문 채 그대로 있다.

수령 되는 자는 움켜쥐었던 머리를 와락 꺼들어버리고는 물러서며 하는 말이다.

"안 대면 내가 못 알어낼 줄 아니? 너이 따우는 하루에 열 뭇도 잡어 낸다."

모자를 벗긴 그 여자의 단발머리가 흐트러져 얼굴을 반이나 덮는다.

"나가서 인력거 감찰을 조사해 봐라."

 

수령이 부하 하나에게 명령을 한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수령과 협력 하여두 포로에게 클로로포름 가제의 재갈을 물린다.

밖에 나갔던 부하가 돌아와서 보고를 한다.

"감찰은 떼어바리고 등에는 자용(自用)이라고 쓰였읍니다."

수령 되는 자는 짜증이 나는 듯이 이미 혼수상태에 들어가 거꾸러진 ' 헙 수룩한 사나이를 한번 걷어지른다.

"고따위 꾀는 어데서 생겼어!"

두 부하는 수령의 명령으로 '헙수룩한 사나이의 결박을 풀고 그가 입은 인력거꾼 옷을 벗긴 뒤에 다시 결박을 짓는다.

이편은 영호와 오복이.———

영호는 자기의 조그마한 부주의로 천재일우 좋던 기회를 놓친 것이 너무도 안타까와 필사적으로 자동차를 몰아세웠으나 목적한 두패잡이 인력거는 발견 하지 못하였다.

자동차가 교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에는 영호의 얼굴에는 절망의 빛이 완연 히 떠올랐다.

그러나 행여…… 하는 희망을 품고 다시 한번 익선동 그 집을 가볼 양으로 차를 측후소 골목에 대었다.

두 사람은 차에 내려서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는 주정꾼도 없다.

영호는 자기의 예측이 틀리기를 도리어 바랐다. 만일 예측이 들어맞지 아니하였다면 들어맞지 아니한 예측을 한 자기 자신의 무능함이 좀 결리겠으나, 그러나 이 비상시에 뜻하지 못한 큰일은 저질러지지 아니하겠으므로.——

두 사람은 급히 ——— 그러나 될 수 있는 대로 발자국 소리를 요란히 내지 아니하고 차츰 그 집을 향하여 가까이 갔다.

영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그는 사건에 임하여 가슴이 두근거려 보기는 처음이다.

12

대문은 아까 영호가 잠그고 간 것과 반대로 활짝 열리었다.

필경 일은 저질렀구나 생각하였다.

집안은 인기척이 없이 고요하다.

영호는 위험을 돌아볼 사이도 없이 쑥 들어섰다. 오복이는 등 뒤에 섰던것을 번쩍 나서서 영호와 나란히 서서 들어갔다.

그래도 집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벌써 '그 여자'헙수룩한 사나이의 두 포로가 클로로포름에 마취된 채 한 인력거에 실리어 영호가 예측한 대로 ' 두 패잡이 인력거에 실려가 버리고 난 지도 한 시간이 넘어 된 때이었던 것이다.

영호가 들어서면서 비치는 회중전등불에 맨먼저 눈에 띈 것이 마당에 떨어져 있는 그 여자의 새까만 조그마한 모자다.

영호는 채듯이 모자를 집어 들고 회중전등을 비추어 보았다.

갈데없는 그 여자의 모자다.

영호는 마치 어머니가 죽은 아기의 옷을 어루만지듯이 추렷이 그 조그마한 새까만 모자를 어루만지었다.

애처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그리고 그 다른 일파들에게 우롱을 당하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하며, 영호는 정말로 머리가 혼란하여졌다.

영호가 우두커니 서서 있는 사이에 오복이는 한손에 회중전등, 또 한 손에 독와 서 펌프를 쥐고 집안을 샅샅이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이상도 발견 치 못하였다.

영호는 얻은 모자를 품에 넣고 하릴없이 발길을 돌이켰다.

그의 추측은 영락없이 들어맞았다.

주정하는 체하던 두 사람은 실상 이 집을 감시하던 꾼들이요, 인력거를 타고 들어온 것이 '그 여자, 인력거를 끈 것이 '헙수룩한 사나이였다는 것…… 그런 때문에 영호는 감시하는 일파가 두 사람을 붙잡아 인력거에 싣고 옷까지 뺏어 입고는 하나가 끌고 하나가 뒤에서 밀고 '두패잡이로 달아났 으리라고 짐작한 것이다.

영호는 발을 굴렀다. 이 집의 감시를 소홀히 한 것이 자기 일생의 일대 실책이요 잊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다.

이제는 무엇보다도 '그 여자를 그들의 손에서 구해내는 것이 급선무다.

무엇인지 중간에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이 이 사건의 원인인 듯 한 데, 그렇다면 쉽사리 위해를 입히지는 아니한다더라도 그렇다고 그냥 방임 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미 오리무중으로 사라진 그들 다른 일파에 대해서는 지문조차 없는 협박장 한 장이 있을 뿐인데 무엇을 재료삼아 그들을 찾아내나?

이 넓은 서울 안에서 문제의 대학생으로 변장한 그자를 막연히 찾아내기도 또한 어려운 일이요, 말하자면 속수무책이다.

혹시 '그 여자의 아버지 되는 그 노인이나 찾아낼 수가 있다면 혹 무슨 참고 거리를 얻을지도 모르나 그 노인을 찾아내기가 또한 힘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이렇게 골똘히 생각을 하며 걸어나오다가 영호는 문득 발을 멈추었다.

그는 오복이를 데리고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생각컨대 그 노인이 딸을 그와 같이 내어보내고 너무 늦도록 돌아오지 아니하면 결코 그대로 있지는 아니할 것이다. 위험을 무릅쓰고 찾으러 나설것이며, 찾으러 온다면 맨처음 이 집으로 올 것이다.

만일 부녀(父女)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노인이 이 집을 찾아올 것이요, 찾아오는 마당이면 만사 OK…… 아직 세시가 채 못되었으니까 상필 날이 밝기 전에 올 것이다. 아니 온다면 영호가 생각지 못한 우연의 지장이 또 생긴 때문일 것이다.

다른 일파?

그들은 다시 이곳에 오지 아니할 것이다. 그 증거로는 대문을 잠그지도 아니한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곳에 복병을 하고 있다가 그들 일파의 하나라도 붙잡는다 하면 그야말로 꿈에 떡이지만 그 노인만 만나더라도 막상 허사는 아닐 것이다.

영호는 오복이를 데리고 건넌방으로 들어갔다.

몹시 추우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전신의 신경을 귀에 모아가지고 발자국 소리만 기다렸다.

시간은 한 초 두 초 더딘 것도 같고 빠른 것도 같이 지나가고 있다.

13

영호와 오복이는 조금치라도 추위를 덜하게 하려고 두 사람이 착 들러붙어 앉아 만만한 담배만 연해 피웠다.

캄캄 어둔 방안에는 요화와 같이 두 개의 담뱃불이 번갈아가며 반짝인다.

연기가 가득차서 목안이 매우나 문은 열어놓지도 아니하였다.

오복이는 집에 올라가 담요와 화로 같은 것이라도 가지고 올까 하였으나 영호가 말리었다.

오고 가고 하는 길초에서 그 노인에게 눈치를 채이면 아니 되겠으니까.———

영호는 품 속에 간수한 '그 여자의 모자를 가만히 만지어보았다. 품속에서 온기를 받아 따뜻해진 것이 마치 '그 여자의 체온인 듯싶게 보드랍다.

십 분…… 이십 분…… 삼십 분…… 삼십 분쯤 지났음직한 때에 고요한 밤 적막을 깨뜨리고 멀리서부터 가까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더욱 귀를 기울여 기다렸다.

집 문앞에까지 다다랐다. 그저 집 문앞을 지나 그 발자국 소리는 그대로 다시 멀어지고 만다.

미상불 노인의 발자국 소리와는 달라 젊은 사람의 힘차게 걸어가는 소리 였었다.

두 사람은 긴장이 풀리며 부지중에 한숨이 푸 내쉬어졌다.

또다시 침묵…… 두 사람은 끈기 있게 한 시간을 더 기다렸다.

그때에 바로 대문 밖 근처에서 자박자박 조용히 걷는 발자국 소리가 갑자기 들리었다.

두 사람은 또다시 긴장이 되었다.

자박 자박 자박…… 이 것은 반드시 조건이 붙은 발자국 소리다. 항용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 이면 이 깊은 밤에 그렇게 유유하게 걸어갈 이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웬걸!

발자국 소리는 그대로 대문 앞을 지나쳐 차츰차츰 멀어지고 말지 아니 하는가!

성미 급한 오복이는 벌떡 일어서려고 하였다.

"나가 볼까요."

그는 영호의 귀에 속삭인다. 영호는 그의 팔을 붙잡아 앉히었다.

"가만 있어."

"왜요."

보통 때는 시키는 일 외에는 절대로 입을 벌리지 아니하던 오복이건만 오늘밤은 이렇게까지 나대러 드는 것이 그도 여간만 흥분이 되지 아니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가만 있으라면 가만 있어…… "영호는 좀 거칠게 윽사렸다.

영호는 생각에 꼭 그 노인이 오리라는 확신 밑에서 이와같이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물론 딸을 위지에 보내고 돌아올 시간에 돌아오지 아니하면 평상시의 어버이의 정으로 결코 그대로 있지는 아니할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 생각하면 노인이 오지 아니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들 부녀는 지금 생명을 대어놓고 무엇인지를 겨루고 있는 판이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 그 여자가 집을 나올 때에 그 아버지 되는 노인도 위험만은 각오하지 아니한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들 사이에 이러한 약속이 있었으리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 아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아니하면 이미 위험 속에 빠진 것으로 알 것이라고.

만일 그렇다면 아직도 남은 일을 두고 무모하게 노인조차 ——— 거친 육박전에는 무능력한 노인이 ——— 일부러 위험을 자취하러 들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보다도 그는 꾀로써 다른 방법을 취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오늘 밤에 노인이 만일 집에 없어서 그 여자의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아니하는 경우라면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영호는 이렇게 애초부터 생각을 하고 그야말로 허실삼아 기다리고 있었던것이다.

자박자박 걸어가던 발자국 소리가 그친 뒤에 얼마 아니하여 그 사라진 방향으로부터 또다시 같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자박 자박…… 영호는 그것이 자기의 심장을 밟는 소린 듯이 긴장이 되었다.

발자국 소리는 대문 밖에서 뚝 그쳤다.

두 사람은 들이쉰 숨을 꼭 씹고 기다렸다.

잠깐 멈췄던 발자국 소리가 대문 안으로 들려 들어온다.

14

발자국 소리는 다시 마당에서 그쳤다.

서서 망설이는 모양이다. 한동안 망설이다가 마루로 사풋 올라섰다.

때는 지금이다.

영호는 손에 회중전등을 쥐고 건넌방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마루로 뛰어나 섰다.

그러나 이건 또 웬일일까? 회중전등에 비치는 그 잠입자는 생각했던 바와는 딴판으로 시골 농군(農軍)처럼 생긴 사나이가 놀라 허둥지둥하고 있지아니하는가!

영호는 어이가 없어 우두커니 서서 있고 그 사나이는 허둥거리다가 대 문 편으로 돌아 달아나려는 것을 오복이가 뛰어나와 덜미를 짚었다.

영호는 회중전등을 바로 대고 그 사나이를 살펴보았다. 땟국이 괴죄죄하게 묻은 무명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도 입지 아니하였다.

머리에는 값 헐한 목출모자(目出帽子)를 썼고 얼굴은 시골 농군 그대로 지 둔하게 생기었다.

손도 농군의 손 그대로다.

그는 오복이에게 덜미를 잡힌 채 와들와들 떨고 있는 것이다.

영호는 아주 낙망을 하였다. 태산명동에 서일필이라더니 그 말과 꼭 같다.

"웬 사람이야."

영호는 화풀이하듯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 그저 살려주십쇼, 그저."

그는 여전히 와들와들 떨며 손을 합장한다.

"글쎄 웬 사람이야?"

"명색 없이 돌아다니는 놈이올시다."

"어데 살어?"

"살기는 가평(加平) 살었읍니다."

"그런데……?"

"살 수가 없어서 서울로 왔읍지요. 사흘밖에 안되었읍니다."

"그래서?"

"그래서 오기는 왔지만 무슨 벌이가 있어야지요. 갈 데두 없구…… 그래서 돌아다니며 빈집이 있으면 들어가 자구 하는데 여기는…… ""여기는…… 그래 어쨌어?"

"네 그저, 그저…… …… 오늘 저녁에도 밤새껏 돌아다니다가 아까 이 앞으로 지나는데 대문이 열렸세요. 그냥 무심히 지내가다가 우연히 못쓸 생각이 나서…… ""못 쓸 생각?"

", 그저 배는 고프고 칩기는 하고…… 홍두깨로 치면 담 아니 넘을 놈이 없더라구…… 그저 잠시 못쓸 생각이 나서 다시 돌켜 와가 지구는"그의 말은 무어나 훔치러 들어왔다는 뜻이다.

팔모로 훑어보아야 그가 지금의 사건 가운데 들어 한몫을 보는 인물로 여길 수가 없다.

단지 한 개의 룸펜이다.

영호는 막상 몰라 그를 끌고 마나님네 집에 와 대문을 흔들어 깨워 마나님께 보였으나 그 집 행랑에 묵던 시골뜨기는 아니라고 한다.

할 수 없이 그를 놓아보내고 마침 마나님네가 잠이 깬 기회에 화로불을 피우게 하고 또 담요도 하나 빌렸다. 그리하여 오복이는 담요와 화로불을 가 지고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가고 영호는 자동차를 몰아가지고 집으로 올라왔다.

영호는 얼고 지친 몸을 전기 고다쓰를 묻어놓은 침대 속에 뉘었으나 잠은 오지 아니하였다.

오늘 하루 종일 활동한 것은 결국 실패한 것밖에는 없다. 그것도 조그마한실수에서 생긴 큰 실패다.

만일 오늘 밤의 실패가 없었더라면 사건은 당장에 해결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꾸만 안타까와 견딜 수가 없다.

더구나 그 실책으로 인하여 '그 여자가 다른 일파의 독수에 붙잡히고말았으니!……

뜬눈으로 몇 시간 아니 남은 밤을 새우고 여덟시쯤 일어났다.

그는 아침운동이나 목욕이나 산보도 다 잊어버렸다. 아침부터 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마침 전화가 때르르하고 운다. 이 새벽에 웬 전활까? 상준이나 오복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경 무슨 새로운 소식이겠지.

영호는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

"댁이 백영호요."

말씨는 대단 거만하거니와 음성도 귀에 익지 아니하다.

영호는 불쾌함을 참고 천연스럽게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랬더니 저편에서는 갑자기 "허허 허허."

하고 가장 유쾌한 듯이 웃음을 웃는 것이다.

4. 逆 襲[ 역습] 1 그 웃음은 승리한 사람이 패배(敗北)한 사람에 대하여 웃는 독특한 조롱을 머 금은 것이었었다.

영호는 분통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여보 탐정선생님."

저편에서는 실컷 웃고 나서 이렇게 묻는 것이다.

"…… 말씀하오."

"어제 저녁에 조꼼만 거기서 더 기다리셨으면 좋은 구경을 하셨을 텐 데…… 참 안타까우시겄읍니다."

"천만에."

영호는 지지 아니하려고 이렇게 대답할밖에

"그러나 여보 탐정선생."

"말을 해요."

"아따 그렇게 성미 급하게 굴지 말어요. …… 다른 것이 아니라 이건 경 곤데 요전 속달우편까지 해서 이번이 두번째요…… 사건에서 손을 끊지 아니하겠소?"

"우리는 세번째는 경고 없이 행동을 취하오."

"맘대루 하구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가 있으면 지옥에 있는 사람도 불러내어다 쓰고 우리에게 걸칫거리는 존재면 천당에 있는 사람이라도 생명을 빼앗소."

"나는 절대로 사건에서 손을 끊지 아니하겠소. 인제 최후에 가서 아까 댁이 웃든 그 웃음을 내가 댁 앞에서 웃어보일 테니 그때 봅시다."

", 그 용기만은 가상하오. 그러면 앞으로는 경고 없이 행동을 취하오."

영호는 그들에게 잡혀 있을 '그 여자'를 생각하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구해내는 동안 그들의 위해를 입지 아니하도록 우선 방도를 차리지 아니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일러두었다.

"그렇지만 댁들도 이것은 알아두어야 하오. 나는 경찰의 촉탁을 받은 사람도 아니요, 또 경찰과 협력하는 사람도 아니요, 내 독특한 방법으로 사건의 종말까지도 짓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그와 교환조건으로 어제 저녁에 잽 힌 포로들의 몸에 위해를 가해서는 아니 되오. 만일 위해를 입힐 눈치가 있다면 나는 재래의 절개를 깨트려 경찰과 협력하기를 사양치 아니하고, 그리고 종말에 가서도……"

"하하하하."

저편에서는 다시 한번 웃는다.

탐정선생님이 인제 보니까 그 색시한테 쫄딱 반하신 모양이군요, 하하 하하…… 그래 그 색시에게 위험을 입히면 경찰을 동원시켜 우리를 붙잡어다가 현저동 백일번지 별장으로 보내겠다는 말하자면 위협이구려? 하하 하하…… 잘 알었소. 그러나 우리는 산 포로가 필요한 때도 있지만 경우에 따러 서는 그 포로의 생명을 빼앗을 필요도 있으니깐 미안하지만 선생님하고 약속은 할 수가 없는걸……"

"그러면 할 수 없는 일이지…… 역시 댁들도 맘대로 하구려……"

"하라고 아니해도 할 테요. 그러나 여보 탐정선생…… 우리 정말 한가지 교환 조건이 있소…… 당신이 쫄딱 반한 그 색시를 잠시 소용이 있으니 소용이 끝난 뒤에 털끝 하나 상하잖고 돌려보내 준다고 약속하면 당신이 이 사건에서 손을 끊겠소?"

영호는 잠깐 대답하기를 주저하였다.

그 조건을 승인한다면 물론 탐정으로서 굴욕은 굴욕이다.

그러나 '그 여자'만은 무사히 구해낼 수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사와 신사 사이에 할 말이다.

저편은 사람 죽이기를 담배 한 개 피우기보다 예사로 여기는 흉악한 악당의 무리다.

그러한 그들에게 어떻게 약속을 하며 그 약속이 이행되기를 바라랴.

"그건 그리 할 수 없소."

영호는 이렇게 똑 잘라서 대답을 하였다.

"그러면 교섭 파열."

이렇게 한마디 하고 전화 끊는 소리가 댕그랑 울린다.

영호는 잠깐 동안 수화기를 그대로 대고 있노라니까 교환수가 "낙방?"하고 묻는다.

그는 교환수에게 지금 이곳에 걸리어든 전화가 어디서 온 것인가 물어보았다.

2

조금 있다가 교환수는 지금 전화는 자동전화에서 온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리라고 생각한 것인데 역시 추측이 어그러지지 아니하였다.

자동전화에서 온 것이라면 더 추궁해도 소용이 없다.

어느 곳인지 알아가지고 쫓아간댔자 그가 그때까지 그곳에 꾸물거리고 있을 리 없는 것이요, 또 편지에도 지문을 남기지 아니하는 패들이니 자동 전화엔들 지문이 남길 리가 없는 것이다.

영호는 그 자리에서 제일여관에 묵어 있는 상준이를 전화로 불러내었다.

아침밥을 재촉하여 먹고 올라오는 길에 집으로 오지 말고 익선동 이러 이러한 집으로 가서 오복이와 교대를 하라. 그리하되 안방 다락 같은 데 숨어있어 가지고 누구든지 들어오거든 잘 보아 두었다가 그의 뒤를 밟아보라.

한 시간 가량 지나서 오복이가 상준이의 트렁크를 들고 돌아왔다.

지금까지는 아무 이상도 없었다고 오복이는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눈을 비비면서 보고를 한다.

 

"열두시까지만 자게…… 헌데 상준이는?"

아직 나이 어린 상준인지라 영호는 마음이 놓이지 아니하는 것이다.

"안방 다락에 자리를 잡고 있읍니다.──내다볼 구멍을 뚫어놓고──한 몫 끼어 활동하는 것이 좋은지 아주 싱글벙글하든데요."

오복이는 조금 전에 영호가 분통이 터질 뻔한 것도 모르고 저야말로 싱글벙글 웃는다.

영호도 할 수 없이 고소를 하고 나서 신변이 차차 위험해 올지 모르니, 밤과 또 잠자는 방문을 안으로 잘 닫아걸 것은 물론이요, 낮에도 방심을 하지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그러나 그들은 둘이 다 이러한 일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즉 오복이가 익선동 그 집으로부터 나오기 겨우 삼 분 전의 일이다.

자가용도 아니요 보통 영업하는 인력거 한 채가 휘장 친 안에 손님을 태우고 예전 측후소 골목으로 해서 그 집 문앞을 지났다.

휘장 속에서는 긴장된 두 개의 눈이 그 집의 대문이 환히 열리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인력거는 그대로 그 집 문앞을 지나쳤다.

인력거는 훨씬 더 가서 근처에서는 그럼직하게 대문이 크고 전화번호 패와 적십자사원 패까지 붙은 집 문앞에 대었다.

대되 가던 방향과 반대로 앞을 돌리어 오던 방향 즉 익선동 그 집을 앞 휘장의 셀룰로이드로 내어다볼 수 있게 대어놓았다.

이렇게 인력거는 대어놓았으나 인력거 안에서는 사람이 내리지 아니하였다. 인력거꾼은 타고 온 사람이 무어라고 했는지 보이지 아니하는 곳으로 멀 찍이 비켜섰다.

누가 보든지 인력거 안에서는 두 개의 눈이 멀찍이 바라보이는 익선동 그 집앞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오복이가 트렁크를 들고 그 집으로부터 나왔다. 휘휘 전호 좌우를 둘러보는 것이 인력거 안에서 빤히 내어다보였다.

오복이가 안심하고 저편으로 걸어가자 인력거 안에서는 차부를 불렀다.

"이걸 손에 쥐고──남이 보면 편지를 가지고 심부름 가는 것처럼 말이야 ── 저기 가방을 들고 가는 사람의 뒤를 따러가보아…… 어느 집으로 가는지 그것만 보고 오게."

인력거 안에서는 종이를 접은 쪽지 하나가 나온다.

차부는 그것을 받아 들고 오복이의 뒤를 따랐다. 트렁크를 들고 가니 그림자를 놓칠 리가 없다.

 

차부는 계동으로 따라 올라왔다. 그는 오복이가 들어가는 영호의 집을 보아 두었다가 한참 후에 그 앞까지 들어와서 아무에게도 들키지 아니하고 번지까지 알아내었다. 그는 다시 발을 돌이켜 인력거가 기다리는 곳으로 내려갔다.

3

차부가 돌아오는 것을 인력거 속에서 보고 있던 사람은 비로소 인력거 밖으로 나선다. 그는 '그 여자'의 아버지 되는 수염 좋은 노인이다.

"알었나?"

"."

차부는 굽실한다.

"어데야?"

"바로 계동 위생소 터에다 새로 집들을 지은 집인뎁쇼. 계동 × × 번지 노 × × 올습니다."

"문패는?"

"백 무엇이라고 붙었어와요."

차부는 그의 한문 지식의 정도가 백자(白字)를 알아보는 데 그쳤던 것이다.

노인은 눈을 험하게 뜨고 북편을 흘겨보는 것이다.

"수고했네. 이리 와서 잠깐 기다리게."

노인은 조금 뒤에 인력거를 뒤세우고 그 집을 향하여 걸어갔다.

그는 대문 밖에서도 인제는 안에 아무도 없으려니 안심을 했는지 조 금도 주저하지 아니하고 마치 자기 집이나 들어가듯이 척 들어섰다.

안마당으로 들어서서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건넌방문을 열어보고 안방문을 열어보았다.

다시 내려와 부엌과 광과 변소와 두 개의 뜰아랫방까지 열어보았다.

그는 마당에서 한숨을 후 내쉬었다. 그의 노안(老眼)에는 고요하나마 분노가 불타올랐다.

그는 잠시 우두커니 서서 있다가 대문 밖으로 나갔다.

인력거를 잡아탔다.

"어데로 모시랍쇼?"

차부의 묻는 말에 차 안에서는 잠깐 동안 아무 말이 없다. 그는 어떻게 할까? 하고 몹시 궁리하는 눈치다.

필경 후 하는 한숨 소리와 한가지로 대답이 나온다.

 

"오든 길로 도루 가세…… 가면서 혹시 누가 뒤를 밟어오잖나 살펴보게."

"네 염려 맙쇼."

인력거는 움직였다.

이편 상준이는 노인이 마당에 들어섰을 때에 경험이 없고 나이 어린 만큼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뚫어놓은 창구멍으로 해서 일심으로 노인의 모습이며 일거 일동을 살폈다.

급기야 안방문을 열 때에는 방금 다락문까지 열어보는가 싶어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노인이 다 둘러보고 나서 마당 가운데 서서 있다가 대문 밖으로 나갈 때에는 잔뜩 들이마신 채 있던 숨이 한꺼번에 푹 내쉬어졌다.

인력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재빠르게 밖으로 뛰어나왔다.

인력거는 마침 예전 측후소 편으로 골목 어귀로 돌고 있다.

상준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좀 빨리 쫓아나갔다.

한 희극으로 볼 수가 있다. 노인은 차부를 시켜 오복이의 뒤를 밟게 해가지고 영호의 집을 알아내었는데 이번에는 노인 자신이 영호의 수하에게 뒤를 밟히고 있는 것이다.

상준이가 측후소 문앞까지 나와 보니 인력거는 큰거리로 나서서 남편으로 구부러진다.

그는 얼핏 몸을 돌이켜 측후소 앞 빈터로 해서 골목길로 빠져가지고는 큰길로 나섰다.

`인력거는 남으로 곧게 내려가 교동 어귀에서 동편으로 구부러졌다.

상준이는 뒷골목으로 해서 동관 파주개로 나섰다.

인력거는 여전히 까드락까드락하며 동편을 향하여 가고 있다.

차부는 가다가 말고 잠깐 돌아서서 뒤와 좌우를 살펴본다. 아까 노인의 부탁을 잊지 아니한 모양이다.

그러나 좌우의 포도로 즐비하게 오고가는 사람 가운데 시치미를 뚝 따고 걸어가는 상준이의 어찌 미행자로 발견할 수가 있으랴.

혹시 그가 상준이를 측후소 골목 같은 데서 일단 보았다면 다소 의심을 할것이나, 여기는 가령 열 명의 미행자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는 발견하지 못 할 것이다.

인력거는 여전히 동편을 향하여 가다가 종묘 앞까지 이르렀다. 그때에 상준이는 인력거와 평행을 하고 있었다.

종묘 앞길 어귀에서 인력거는 머물렀다. 탔던 노인이 사방을 둘러보며 내렸다.

 

상준이도 그의 눈에 띄었다. 상준이는 천연덕스럽게 길 옆 담배가게로 들어갔다.

담배를 사는 체하며 그는 노인을 감시하였다.

4

노인은 인력거삯을 주는 모양인데 웬걸 일원짜리인 듯싶은 석 장이나 주고있다.

차부는 멀리서 보아도 이게 웬 땡이냐는 듯이 좋아는 하면서 그래도 한번 사양을 하는 모양이다.

노인은 어루만지듯이 손짓을 하며 받아두라고 하는 거동이다.

차부는 연해 굽실거리고 노인은 일단 일단 돌아서서 종묘의 문 편으로 두어 걸음 걷다가 되돌아서서 차부를 부른다.

차부가 옆으로 가까이 가자 노인은 무슨 말을 묻고 차부는 무엇인지 까막까막 생각하다가 대답을 하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몇 마디 말이 있은 뒤에 노인은 다시 가려던 길을 가고 차부도 돌아갔다.

차부는? 하고 보니까 바로 근처의 병문으로 들어간다.

상준이는 얼핏 담배가가를 나와 바로 그 옆에 있는 잡화점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는 수건과 비누 하나를 되는 대로 사가지고 그 상점에다 모자와 외투와 양복 저고리를 벗어 맡겼다.

그런 후에 그곳을 나오는 상준이는 누가 보든지 아침 목욕을 하러 가거나 그렇잖다면 하고 돌아오는 사람으로 여기게 되었다.

상준이는 수건 끝에 비누를 싸매어 가지고 일부러 홰홰 내두르며 노인의 뒤를 밟았다.

노인은 마침 종묘 문앞에서 궁장을 끼고 바른편으로 돌아가려는 판이다.

그는 다시 한번 전후 좌우를 둘러본다. 그러나 상준이에게는 별로 주 의도하지 아니한다.

상준이는 휘파람을 불면서 뒤를 따랐다.

궁장을 끼고 돌아가다가 얼마 아니 가서 바로 바른편 길 옆집으로 노인은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상준이를 힐끔 돌아다보았으나 상준이는 모르는 체하고 그냥 그 앞을 지나쳤다.

그러나 상준이는 곁눈으로 그 집의 번지와 문패를 볼 것을 잊지 아니하였지만 문패도 번지도 다 떼어버리고 없다.

상준이는 결코 뒤를 돌아다보지 아니하였다.

 

그는 그냥 무심히 그 길로 가서 의전병원 옆 네거리까지 가가지고는 계동으로 올라갔다.

전화통 앞에 붙어서서 분주히 전화를 걸고 있던 영호는 모자도 외투도 저고리도 없이 세수 수건을 들고 뛰어 올라오는 상준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너 이게 웬일이냐?"

그러나 상준이는 연해 싱글벙글 웃는다.

"미행하느라고 변장했지요."

"미행 ! ! 그래서?"

상준이는 제가 겪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빼놓지 아니하고 자세히 이야기를 하였다.

영호는 연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끝까지 듣고 있다가 상준이의 이야기가 끝나자 탄복하여 그의 등을 툭툭 친다.

", 기특하다 ! 우리 상준이가 그런 수단이 있는 줄을 몰랐는걸 ! 잘 했어."

상준이는 부끄러운 듯이 볼을 약간 붉히고 고개를 숙인다.

영호는 이번에는 다가붙는다.

"수염이 탐스럽고 수달피 댄 큰 외투를 입고?"

"."

"틀림없지?"

"."

"집은 큰집이든?"

"그리 크잖은 것 같애요."

"문패도 번지도 다 떼어바리고 없고……?"

"…… 자국은 남었어요."

"헌데 그 인력거꾼하고 하는 이야기가 대강 어떤 눈치인지 모르겠든?"

"아마 무슨 부탁을 노인이 하니까 차부는 승낙을 하는 모양 같애요."

"간단하게? 여러 마디로?"

"여러 마디 하든데요."

영호는 곰곰이 생각하여 보았으나 노인이 차부에게 무엇을 부탁 하였는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차부가 그 일행의 한 사람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

영호는 상준이의 보고로 활기를 띠었다.

그는 밖에 나갈 준비로 옷을 갈아 입으면서 이번에는 칭찬 대신 상준이의 미행을 비판한다.

 

"너 그런데 한 가지 실수를 했다.──다행히 무사는 했지만."

상준이는 약간 불복인 듯이 영호를 치어다본다.

"무슨 실순지 아직도 모르겠니?"

"모르겠는데요……?"

"아래층에 가서 식모더러 오복이가 일어나거든 나가지 말고 기다리게 하라고 이르고 너는 자동차에 가서 기다려라…… 가면서 이야기해 주마."

말을 일러 내려보내고 영호는 다시 수화기를 떼어 들었다.

5

영호는 × × 일보사에 전화를 걸고 사회부장을 불러내었다.

아까부터 몇번이나 걸었으나 아직 아니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찾는 사람이 나왔다. 전부터 가까이 아는 터라 약간 인사가 끝 난후에 영호는 다음과 같은 부탁을 하였다.

──사회부 기자 가운데 경찰서를 담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출입하는 경찰서에 가거든 오늘 아침에 시내 어느 곳에서든지 감찰 없이 내버린 인력거 하나가 혹시 발견이 되지 아니하였느냐, 물론 그것이 신문으로는 사 호일 단( 四號一段) 재료밖에는 아니 되지만, 이편으로 보면 호외거리보다도 더 긴한 것이니 곧 좀 알려주도록 하라.

저편에서는 쾌히 승낙을 하였다.

영호는 전화를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생활이 불규칙하여지고 음식이 모두 식는데도 밥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또 뛰어가는 영호를 식모가 등뒤에서 근심 스레 바라본다. (원래 근심과 즐거움은 애인과 한가지로 남의 것은 서푼 값에 못가지만 내것은 천냥에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니까.)

영호는 팔다리와 전신에 기운이 차 넘는 것 같았다. 어젯밤 일과 또 오늘아침에 조롱을 받아 분하고 안타깝던 우울한 기분은 사라지고 말았다.

운전대에는 상준이가 외투도 모자도 저고리도 벗은 아까 그대로 기다리고 앉아 있다. 영호는 그가 몹시 신통스러웠다.

차를 몰아가면서 영호는 상준이더러 물었다.

"아직도 무슨 실수 없었든지 생각이 아니 나니?"

그러나 상준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모르겠다는 듯이 눈으로 대답을 한다.

"그러면 위선 그 노인이 인력거를 타지 않고 걸어갔다면 너는 어찌할 양으로 했니?"

"제가 인력거를 타지요."

 

상준이는 서슴잖고 대답한다.

영호는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고 그 다음…… 이게 중요한 것인데…… 아까 말이다. 그 노인의 집이 종묘 앞에서 그렇게 가까웠으니 말이지 만일 한 십오 분이고 이십분이고 그보다 더 삼십 분 사십 분이나 걸어가도록 멀었었다면?…… 그렇다면 네가 목욕 수건을 들고 따라가는 것이 대번 폭로가 될 게 아니냐?"

상준이는 비로소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인다.

사실 생각하면 아슬아슬한 일이다. 다행히 그 노인의 집이 그렇게 가까 왔기 말이지 그렇잖고 순라골을 다 돌아 연건동이나 연지동 같은 데로 여러 골목을 걸어가게 되었다면 일은 완전히 실패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하면 그래도 불복이 있다.

"그렇지만 종묘 앞에서 인력거를 내렸으니까 집이 멀잖을 텐데요……"

"아니…… 노인이 뒤를 밟히지 아니하랴고 그리는 것이니까 종묘 앞에서 내렸다고 그의 집이 가까우리라고 속단해서는 안된다…… 물론 목욕 수건을 들고 나선 것은 걸작이다. 나도 첩경 내기 어려운 꾀야 응…… 그런데 또 다행히 노인이 집 가까운 데서 내렸기 때문에 네가 성공을 한 것이다. 알겠니?"

상준이는 고즈너기 고개를 숙였다.

차는 종묘 앞까지 가까이 왔다. 영호는 차를 가솔린 스테이션에 맡기고 상준이는 의복 맡긴 상점에 들어가서 맡겼던 것을 찾아 입고 나왔다.

영호는 상준이를 앞세우고 목적한 그 집 앞에 다다랐다.

과연 문패도 번지 쓴 패도 떼어버리고 자국만 남아 언뜻 보기에 빈집 같으나 좀 주의해서 보는 사람에게는 번지 쓴 패까지 떼어버린 것이 되레 조건이 붙었다는 의심을 주게 되었다.

영호는 다가서서 대문을 밀쳐보았다. 안으로 잠그고 열리지 아니한다.

영호는 잠깐 주저하다가 손가락을 조금 벌어진 대문 틈으로 넣어 손쉽게 빗장을 벗겼다.

영호는 서슴지 아니하고 안대문을 거쳐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제는 노인과 영호는 한편인 셈이다. 그러니까 영호가 활동하는 것을 숨길 필요도 없고 되레 노인을 만나 그와 공동전선을 취하자는 것이다.

6

대문 소리가 나고 또 안마당으로 사람이 들어섰으니 응당 반응이 있을 것인데 집안은 고요하니 아무 인기척이 없다.

 

집은 아주 조그마한 단가 살림집이다.

들어서면서 정면에 부엌이 있고 왼편으로 광이 있고 바른편이 안방이다.

그리고 마루와 건너방이 있을 뿐이다.

마당에는 장독대의 자리는 있으나 아무것도 놓인 것은 없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겉문이 척척 닫기고 자물쇠까지 채웠다. 그러면 집안에 사람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부엌문을 열고 보니 새로 건 솥이 있고 무연탄과 장작이 조금씩 있으며 살림 나부랑이도 있으나 모두 어설프다.

부엌으로든지 마루로든지 뒤 울안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고 다 막히었다.

혹시 상준이가 잘못 알지나 아니하였나 하고 다시 한번 다지어보았으나 틀림없다고 확언을 한다.

그러면 노인이 역시 상준이를 의심하고 그를 따느라고 임시 남의 집 대 문안에 들어섰던 것인가?

그렇게도 생각할 수가 있다. 좌우간 이따가 저녁이고 다시 한번 와보는 것이 상책이라고 영호는 상준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대문은 전대로 밖에서 빗장을 잠글 수가 있었다.

만일 무슨 흔적을 남겨놓았다가는 노인이 돌아와서 눈치를 채고 또 자리를 떠 버릴 테니 큰일이다.

가솔린 스테이션까지 나온 영호는 문득 어제 저녁의 익선동집 일을 생각 하였다.

이제는 노인은 감시할 필요가 없이 직접 담판을 한다더라도 노인의 신변에 미쳐오는 위험에 대해서는 감시를 해야 할 것이다.

만일 노인조차 어젯밤과 같은 일을 당하여 종적을 잃게 된다면 그때는 완전히 엉터리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영호는 다시 돌이켜 그 집 앞으로 와서 앞뒤의 이웃집을 물색하였다.

뒷집은 집도 크고 부유해 보이니까 말을 잘 듣지 아니할 뿐 아니라 쓸모로 보아도 앞으로 있는 납작한 초가집이 적당할 듯하였다.

비뚤어진 대문을 밀치고

"이리 오느라."

부르니까 허리 꼬부라진 안노인이 나온다.

"누구 찾으시요?"

"주인양반 안 계십니까?"

", 우리 아들 말이요?…… 전방에 갔지요. 어데서 오셨소?"

노인은 알아보기나 하려는 듯이 노안을 들어 영호와 등 뒤에 섰는 상준이 를 번갈아 본다.

"다른 게 아니라 댁에 방이 빈 게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영호는 이렇게 넘겨짚어 보았다. 실패하면 달리 교섭할 요량으로.──

"빈방이요? 글쎄……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지만……"

영호는 안으로 기웃이 굽어다보았다.

방이라야 안방과 건너방뿐인데 뒷집과는 등을 지고 앉은지라 건너방의 뒷 벽에 구멍 하나만 뚫어놓으면 모든 것을 내어다볼 수 있게 되었다.

아주 안성마춤이다. 노인은 말을 계속한다.

"식구래야 우리 모자뿐인데, 우리 아들이 건너방에서 거처하지요…… 나는 돈푼이나 얻어 쓰자고 세를 놓자지만 저는 조용히 공부를 해야 한다고 그 새도 멫번 말이 있는 것을 내놓잖앴다우."

마나님과 더 이야기했자 끝이 나지 아니할 것 같아서 영호는 마나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동대문 안 어느 이발소로 그 아들이라는 사람을 찾아 갔다.

하기야 이제는 노인과 단도직입적으로 들여대는 판이니까 노인이 들어있는 그 집에 그대로 버티고 있다가 노인을 만나고 그래서 공동전선을 펴는 방법도 없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첫째 노인이 확실히 그 집에 들었는지 그것이 의문이요, 다음은 다른 일파의 불의 습격을 받더라도 딴 곳에서 감시하고 있으면 저편의 행방을 추적 할 여유가 있고──그러니까 불가불 먼저의 방법을 취하는 것이 현명한 도리라고 할 수가 있다.

7

영호는 젊은 이발사를 불러내어 자동차 안에서 교섭을 하였다.

우선 자동차 바람에 고분고분해진 그는 영호가 쥐어주는 십원짜리 석 장에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고도 조건은 단지 오늘과 내일, 다직해야 모레까지 그 의 건넌방을 빌리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방에서 무슨 음모를 하거나 사주전을 하려는 것이 아니요, 벽에 조그마한 구멍 하나를 내고 그 뒷집에 든 사람을 감시하는 것뿐이니 아무 염려도 말려니와 또 한동안 절대 비밀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약속은 쉽사리 성립이 되었다.

영호는 이발사를 그대로 태운 채 그의 집으로 돌아왔다.

모자가 무어라고 소곤거리더니 대번 건넌방을 치워 준다.

신사 때문에 감시하는 사람이 교대를 하거나 자주 출입을 하여서는 아니되 겠으므로 따로 십 원 한 장을 내어놓고 누가 와서 있든지 밥을 해주고 불 을 때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사십 원…… 그들의 한 달 수입만큼 되는 돈이 꿈결에 생겼으니 기뻐하는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다.

영호는 상준이에게 여러 가지 주의를 시킨 뒤에 또 주인 모자더러 절대 비밀을 지키고 되도록이면 동리 사람들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를 재삼 하였다.

영호는 자동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오정이다.

오복이는 일어나서 밥을 먹고 있었다.

영호는 × × 일보사의 사회부장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오늘은 아직 아무 경찰서에서도 그러한 인력거를 발견했다는 계 출이 들어오지 아니하였다고 한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다.

그렇다면 그 일파가 그 인력거를 그대로 쓰든지 혹은 내버렸으되 아직 경찰서에 계출이 아니 된 것이니 좌우간 그것은 하루 이틀 더 기다려 보아 야할 일이다.

영호는 오복이에게 상준이의 트렁크와 담요를 약간의 돈과 같이 주어 보냈다.

내보내면서 영호는 시치미를 떼고 말하였다.

"상준이는 나이 어려도 그애가 제법이야."

이 말에 오복이는 돌아서서 영호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왜요?"

"그애가 우리 셋 중에 제일 큰 공을 세웠으니 말일세……"

그러고 나서 영호는 상준이가 오늘 아침에 노인의 뒤를 밟아 필경 그의 집을 알아내었다는 것을 약간 과장해 가지고 들리어 주었다.

"누구는 그 경우에 그만 일을 못할라구요!"

이 말은 결코 심상한 대답이 아니다. 영호는 싱그레 웃으면서.──

"자네는 어림없네…… 아무래도 머리가 좀 무거워서……"

오복이는 완연히 불쾌한 빛을 보이면서 말이 없이 나가버렸다.

영호는 혼자서 싱긋이 웃었다.

우두커니 앉아 있는 영호는 침실로 들어가서 베개 밑에 넣었던 '그 여자'

의 모자를 가지고 나왔다.

놓고 보느라니 여러 가지 감정이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다.

모자를 놓고 보면 그 주인공이 적의 손에 붙잡혔건만 자기는 이렇게 무료 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활동할 재료가 없으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아까 당장 가서 노인을 만날까 하였으나 그도 여의치 못하였고 인력거를 내버린 방향을 중심으로 활동해 보려 하였으나 긴한 그 인력거가 발견이 아니 되고.

아쉰 대로 그 다른 일파가 그처럼 위협을 했으니 그것이 말에 그치지 말고 이편에 육박전을 걸고 덤볐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느때에 올는지 또는 그저 위협에 지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오복이가 간 지 삼십 분쯤 해서 전화가 왔다.

"저 오복입니다. 지급 곧 돌아가잖아도 괜찮아요?"

"? 무슨 볼일 있나?"

"."

"맘대로 하게."

영호는 쌀쌀하게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밤에는 크게 활동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점심──인지 조반인지 ── 먹은 뒤에 침실로 들어가려니까 또 전화가 왔다.

이번은 상준이에게서 온 것이다.

8

"저 상준입니다.──방금 들어왔었는데 안방으로 들어갔다가 이내 다시 나갔어요."

보고는 그것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집에 노인이 들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영호는 그렇게 속히 그가 돌아올 줄 알았더면 차라리 자기가 감시를 할 걸하고 후회하였다.

그는 침실로 들어가서 석간신문이 올 때까지 푹신 한잠을 자고 일어났다.

혹시 소포 사건이 나지 아니하지나 아니하나 하고 근심하던 것인데 다행히 각 신문에 모두 났다.

아주 선동적 제목을 붙이어 대부분이 꼭대기 기사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소포와 손가락을 사진까지 찍어서 내었다.

──사람의 손가락을 소포처럼 꾸미어 백화점의 변소에 버린 기괴 백% 의 사건이 발생하였다.

× 일 오후 한시 시내 × × 에 있는 × × 백화점의 이층 매장에 있는 여 점원이 변소에 들어갔다가 소포 꾸러미 하나가 주인 없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 하였다. 동 백화점에서는 손님이 잊어버리고 간 것으로 알고 온종일 보관 하였으나 아무도 찾으러 오는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다음날인 × 일 아 침에 소관 × × 서에 계출하였다. 이것을 접수한 동서에서는 그 내용을 풀어 본 결과 의외에도 그 속으로부터 사람의 손가락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하여 확실히 범죄의 유적임을 알게 된 동서에서는 아연 긴장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전게 손가락 소포에 관하여 동서에서는 그 소포에 씌어 있는 수취인 서광 옥의 주소인 가회동 이백십오번지를 찾았으나 원래 가회동에는 이백십오 번지라는 번지가 없을 뿐 아니라 서광옥이라는 것도 전연 허구의 인물인 듯하고, 또 소포의 우표나 스탬프도 아무데서나 떼어 붙인 가짜 소포인 것이 판명되었다.

──소포의 차출지는 군산 산상정 십팔번지요 차출인은 유대설이라 하였으나 동서에서 군산경찰서에 지급조회를 해본 결과 역시 주소와 성명이 허구인 것이 판명되었다.

──의문의 가짜 소포에 싸인 손가락은 의사의 감정에 의하건대 자른지 사흘 내지 나흘이 경과된 중년 남자의 왼손 엄지손가락이요, 여러 가지로 참작 하여 중류 이상의 생활을 하는 사람의 손가락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우기 죽은 사람의 손에서 자른 것이 아니요, 산 사람의 손에서 잘라내었다는 것이 더욱 이 사건으로 하여금 중요성을 띠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 × × × 사법주임은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언뜻 보면 혹시 경찰을 우롱하려는 장난인 듯도 하였으나 어느 누가 자기의 손가락이든지 또는 남의 손가락을 일부러 잘라서 장난을 할 사람이 있겠읍니까?

아직 단언을 할 수는 없으나 이것은 어느 범죄의 준비 행동인듯합니다. 운운.

이외에도 몇 개의 그에 관한 기사가 있으나 별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영호는 싱그레 웃으면서──더우기 여기에는 옮겨놓지 아니했지만 최초 에그 가짜 소포를 발견했다는 여점원을 불러다가 취조한다고 쓴 대목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하였다.

날이 차차 저물어간다.

오복이가 결기가 나서 저대로 돌아다니다가 하마 돌아올 때가 되고, 또 상 준이에게서도 하마 무슨 보고가 있을 텐데 웬일일까?

영호는 초조히 기다리며 밤이 들었으되, 두 사람에게서 모두 소식이 오지아니하였다.

시계가 열한시를 칠 때에 겨우 상준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또 들어왔다가 나갔어요. 그런데 이상해요."

"무엇이?"

"자세 말씀할 수는 없고 와서 보아야겠어요,"

"오냐 곧 가마."

영호는 전화를 끊고 막 외투를 떼어 입고 현관에 나서는데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나며 찾지도 아니하고 현관문이 와락 열린다.

말쑥말쑥하게 양복은 입었으나 모두 심술이 곱지는 못하게 생긴 사나이 셋이 척척 들어선다.

9

영호는 반사적으로 방어(防禦)의 자세를 취하였다.

그들은 분명히 악당의 일파인 줄 짐작한 것이다.

영호의 포켓 속에 집어 넣은 손에는 독와서 펌프가 쥐어져 있다.

그는 터럭 하나 들어올 빈 틈도 없이 어떠한 공격에 대하여서라도 막아 낼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심중에 다소 이상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다.

첫째 이 침입자들이 어쩐지 그 악당의 일파인 것 같지가 아니하고, 또 그렇다 하더라도 한 사람쯤 비밀히 보내서 무슨 처치를 하든지 할 것이지 이렇게 세 명이나 요란스럽게 와글와글 보내어 남이 알도록 일을 할 이 치가 없으리라 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일은 잘되었다. 도리어 이편에서 기다리고 있는 터이다.

아직 그 악당의 일파에게 대하여 조그마한 증빙과 단서도 없는 터인데 이 것은 저편에서 자진하여 그것을 제공하는 셈이니까.──

이러한 생각이 전광석화와 같이 머리에 돌며 영호의 사지는 찢어질 듯이 긴장이 되었는데, 저편에서는 웬일인지 통일이 없고 어릿어릿하는 눈치가 보이는 것 같다.

"웬 사람들이요?"

영호는 세 사람의 침입자를 번갈아 보며 꾸짖듯이 물었다.

그동안에 영호는 그들을 각각 다시 한번 세세히 관찰하기를 잊지 아니 하였다.

 

세 사람이 모두 말쑥말쑥하게 양복을 입었으나 그 하나도 스마트하게 몸에 착 맞는 것이 없다.

방금 황금정 기성복집에서 사서 입은 것이 분명하다.

그중 맨나중에 들어왔고 키가 작은데다 끊이잖고 불안스러워하는 한 사람은 양복이란 처음 입어보는지 괜히 손으로 칼라와 넥타이를 자주 만지는 것이다.

맨앞에서 들어온 몸집도 크고 그중에서도 심술이 더욱 궂게 생긴 사람은 힘꼴이나 쓰는지 어깨가 떡 벌어지고 코는 위로 젖혀진 주먹코에 푹 숙여 쓴 헌팅 밑에서 눈방울이 휘휘 구르고 있다.

둘쨋번에 들어오던 키큰 친구는 얼굴에 아무런 특장도 없으나 못먹는 술을 먹은 것이 분명하다.

'좌우간 엑스트라(臨時雇[임시고])들이로구나……'

영호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영호의 꾸짖듯 묻는 말에 앞에서 들어온 주먹코가

"댁이 배 백영호요?"

하고 한번 더듬으며 묻는다.

", 내가 백영호요."

영호는 앙연히 대답을 하였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키큰 친구가 영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아닌 것 같은데……?"

영호는 속으로 고소를 하였으나 천연히

"아닌 것은 댁들이 어떻게 안단 말이요?"

하고 반문하였다. 이 말에 키큰 친구는 대답을 아니하고 먼저의 주먹코가 말을 가로막는다.

"확실히 이 집 주인 백영호요?"

"글쎄 그렇다는데 왜 자꾸만 묻소?…… 대관절 댁들은 누구며 무슨 일로 이렇게 왔소?"

영호는 속이 죄었다. 이 사람들을 이렇게 만났으니 물론 기다리던 터라 다행은 하나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처치하고 상준이에게로 가보아야 할 일이다. 그의 전화에 '좀 이상해요' 한 것이 더욱 마음에 걸리는 때문이다.

주먹코는 포켓 속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명함 한 장을 영호에게 내어준다.

"× × 경찰서 형사 최윤식."

명함에 쓰인 글자들이다.

영호는 실소할 뻔할 것을 억지로 참는데 나머지 두 사람도 척척 명함을 꺼 내어 영호를 준다.

모두 인쇄잉크도 아직 마르지 아니한 새 명함들이다.

영호는 갑자기 태도를 고치어 허리를 굽혔다.

"! 그러십니까? 이거 참 실례했읍니다…… 진즉 그런 말씀을 하시 지원…… 자 올라오십시요."

그들은 서로 잠깐 돌아보다가 척척 신을 벗고 영호를 따라 이층 응접실로 들어왔다.

영호는 그들을 탁자 가로 둘러앉히고 자기도 이편에 앉았다. 그러나 불의의 습격에 대한 경계의 자세는 결코 해제하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전화가 때르르 울린다. 받아보니 오복이의 급한 목소리다.

10

"차 찾었읍니다."

오복이는 급한 소리로 이렇게 말을 한다.

"잘했네,"

감찰 없는 인력거를 찾았단 말인 듯하다. 그러나 등 뒤에 침입자들이 있으니 자세히 보고를 들을 수는 없다.

"지금 이리 곧 아니 오세요?"

"내가 지금 바쁘니까 그만두고 자네는 상준이한테 가보게."

"상준이한테요?"

영호는 대답을 아니하고 전화를 끊었다.

자리로 돌아오니 세 사람은 담배 서랍에 내놓은 해태를 제가끔 붙여 물고아주 꿀맛같이 쭉쭉 빨고 있다. 그뿐 아니라 몇개씩 집어넣었는지 담배가 푹 줄었다.

"그런데 이렇게 늦게 무슨 일이신가요?"

영호는 의자에 앉으며 공순하게 물었다.

", 명함에 보신 바와 같이."

그야말로 일동을 대표하여 말하는 주먹코는 활동사진 변사의 말석( 末席) 제자의 말본새 그대로다.

"──명함에 보신 바와 같이 우리는 × × 경찰서 형산데…… 가택 수사를 좀 하야겠어서……"

"네 가택수사요?"

영호는 짐짓 놀라운 듯이 눈을 허겁스럽게 홉떴다. 미상불 다른 의미로 '

가택수사'를 하겠다는 것이 의외는 의외였지만.──

 

"네 가택수사를 해야겠읍니다."

"거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읍니다마는…… 그러나 경찰서에서 하시는 일이니 방거할 수야 있읍니까. 그러면 해보시지요."

그들은 척척 일어섰다.

처음 현관에서 그들에게 양연히 대하던 영호의 위압에는 적지 않게 위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형사란 명함을 보인 뒤에 영호가 갑자기 고분고분해진 데 용기가 솟아났다.

영호는 우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실험실을 보여주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침입자에게는 무릇 인연이 먼 것이라 호기의 눈으로 둘러볼 뿐이다.

사진실도 열어보이고 큼직한 것이면 저편에서 요구해서 열어보았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상준이의 방과 식모의 방과 안방을 모조리 들어가 보았다.

다락과 벽장도 다 열어보았다. 부엌도 들여다보았으나 지하실은 어디냐 고 묻지도 아니한다.

실상 지하실의 문은 찬장으로 가리었기 때문에 알지도 못했겠지만.──

현관에 벗어놓은 신을 집어다 신고 부엌으로 해서 뒤 울안으로 나가 도장, , 목욕실 모조리 둘러보았다.

그러나 애초에 눈에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이제는 그들의 눈에 띈 가운데 아니 보인 곳이라고는 맨처음 그들이 들어 앉았던 응접실 옆에 있는 침실 하나뿐이다.

그들은 영호의 안내도 없이 다시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 눈치를 챈 영호는 뒤층계로 해서 그들보다 앞서 이층으로 올라가 응접실로 들어가서 우선 침실의 도어를 잠가버렸다. 뒤미처 그들이 척척 들어섰다.

"저 방은?"

주먹코가 침실을 가리키며 묻는다.

"그건 내 침실입니다."

주먹코는 척척 걸어가서 손잡이를 잡고 밀쳐보았으나 꿈쩍도 아니한다.

영호는 현관에서와 같이 앙연하지도 아니하고 명함을 본 후에와같이 공순 하지도 아니하고 그들을 조롱하듯이 한편에 비켜서서 빈들빈들 웃고있다.

"이 문을 열어."

주먹코는 침실의 도어를 가리킨다. 그러다가 영호의 태도가 또 변하여 빈들 빈들 웃는 것이 의외롭다는 듯이 다시 한번 치어다본다.

 

"열 수 없는데요."

"경찰의 명령에 항거할 테야?"

"할 수 없지요."

"이 문을 부실 테야."

"거 그 문을 부시자면 둘이나 세 사람의 힘으로는 아니 될걸요."

영호는 어디까지든지 침착하고 조롱하는 태도다.

주먹코는 성이 나가지고 영호의 앞으로 척척 걸어온다.

"네가 그러면 그 여자를 저 방에 감금시킨 것이 확실하니 내놓아라. 그렇잖으면 체포다."

영호는 깜짝 놀랐다.

11

그들이 가짜 형사인 것을 영호는 처음부터 짐작을 하고 있었다.

다른 일파의 악당들이 보낸 엑스트라(臨時雇)들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우선 저의 하는 대로 두어두고 눈치를 보아서 그 일파에 대한 단서를 잡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주먹코의 입에서 흘러져 나오는 한마디.──

"그 여자를 감금시켰다."

는 한마디는 영호의 추측을 여지없이 뒤엎어놓고 말았다.

영호는 오늘 아침에 그 노인이 인력거꾼을 시켜 오복이의 뒤를 밟게 한 것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이므로 이 침입자들이 다른 일파의 일꾼 임을 의심하려고도 아니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알고 보니까 그들은 '그 여자'를 찾으러 아니 뺏으러 오지 아니하였는가?

그렇다면 이 침입자들은 다른 일파가 보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여자'

아버지 되는 노인이 보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 확실히 노인이 그들을 보냈다.

오늘 아침에 노인은 인력거 속에서 그 집으로부터 나오는 사람을 발견 하였다. 그리고 인력거꾼을 시켜서 그가 계동 × × 번지 × × 호에서 사는 백 아무인 것을 알게 되었다.

동시에 노인은 그러면 이 백아무가 자기의 딸을 간밤에 그 집에서 붙 잡아간 것이라고 단정을 하였다.

백아무가 어떠한 인물이며 또 무슨 필요로 이 사건의 와중에 뛰어들었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노인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다만 그 백아무가 이 싸움 의 한 대적이요, 대적인 그가 자기 딸을 붙잡아 갔느니 라고만 생각 하였던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종묘 앞에서 인력거를 내리기까지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하여 보았다.

경찰서에 고발을 할까도 생각하여 보았다.

소중한 딸을 구하자면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다.

그러나 아직은 절망상태가 아니니까 그 최후수단까지 취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보다도 형사대를 이편에서 만들어 내 어보 내자…… 이렇게 계획을 세운 노인은 차부에게 젊은 사람을 삼사 인 구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는 집에 무슨 이상이 없나 잠깐 살펴보고는 다시 병문으로 나가 차 부와 한가지로 가형사감을 물색하였다.

자전거포, 이발소, 구둣방 같은 데를 뒤지면 그런 종류의 사람은 뭇으로라도 구할 수가 있다. 노인은 근처의 구둣방에서 세 사람의 젊은 친구를 골라내어 그들을 데리고 조용한 중국요리집으로 갔다.

막걸리값, 마코값도 없어 몸을 비비 트는 친구들이라 배갈에 잡채와 뎀뿌라 그것만도 생각지 아니한 행운이다. 그러한데다가 우선 하나 앞에 삼십원씩 내주면서 이놈으로 준비를 해가지고 일을 시작하여 성공만 하면 하나 앞에 또다시 백 원씩을 주겠다…… 노인의 조건은 이것이다.

그들에게는 자기네의 귀를 의심할 만큼 땡이다.

심심한데 장난하고 실패하더라도 이미 삼십 원씩은 먹어놓은 것이요, 또 성공을 하면 백 원이 또 생기고.

여부없이 다 승낙하였다. 노인이 최후에 만일 여의치 못하면 경찰서 같은데 발각이 되더라도 절대로 자기가 시킨 것이 아니요 그냥 깽질을 하려 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는 말에도 쾌히 맹세를 하였다.

그들은 그 길로 황금정으로 가서 제가끔 기성복을 사서 입고 동무의 명함 포에 가서 명함을 두어 장씩만 박이고 그리고 만단의 준비를 해두었다가 약속한 밤 열시에 아침에 만나던 중국요리집에서 다시 노인을 만났다.

──순순히 듣지 아니하거든 완력을 써서라도 젊은 단발한 여자와 또 사나이 두 사람을,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백아무라는 그자까지 잡아가지고 이러 저러한 곳으로 오너라.

그리하여 그들은 그곳에서 자동차를 불러 타고 가르쳐 준 번지를 찾아온것이다.

 

이러한 내력이 붙은 그들 세 사람이다.

그들은 영호의 태도가 변한 것을 보고 순리로는 되지 아니할 줄 알았는지 셋이서 앞과 좌우로 둘러싸고 공격의 자세를 취하였다.

"단발한 그 여자와 그리고 두 사람의 남자 말이다. 내놀 테냐, 아니 내놀테냐?"

주먹코는 한걸음 버쩍 더 나서면서 딱 어르는 것이다.

慘 劇[ 참극] 1 영호는 그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도저히 퉁탕거리고 주먹질을 할 상대자가 되지 못함을 알았다.

정작 권투가에 눈에 비친 그들의 덤벼드는 자세는 맨 빈틈뿐이다.

만일 주먹을 사용한다면 하나 앞에 한 대씩 세 대면 충분하겠다.

영호는 여전히 빙긋이 웃으며 탄무타의하게 한걸음 앞으로 나서 주먹코의 팔을 가만히 잡았다.

주먹코는 그것을 뿌리치려고 하였으나 이미 늦고 다음 순간 그의 팔은 마치 쇠집게에게 물린 듯이 뼈가 부스러지게 아팠다. 그는 부지중에 몸을 비꼬며 '아이구 아얏!’ 소리를 쳤다.

왼편으로 영호에게 덤벼들던 키다리가 마저 팔을 붙잡혀 가지고는 역시 비명을 지른다.

키 작은 겁장이는 눈이 휘둥그래서 쩔쩔매고 있다.

영호는 움켜쥔 두 사람의 팔을 한번 더 꼭 쥐면서 "이래도 나하고 싸워볼 생각이 나겠다?"

하고 물었다.

"그저 자 자 잘못했읍니다."

두 사람은 대번 항복을 하고 만다.

영호는 팔을 놓아주었다. 둘은 아픈 팔을 우디고 섰다.

"저리 앉어!"

영호는 위엄 있게 명령하는 어조로 동편 창 앞에 있는 소파를 가리켰다.

세 사람은 아무 소리 없이 그곳으로 가서 나란히 걸터앉았다.

영호는 탁자 옆에 걸터앉았다.

"콩밥을 좀 먹고 싶은가?"

그들은 아무 대답이 없이 고개만 숙인다.

 

"이 못생긴 것들! 그래 무얼 해먹으면 못해먹어서 남의 꼬임에 빠져가지고 가형사질을 해?"

그러니까 키 작은 겁장이가 겨우 고개를 쳐들고 애원하듯 말을 한다.

"그저 용서해 줍쇼. 어리석은 탓에 남의 꼬임에 빠져서 그랬읍니다."

사실 영호는 그들을 더 나무라거나 추궁할 흥미와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는 일어서서 침실 도어를 열어놓았다. 그리고 다시 주먹코의 손목을 끌어다가 잠깐 침실 내부를 들여다보여 준 뒤에 도로 소파로 돌려보냈다.

"보았지? 없지?"

"."

"이거 봐…… 나는 남의 집 여자를 약탈해오는 도적놈도 아니고 그렇다고 경찰서의 촉탁이나 그런 사람도 아니야…… 그런데 그 노인이 괜히 나를 오해하고 그리는 거야. 응 알겠나?"

세 사람은 동시에 ""하고 굽신한다.

"그러니까 내가 오해도 풀고 또 불가불 만나보아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 가서 그 노인을 만나야 할 텐데 어데서 기다리기로 했나? 훈정동?"

"아니요."

주먹코가 대답을 한다.

"종묘 옆 훈정동 그 집이 아니야?"

"훈정동집이란 모릅니다. 만나서 이야기하기는 중국요리집인데 일 끝나고 만나기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다가 그는 동간들을 둘러보고 말끝을 흐려버린다.

영호는 생각하였다. 훈정동 그 집이 아니라면 대관절 어딜까? 역시 또 한 군데 집을 차려놓은 데가 있나?

"어데로 만나기로 했나?"

그러나 그들은 역시 서로 얼굴만 치어다보며 대답하기를 꺼리어한다.

"말을 아니할 텐가?"

영호의 어성은 약간 거세어졌다.

주먹코는 아주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 적 긁 적하며 "실상 굳은 약속이 있어서요. 어떤 일이 있든지 그 노인이 시켜서 한 일이라고는 하지 말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건 벌써 아셨으니까 할 수 없지만…… ""대주지 못하겠단 말이지? 약속이 있으니까…… 그렇지만 만일 그것을 대주지 아니하면 여기서 뇌여나가지 못할 테니 그건 어쩔 텐가?"

이 말에 그들의 얼굴에는 확실히 곤혹의 빛이 떠돌았다.

 

그들은 노인과의 약속도 약속이려니와 그보다도 일은 실패했지만 그대로라도 가서 백 원은 그만두고 단 얼마씩이라도 돈을 더 빼앗아낼 요량인 것이다. 그러니까 더구나 방해가 될지도 모르는 이 집 주인에게는 대어주고가싶지 아니한 것이다.

2

"어덴지 대지 아니할 테야?"

영호는 재촉하였다. 그리고 타이르듯이 설명을 하였다.

"인제 나하고 같이 가보면 알겠지만 나는 되려 그 노인의 도움이 될지언정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니까 염려 말어요."

무엇인지 혼자서 까막까막 생각하고 앉아 있던 주먹코가 갑자기 "선생님, 그러면 탐정……이십니까?"

하고 묻는다.

영호는 싱그레 웃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그렇잖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내 직업이 탐정은 아니니까…… 취미로 하는 장난이지."

주먹코는 벙실벙실 웃는다.

"그러시다면 대드리지요. 동소문 밖 흥천사 들어가는 바른편 외딴 집에서만 나기로 했읍니다."

"…… 틀림없지?"

"."

"그러면 다들 돌아가…… 그러고 다시는 이런 숭내는 내지 말어야 해…… 그러고 어데 가서 누구한테든지 이런 이야기를 해서는 안돼…… 만일 발설이 되면 자네들이 위선 잡혀가서 경을 칠 테니까."

세 사람은 코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한다.

키다리와 키 작은 두 사람은 선선히 나가려고 하는데 주먹코가 주춤주춤 하다가 겨우 ", 저의들…… 저 심부림 좀 시켜 주셨으면…… "영호는 그 뜻을 얼른 알아채었다. 그러나 ──"팔 한번 꼭 쥐어주었다고 대번 항복하는 겁쟁이들을 심부림을 시켜!!"

주먹코는 무렴해서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면서도 미련겨운 듯이 영호의 눈치를 살핀다.

"가서들 있게…… 일이 있으면 찾을 테니…… " 영호는 뚝 잘라 거절하느니보다 그래 두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네네…… 그저 아무 심부림이라도…… 종로 사정목 ××양화점에 와서 ' 뿌루도꾸라면 다 안답니다."

영호는 실소를 하였다. 그들도 웃었다.

이렇게 길을 들여놓고 보니 미상불 쓸모가 있음직도 하여 보였다.

"인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아프다고도 아니하고 항복도 아니 합니다…… 꼭 좀…… "주먹코는 이렇게 열심으로 조르나 다른 두 사람은 오늘밤 단단히 혼이 나서 그런지 그다지 흥이 나지 아니하는 모양이다.

영호는 그들이 자동차를 문 밖에 기다려 두었을 것을 생각하고 같이 집을 나섰다.

과연 운전수가 졸고 있는 자동차가 놓여 있다.

영호는 차를 타고 내려가면서도 한가지 궁금한 것은 그 노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의 집을 알아내었으며, 또 그보다도 어째서 자기가 그의 딸과 젊은 사람을 붙잡아 왔다고 단정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어젯밤에 그 다른 일파가 그 여자와 헙수룩한 사나이를 잡아가는 것을 그러면 노인이 목도했나? 그리고 그것이 영호 자기로 알았는가?

그러나 그 장면을 목도했다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 뒤를 따라갔을 터이니까 다른 일파의 소굴을 발견했을 것이니 그것이 영호의 소행으로 알게 되지는 아니할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분명 어젯밤에 그 야단이 끝난 뒤에 그도 근처에 있다가 영호가 나오는 뒤를 밟았든지 오늘 아침에 오복이가 집으로 올라오는 것을 뒤를 밟았 음에 틀림없는 것이다.

오늘 아침 그가 상준이에게 뒤를 밟힌 것은 그가 이미 오복의 뒤를 밟아 영 호의 집을 알아가지고 또 한번 익선동 그 집을 들러나온 때다.

이렇게 생각하고야 영호는 비로소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영호는 종묘 앞에서 가형사 일행과 작별하고 상준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근처에 오복이의 자동차가 있는가 둘러보았으나 아무데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역시 오늘 낮에 영호의 준 충동이를 받아가지고 공을 세우느라고 동분서주 하느니라 생각하니 영호는 되레 오복이가 가엾었다.

상준이는 너무 속을 졸이고 기다렸다는 듯이 보고를 한다.

"열한시가 좀 못되어서 노인이 들어왔다가 이내 나가더니 한 십분 후에 웬 양복쟁이 하나가 들어왔다."

 

이것은 또한 뜻하지 아니한 사실이다.

양복장이라니, 그는 그러면 누구일까?

3

"양복쟁이?"

하고 영호는 반문하였다.

"어떻게 생겼드냐?"

"침침해서 잘 보이지는 않는데 양복 입은 게 어떤지 얼리잖고…… ! 참 그러고 어떻게 해서 방문을 여는데 그때 방안의 불이 사람 얼굴에 비치는데아주 얼굴이랑 머리랑 헙수룩해요."

'헙수룩한 사나이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어젯밤에 그 여자와 한가지로 붙잡혀 갔는데…… 혹시 달아나왔다?

상준이의 그 다음 말은 이러하였다.

그가 자동전화에 가서 보고를 하고 오니까 오래잖아 오복이가 희색이 만면 하여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저 누상동 근처에서 문제의 감찰 없는 인력거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문소리가 나기에 구멍으로 내어다보니까 아까 들어왔던 사나이가 도로 나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오복이는 유여치 아니하고 그의 뒤를 따르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다. 그 뒤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영호는 상준이를 남겨두고 그 집을 나왔다.

그 헙수룩한 사나이가 잡힌 곳에서 도망해 나온 듯하고 그리하여 그는 이 곳으로 왔다가 노인이 없으니까 동소문 밖 그 집으로 간 것이다. 그 뒤를 오복이가 따라가고. ── 영호는 시계를 꺼내 보니 벌써 열두시가 훨씬 지났다.

좌우간 동소문 밖으로 나가기는 해야 할 터인데…… 하고 생각하다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아타고 우선 경성자동차부로 갔다.

오복이와의 관계로 해서 그곳 주인은 영호를 잘 아는지라 청하는 대로 속력 좋은 택시 하나를 서슴잖고 빌려주었었다.

영호는 오복이가 그동안 집에 돌아왔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잖다면 또 무슨 일이 생기었나보다 하는 막연한 불안을 품고 손수 택시를 몰아 동소문 밖으로 향하였다.

 

오복이는 낮에 영호에게 냉대를 받고 분한 생각으로 방향 없이 자동차를 몰고 돌아다니었다. 그러다가 밤 늦게 우연히 누상동 새로 난 큰길 거리에서 문제의 감찰 뗀 인력거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그것이 기뻐 가슴이 뛰는데 또다시 훈정동 그 집에서 나오는 양복장이의 뒤를 밟게 되니 용기 백배하였다.

보아하니 그 '헙수룩한 사나이인 듯싶었다. 그는 종묘 어귀에서 두리 번 두리 번하다가 서쪽으로 향하고 올라갔다.

오복이는 자동차를 천천히 몰아 앞섰다 뒤섰다 하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헙수룩한 사나이는 ××자동차부로 들어가더니 조금 후에 자동차 안의 사람이 되어가지고 나왔다.

오복이는 대번 속력을 놓아 그 뒤를 따랐다.

앞의 자동차는 동관을 곧장 북으로 올라가 바른편으로 꺾이어 가지고 종묘 뒷길로 달리고 있다. 오복이는 물론 뒤를 따랐다. 앞 자동차에서는 뒤를 밟히는 줄 알았던지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오복이도 속력을 높였다. 그는 미행에 성공을 못하면 내놓고 달려들어 붙 잡아가지고라도 올 배짱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자동차를 몰아 대학병원 네거리에서 왼편으로 돌아 박석고개를 넘는데 문득 뒤를 돌아다보니까 웬 트럭 ── 화물자동차 한 채가오고 있는 것이다.

오복이는 근읍에서 짐을 싣고 왔다가 돌아가는 화물차이거니 생각하고 그다지 유념도 아니하였다.

앞의 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다. 동소문 파출소 앞에서 조금 속력을 늦추고는 그대로 동소문 옆길로 달리고 있다.

되었다. 시외로만 나가면 일은 다 된 것이다. ── 이렇게 생각하고 일심으로 앞만 바라보고 가는데 뒤에서 오는 화물차는 화물차 답지도 아니하게 속력을 놓아 점점 두 사이를 가까이 줄이는 것이다.

오복이는 차라리 화물차를 앞세워 보내는 편이 낫겠다고 ── 인제 시외이니까 앞차를 놓칠 염려는 없으므로 ── 생각하고 동소문 옆을 넘으면서 속력을 줄이고 살그머니 왼편으로 길을 비키어 주었다.

그런데 고의인지 운전수의 잘못인지 옆에 바싹 당도한 화물차는 그 커다란 대가리를 이편으로 향하여 들여밀고 있는 것이다.

"!"하고 소리도 지를 틈이 없이 오복이의 차는 떡 밀리고 말았다.

4

 

오복이의 차는 성난 황소 대가리에 받친 고양이 새끼처럼 그냥 낭떠러지 밑으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화물차는 솜씨 있게 다시 핸들을 돌리어 방향을 바로잡아 가지고 전속력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 겨우 삼사 초 동안의 일이다.

이것이 백주라든가 또 시내이었더면 될 뻔이나 한 불법이랴만 자정이 가까운 시외니 누구 하나 그것을 목도한 사람도 없고 따라서 시비할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요란한 충격 소리와 이상한 비명 소리에 잠이 깨어 동리 사람이 모여들었을 때에는 낭떠러지 밑에 굴러져 있는 자동차의 유해를 발견했을 뿐이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다만 피투성이가 된 운전수 ── 오복이는 들것에 담기어 대학병원으로 갔다.

순사가 현장에 달려오고 한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야기는 여기서 또다시 잠깐 뒤로 물러가서…… 붙잡혀 간 헙수룩한 사나이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깰 만하면 마취를 시키고 시키기 때문에 머리가 마치로 얻어맞은 듯이 띵하고 목이 타는 듯이 마르다.

때는 어느때쯤 되었는지 모르겠고 멀찍이 촛불 하나가 켜져 있다.

방안을 둘러보니 든든한 철문 하나가 있을 뿐 아무데도 창이 없는 것이 지하실 일시 분명하다.

그나마 공사를 하다가 말았는지 벽돌을 쌓은 사이에 굳어 붙은 시멘트가 그대로 비죽비죽 솟아 있고 이 구석 저 구석에는 공사에 쓰던 시멘트 묻은 바께쓰며 나무통이 난잡하게 굴러 있다.

그는 아가씨는? 하고 둘러보았으나 자기 혼자뿐이다. 아가씨란 '그 여자말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굽어다보았다. 위아래 내의만 입은 채 꽁꽁 결박을 지우고 거적자리 위에 굴러져 있는 것이다.

조금 저편에 누가 벗어 던졌는지 양복바지와 저고리가 굴러져 있다.

추운 품으로는 그거나마 집어다가 걸쳤으면 좋겠는데 팔다리가 묶였으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다가 시험삼아 뒤로 결박지은 팔목에 힘을 주어보니 이게 웬일! 스르르 묶인 것이 풀어지지 아니하는가!

물론 어떠한 사람이 당했던지 이 경우에 이 일을 당했으면 미칠 듯이 기뻐 아니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는 기운이 버쩍 났다.

그는 손 재게 다리 묶은 줄을 풀어버렸다. 그리고 우선 벗어 내던진 양복을 집어 입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그는 절망을 하였다.

응당히 밖으로 잠겨 있을 저 철문을 어떻게 열고 나간단 말인가!

우두커니 서서 원망스럽게 철문을 바라보다가 그는 그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처음 손으로 밀어보았다. 다시 팔로 밀어보았다. 조금 반응이 있는 것 같아 이번에는 어깨를 대고 밀어보았다.

조금씩 조금씩 소리도 없이 철문은 나갈 자리를 벌려주는 것이다.

그의 몸은 필경 철문 밖으로 비어져 나왔다.

캄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다가 바른편으로 저편에 희미한 불빛이 겨우 보인다.

그는 살금살금 기어서 불 비치는 앞에까지 이르렀다.

말소리가 유리창으로 스며나온다. 톡톡 하는 소리도 들린다.

가만히 고개를 들고 들여다보니 두 사람이 희미한 촛불 밑에서 화투를 치고 있고 두 사람은 거적자리 위에 이불을 펴고 잠을 자고 있다.

여기까지는 무사히 나왔지만 밖으로 나가자면 어디로 가야 할까.

설마하니 저 녀석들더러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고…… 그는 가는 데까지 가보겠다고 또다시 엉금엉금 기었다.

지금 그가 기고 있는 곳은 지하실의 복도인 듯하다. 바른편으로 다시 꼬부라져 기어가노라니까 무엇이 대가리에 부딪친다. 역시 철문이다. 부딪는 소리에 방안에서 무슨 반응이 없나 하고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그대로 무사하였다.

먼저와 같이 그는 철문을 열었다. 돌층계를 여덟 개쯤 올라가니 훤하게 별을 박은 하늘이 보인다. 인제는 살았다.

그러나 그는 그 다음 순간 달아나려 아니하고 되레 돌층계에 주저앉았다.

5

아가씨를 그대로 내버리고 혼자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젯밤에 아가씨를 모시고 왔다가 놈들에게 이렇게 잡혔으니 영감님이 얼마나 근심하실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만일 지금 이대로 혼자만 빠져나간 다면 일도 아니요 도리도 아니다. 찾아볼 대로 찾아보아야 한다.

그는 도로 돌층계를 내려가 무거운 철문을 열고 굴속 같은 복도를 엉금엉금 기었다.

기면서 좌우의 벽을 만지어 보았다.

자기가 갇히어 있던 근처에 오니 철문 하나가 손에 만지어진다. 힘들여 밀쳤으나 열리지 아니한다. 위로 더듬어보니 자물쇠가 잠기었다.

그는 생각하였다.

또 한 곳 철문이 있으나 역시 자물쇠가 잠기었다.

저 수직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놈들을 때려눕히고 열쇠를 뺏을까?

그랬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저편은 도통 네 놈인데 이편은 한몸…… 그러나 네 놈이 무서운 것이 아니요, 네 놈의 손에 쥐어진 피스톨에는 항우장사라도 어찌하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없이 일단 혼자 달아나 영감님과 상의한 뒤에 다시 거사를 하리라고 또 한번 엉금엉금 기어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도 될 수 있으면 발자국 소리가 무겁지 아니하게 나도록 하노라고 엉금엉금 기었다.

한참 기어나오니 눈 아래 경성시내의 밤이 전등불과 한가지로 내려다보인다.

뒤는 보니 자기가 기어나온 벽돌집이 시커멓게 우뚝 서서 있다.

그는 다시 조심조심 분간 못할 길을 찾아 내려왔다.

그는 경성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는지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하지 못 하였다.

겨우겨우 큰길까지 찾아나와서는 그저 덮어놓고 뛰었다.

밤은 저으기 깊은 듯하나 거리에 사람이 드물지 아니하다.

누구더러 길을 물을 것도 없이 그저 이리저리 닥치는 대로 뛰었다.

그리하여 어디를 어떻게 해서 왔는지 전차길 네거리에 당도하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몇번 지나본 총독부 앞 광화문 네거리다.

그는 전차길을 따라 동으로 걸어갔다.

인제는 뛸 필요도 없다. 좌우를 살펴보았으나 사람이 빈번히 왕래는 하지만 자기를 따르는 사람은 있어 보이지 아니한다.

필경 종묘 앞에 이르렀다. 사방을 조심조심하여 훈정동 그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영감님의 그림자는 보이지 아니한다.

잠깐 기다리다가, 그러면 위험을 느끼고 동소문 밖으로 피신을 한 듯 하니 그리로 가겠다고 그 집을 나섰다. 나섰다가 오복이에게 띄고 만 것이다.

그는 속을 졸이며 운전수를 졸라 속력을 내게 하였다.

그러다가 돌아보니 뒤쫓던 자동차는 간 곳 없고 화물자동차 한 대만이 전속력을 놓아 앞을 질러가고 말았다. 그는 후하고 한숨을 내어쉬었다. 인제는 쫓아오는 자동차도 없고 또 화물자동차를 의심했더니 그 역시 앞으로 지나쳐 가버리고. ── 흥 천사로 갈려 들어가는 어귀에서 화물차가 머물러 있었다. 가슴이 뜨끔하여 내어다보니 운전수가 달랑 혼자서 고장을 수선하고 있다. 안심이다.

무사히 목적한 곳에 다다랐다. 생각한 대로 영감님이 혼자 기다리고 있다.

영감님은 의외에도 의외라는 듯이 그를 붙잡아들인다. 그도 그럴 것이 가짜 형사대에게 영솔되어 딸과 같이 와야 할 것이거늘 혼자 오는 것을 보았으니까. ── 우선 운전수에게 후한 팁을 주어 누가 묻더라도 말을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고 주종은 마주 앉았다.

노인은 그에게서 어젯밤 이래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계동으로 붙잡혀 간 줄 알고 그리로 가형사대를 보내어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판인데…… 그러면 계동 산다는 그 백아무라는 자는 웬 인물인가?

그러나 그것보다도 당장 큰일은 딸을 구해낼 방법을 차려야 할 것이다.

주종이 앉아서 그 상의를 하는데 방문이 소리없이 열리며 네 개의 몸뚱이가 슬며시 들어선다.

주종은 마치 유령이나 만난 듯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멍하니 앉아있다. 사람이 너무 의외의 놀라움에 접하면 한동안은 넋이 나가는 법이다.

6

네 명의 장한의 손에 쥐어 있는 피스톨은 주종의 가슴을 겨누고 있다. 두 자루는 모젤이요, 두 자루는 조선에서는 구경하기도 어려운 소음(消音) 피스톨이다.

'헙수룩한 사나이에게는 네 명이 모두 낯이 익다.

그들은 조금 전에 지하실에서 둘은 잠을 자고 둘은 화투를 치던 꾼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노인에게는 하나만이 아는 얼굴이다.

만일 온다면 가형사대가 왔을 것인데 그들은 아니다.

 

도무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주종이 놀라하는 것을 보고 그중 하나가 유쾌한 듯이 웃는다.

헙수룩한 사나이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어 가지고 "우리를 잡어갔던 놈들입니다."

하고 노인에게 한마디 설명을 한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노인의 묻는 말이다.

헙수룩한 사나이는 고개를 내어두른다.

먼저에 웃던 사나이가 또 한번 허허 웃더니 "왜 알고 싶어? 허허."

하고는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한다.

그들은 일부러 포로 가운데 하나인 헙수룩한 사나이의 묶인 것을 풀고 문도 열어놓았다. 달아나는 뒤를 밟아 노인까지 잡든지, 가령 그것이 실패하더라도 그때에는 딸을 찾으려고 노인이 덤벼들 테니 그때에 다같이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 꾀를 모르고 헙수룩한 사나이는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는 계획한 대로 밟았다. 광화문 네거리에서는 화물차로도 따랐고 걸어서도 따랐다.

그러다가 종묘 앞에서 잘못하여 그림자를 놓치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다가 조금 기다리고 있는데 어디선지 '헙수룩한 사나이가가 다시 나왔다.

그때 또다시 뒤를 쫓는데 늘 거칫거리는 백영호가 ── 그의 탄 차의 번호를 보아 틀림없다 ──(그들은 오복이인 줄은 몰랐다) 앞차와 화물차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리하여 동소문 밖에서 우선 그를 처치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줄곧 따라오기만 하면 눈치를 채겠으므로 일단 앞을 질러 갈림길인 골목 어귀에서 기다렸다. ── 차의 고장을 수선하는 체하고.

헙수룩한 사나이의 차가 골목 어귀를 돌아갈 때에 한 사람이 날쌔게 차 뒤에 올라붙었다.

그는 차 뒤에 붙어서 이 문앞까지 왔다가 물정을 살펴가지고는 다시 돌아오는 그 차 뒤에 붙어서 길 어귀까지 나왔다.

운전수는 그런 줄도 모르고 뒤에 붙은 사람을 내려놓고는 가버렸다.

그만하면 만사는 OK.

"어때? 신출귀몰이지? 허허허허."

그는 말을 마치고 또 한번 유쾌하게 웃는다.

 

"너 이놈! 네가 이놈 이래야 옳아?"

노인은 분에 타는 눈으로 그 설명하는 사나이를 쏘아보며 호령을 한다.

그러나 그 호령이 무슨 힘이 있으리요!

"."

하고 그 사나이는 일부러 허리를 굽히며 밉상스럽게 조롱을 한다.

"당신이야말로 그래야 옳습니까? …… 좌우간 같이 좀 가시지요…… 수고스럽지 만…… ""어델 가?"

"우리 두령께서 지금 만반진수를 채려놓고 기다리십니다."

"너의 두령이 누구란 말이냐?"

"그건 가보셔야 압니다."

"나는 못가겠다."

"그러면 미안하지만 모시고 가지요."

이때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었다. 그 소리를 듣고 노인은 눈이 빛났다.

"! 기뻐 마십쇼. 저건 우리 화물차 ── 당신과 이 바보를 모셔갈 양으로 우리가 타고 온 화물차랍니다."

웃던 사나이가 그렇게 설명을 한다.

미상불 자동차 소리가 뚝 그치고는 그 뒤는 아무 기척도 없다.

노인은 한가지 그저 그 가형사대가 ── 일은 성공했거나 못했거나 오기는 올 그들을 심중으로 고대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시간을 잡아 끄노라면 그들이 오겠지…… 오기만 하면 무슨 변통수가 생기겠지.

'헙수룩한 사나이는 아무 말이 없이 눈방울만 내두르고 있다가 앞에서 겨눈 피스톨이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에 나는 새와 같이 달려들었다. 그 통에 그의 머리에 부딪친 전등이 퍽하고 폭발이 되며 방안은 암흑 천지가 되었다.

7

방안에서는 전등의 폭발 소리와 아울러 푸시, 푸시 하는 소음 피스톨 소리가 두 번 들리었다. 회중전등이 번쩍거리고 그리고는 한참 쿵쿵거리더니 앞뒤로 문이 열리며 사람의 그림자가 사방으로 확 흩어졌다.

한 십 분 후에는 문앞에서 기다리던 화물차가 다시 오던 길로 돌아가고 말 았 다.

이편은 영호……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풀스피드를 놓아 동소문 옆 고개를 넘을 때에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길바닥이 우연히 눈에 띄었다.

그대로 지나치려다가 그는 차를 돌이켜 그곳을 다시 한번 비추어 보았다.

타이어 자죽이 요란히 흐트러진 것이 결코 심상치 아니하다.

그는 오복이가 이 길로 가서 돌아오지 아니하였다는 선입감만 없었더라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는 차를 세워놓고 뛰어내려 현장을 회중전등으로 비추어 보았다.

타이어가 미끄러진 뒤를 따라 비추는 회중전등이 낭떠러지 밑에 엎 드러진 자동차에 비쳤을 때에 영호는 갑자기 숨이 칵 막히는 듯하였다.

그는 급히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가 자동차의 번호를 비춰보았다.

갈데없는 오복이의 차다.

그러면 오복이는?

그는 동리 사람들을 두드려 깨울까 하다가 차로 돌아와 오던 길로 해서 동소문 파출소에 머물렀다.

파출소에서 오복이가 대학병원으로 떠메어 갔다는 말을 듣고 다시 차를 몰아 대학병원으로 달리었다.

오복이는 머리에 붕대로 동이고 혼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영호는 눈에 눈물이 괴었다. 그리고 후회하였다. 만일 오늘 낮에 그러한 충 동이만 시키지 아니하였어도 오복이가 이런 일은 당하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그는 숙직실로 의사를 찾아가서 상태를 물어보았다.

── 제일 위험한 상처가 왼편 귀 위에 받은 파열상인데, 다행히 그것이 상처를 받을 때에 뇌에까지 울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생명에 별조가 없을 것이요, 그 밖에는 골절도 없고 또 피도 많이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안심할 수가 있다고 의사가 설명하여 주었다.

영호는 겨우 숨을 돌이켜 쉬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다.

그는 간호부에게 쓰끼소이와 전속간호부를 사고 또 병실도 갑등( 甲等)으로 옮겨 달라고 돈을 주어 부탁하였다. 아직 움직일 수는 없으니까 밝는 날 병실은 옮기기로 하였다.

잠깐 앉았노라니까 오복이가 잠이 깨어 눈을 떴다.

그는 영호를 보고 반겨 힘없는 입술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을 영호가 손으로 제지하였다.

 

그는 안심한 듯이 다시 눈을 감았다.

영호는 병원을 나오면서 상준에게 보내는 명함을 적어 인력거꾼에게 보내었다.

그곳은 그만두고 이곳에 와서 오복이의 시중을 들어주라고.

그러는 동안에 밤은 한시가 지났다.

노인이 기다리다가 또 무슨 탈이 났나 하고, 어디로 피난을 했으면 어찌 하나 싶어 영호는 최고 속력을 놓아 차를 달리었다.

동소문 밖 흥천사 들어가는 골목의 바른편 외딴집이라고 주먹코가 대어주었으나 캄캄 어둔 밤에 그 말만 가지고는 집 찾기가 매우 곤란하였다.

영호가 갈림길에서부터 일부러 차머리를 이리저리 내둘러 사방을 비춰 보며 천천히 올라갔다.

거진 흥천사까지 다 가서 겨우 그것인 듯한 집을 찾아내었다. 바른편의 외딴 집 이랬으니 하나밖에 없는 집일 것이요, 그렇다면 이 집일시 틀림이 없을것이다.

그러나 올 사람을 기다리면서 불을 죽인 것은 좀 이상하였다.

대문은 훤히 열리었다.

회중전등을 비춰보니 안방문도 열리었다.

의심이 더럭 나면서, 그러나 기침을 캑 하여 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다.

잔다면 방문을 저렇게 열어젖혀 놓았을 리가 없고…… 영호는 조심조심 마루로 올라가 방안으로 회중전등을 비춰보았다.

그 순간 '!’ 소리를 치고 그는 뒤로 물러섰다.

8

영호는 부지중에 꺼진 회중전등을 다시 비춰보았다.

확실히 그 노인이다.

방바닥에 엎으러진 노인의 옆에는 흥건히 흐른 피가 아직 완전히 엉 기 지도 아니하였다.

영호는 방으로 들어가 우선 엎드러진 노인을 바로 뉘고 앞가슴을 풀어 보았다.

심장 정통에 동전만한 입이 벌어졌다. 아주 완전한 시체다.

그는 손에 피가 묻지 아니하도록 조심하여 노인의 몸을 뒤지었다. 그러나 소지품이라고는 종이조각 하나도 없다.

 

가해자가 벌써 뒤져간 것이다.

옷고름을 문득 보니 피묻은 손가락 자국이 남아 있다. 영호는 그것을 떼어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그는 노인을 전대로 해서 엎드려 뉘고 일어섰다.

회중전등에 비치는 방바닥은 난투의 자국으로 낭자하다.

그러나 원래 장판바닥인지라 참고될 흔적까지 남지는 아니하였다.

전등은 파열이 되었다.

벽에는 노인의 모자와 두루마기와 외투가 걸려 있을 뿐 아무것도 없다.

영호는 이거나마 일후에 '그 여자에게 전하리라고 외투를 떼어 자기가 입었다.

마루로 나와 보니 대뜰에는 노인의 신발인 듯한 신발 외에 허름한 구두 가한 켤레 놓여 있다. 영호는 구두를 집어들었다.

건넌방문을 열고 보았으나 텅 비었고 부엌에도 장작이 조금 있을 뿐 솥도 걸려 있지 아니하였다.

본거는 훈정동 그 집이요, 이것 역시 임시로 쓰는 곳인 모양이다.

영호는 뒤 울안으로 돌아가 보았으나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동차로 돌아와서 스타트를 시켰다.

구두와 외투는 쿠션 밑에 숨겨두었다.

사람은 혼자 죽어 넘어졌는데 구두는 두 켤레다.

그러면 이것은 분명 범인의 것이 아니면 또 한 사람 같이 있다가 달아난 사람의 것일 것이다.

달아난 사람…… 그는 '헙수룩한 사나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동소문 밖에서 자동차를 일부러 시내에서 나온 것처럼 머리를 문 밖으로 향해 세워 놓고는 동리 사람을 두드려 깨웠다.

영호는 그를 데리고 전복된 오복이의 자동차 옆에까지 와서 아이들이 장난을 하거나 또 누가 타이어 같은 것을 잘라가지 못하도록 감시를 해달라고 일원 짜리 두 장을 쥐어주며 부탁을 하였다.

영호는 회중전등을 비춰 팔걸이 시계를 한참이나 굽어다보았다.

그러니까 그 동리 사람이 "지금 몇시나 되었어유?"

하고 묻는다.

"새로 한시요."

"한시요? …… 나는 더 늦인 줄 알었더니 그렇게밖에는 아니 되었군…… 하고 그는 혼자 중얼거린다.

 

실상 그때의 시간은 벌써 두시 반이나 되었지만 영호는 속으로 생각 하는 일이 있어 그가 아까 처음 이곳에 와서 자동차 전복된 것을 발견한 때의 시간 ── 그 시간에서 한 삼십 분만 더 늦게 ── 그 동리 사람에게 대어 준것이다.

영호는 그의 성명과 주소를 적어놓고 차를 돌리었다. 그는 자동차의 뒷 불을 꺼 번호를 보지 못하도록 하여가지고 그 길로 훈정동을 향하였다. 대학병원에는 일부러 아니 들르고. ── 대문은 잠기었으나 낮에처럼 손가락을 넣어 열 수가 있었다.

응당 그 헙수룩한 사나이가 이 집에 와서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온 것인데, 그러나 집안은 교교하고 아무 인기척도 없다.

그러면 그는 도로 잡혀갔나? 잡혀갔으면 신발쯤은 신고 갔을 터인데…… 그렇잖고 여기도 위험할 줄 알고 영영 딴 곳으로 달아났나?

영호는 이렇게 두루 생각을 하며 좌우간 검사나 해보리라고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그러자 갑자기 안방문이 와 열리며 시커먼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그 대 로영호를 덮어누르는 것이다.

너무도 뜻하지 아니한 습격인지라 영호는 방비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껴 눌리고 말았다.

괴한은 이어 준비해 가지고 있었던지 동바로 결박을 지으려 하는 것이다.

영호는 아뿔싸 큰일이로구나 생각하였으나 위에서 누르는 사람이 원체 억세어서 곧잘 빠져날 수가 없다.

9

만일 이대로 묶이는 날이면 일도 모두 글러지려니와 또한 영호의 일생의 대 수치다.

이렇게 생각하매 분한 생각에도 참을 수가 없다.

그는 괴한이 결박을 지으려고 잠시 누르는 힘을 늦추는 기회를 타서 만 신의 기운을 다하여 몸을 비틀어가지고는 이어 발길로 차내던졌다.

쿵 하고 마루에 나가떨어진 괴한은 황소와 같이 식식거리며 다시 덤벼 든다.

그러나 인제는 안될 말이다. 어두운 속에서도 겨냥을 대어가지고 내 뻗치는 영호의 주먹에 퍽 소리가 나며 또 한번 쿵 하고 마룻장이 울린다. 그러고는 부스럭 거릴 뿐 다시 덤벼들지 못한다.

 

영호는 싸움통에 회중전등을 잃어버린지라 손 재게 성냥불을 그어대었다.

혹시 다른 일파의 한 사람인가 하였더니 '헙수룩한 사나이.

누가 되었든지 간에 붙든 것만 다행이다.

그는 눈에 살기를 띠고 영호를 흘겨보며 부스스 일어나려 하였다.

영호는 달아나는 것처럼 방으로 들어가서 우선 전등을 켰다.

'헙수룩한 사나이는 식식거리며 육박을 한다.

영호는 위엄 있게 나무랐다.

"이렇게 싸울 때가 아니야. 잠자코 내 말을 들어."

'헙수룩한 사나이는 잠깐 몸을 멈추고 영호를 노리어보다가 목이 갈린 소리로 묻는다.

"너는 누구냐?"

"? 나는 백영호."

이 말에 그는 갑자기 놀란 눈을 흡뜨고 영호를 바라보는 것이다. 아까 그 악당들이 동소문 밖에서 처치했다는 ── 죽였다는 백영호라는 자가 저렇게 피 둥피둥 살아왔느냐 싶어 놀란 것이다.

"죽었다는 배 백영호가?"

"누가? 누가 그러는데 백영호가 죽었대?"

"그놈들이…… 동소문 밖에서 자동차를…… "영호는 비로소 오복이가 그 악당들의 해를 입어 그렇게 된 줄을 알았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속으로 이를 갈았다.

"백영호는 그렇게 만만히 죽지 아니해…… , 어쨌거나 내가 해하러 온 사람이 아닌 줄은 이만하면 알겠지?"

그는 말이 없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면 어서 바삐 여기 있는 중요한 짐을 가지고 나를 따라나와요, 빨리."

그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깐 주저하였다.

아마 노인이 이곳으로 오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 눈치를 영호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노인은 인제는 여기를 오시지 못해요. 그러니까 기다렸자 또 그 놈들이나 만나 봉욕을 할 테니 빨리 짐을 가지고 나와요."

이 말에 그는 와락 달려들어 영호의 팔을 잡고 울듯한 소리로, ──"영감님 어떻게 되셨수?"

"글쎄 여기서는 자세 이야기할 수 없으니 빨리 나와요."

그는 할 수 없이 두 개의 트렁크를 집어 들으려고 하는데, 보니까 다리를 절름절름하고 옷에 피가 묻어 있다.

영호는 그와 협력하여 중요하게 보이는 짐만 챙겨가지고 차를 몰아 올라오다가 다시 예전 측후소 앞에서 멈췄다.

우선 마나님네를 두드려 깨워 이상한 손님의 짐을 모조리 내다가 자동차에 실었 다. 마나님은 처음은 반대하였으나 영호의 재산과 인품을 믿고 하는 대로 내맡겼다.

다음은 '그 집으로 가서 담요와 화로를 도로 가져왔다.

영호는 마나님더러 누가 와서 묻든지 그 손님이 짐을 가지고 떠났다고만 대답하라고 당부를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우선 경성자동차부의 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말 몇마디를 긴하게 당부하였다.

다음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고 상준이를 불러내어 오복이가 정신이 드는 대로 이러이러한 말을 하라고 일렀다.

, 인제는 악당의 소굴에까지 붙잡혀갔던 포로가 여기 있고 하니 한시 바삐 그곳을 습격하여 '그 여자를 구해내야 할 터이다.

만일 추근추근하면 저편에서 포로를 놓친 관계로 역습을 두려워 자리를 옮길지도 모르는 것이다.

'헙수룩한 사나이에게 묻고 싶은 말은 태산 같다. 그러나 우선 어디로 잡혀갔던가 하고 물어보았다.

김 서 방 1 헙 수룩한 사나이 ——— 인제는 우리도 그를 그의 이름대로 김서방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 김서방은 멍하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모르겠어요."

하는 것이다.

"몰라? 붙잡혀 갔든 데를 붙잡혀 갔든 당자가 몰라?"

영호에게는 모른다는 김서방의 대답이 곧이들리지가 아니하였다.

"…… 갈 때는 정신이 없이 갔었고 도망할 때는 내 발로 걸어는 나왔지만 원체 서울에 발이 선데다가 밤이 돼서."

그렇다면 혹 그럼직도 한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광화문 앞 전차 네거리로 나온 것은 알겠어요."

영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도 자기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재료를 제공한 다.

"——— 높은데다 지은 큰 벽돌집인데……서울 장안이 환희 내려다 뵈구…… "영호는 듣고 있다가 일어나서 우선 김서방의 다리의 상처를 손대어 주었다.

탄환이 스치고 지나갔을 뿐 그다지 큰 상처는 아니었었다.

때는 벌써 세시가 지났으나 영호는 유여치 아니하고 김서방을 데리고 다 시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면서 영호는 변장할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였다.

얼굴 모습을 조금 고치고 감장 쓰메에리 양복을 입고 모자까지 운전수 모자를 썼다.

김서방은 시골 사람처럼 조선옷을 부스스하게 입히고 그러고 병자처럼 보이게 하느라고 단장을 손에 들리었다.

아프기도 하려니와 미상불 단장을 의지하여 절름거리며 층계로 내려가는 꼴은 그럴 듯하다.

몸에 제가끔 독와사 펌프와 회중전등을 숨기고, 또 저편이 피스톨을 함부로 쏘는 줄 아는지라 영호가 전에 고심하여 구해둔 방탄(防彈)조끼를 하나씩 속에 입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이만하면 준비는 완전무결이다. 저편에도 용이히 간파를 아니 당할 뿐 아니라 파출소 같은 데서 취체를 당하더라도 운전수 면허증까지 빌려온 터이니 트집잡힐 일이 없는 운전수요 손님이다.

자동차로 우선 광화문 네거리에 당도하였다.

김서방을 앞세워 놓고 방향을 찾게 하였다.

김서방은 한동안 서서 둘러보다가 절름절름 걸어간다.

체신국 뒤로 해서 개천을 메워가지고 새로 낸 큰길이다. 그것을 본 영호는 김 서방을 불러 태우고 큰길을 그대로 달리었다.

더 생각하거나 찾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오복이가 문제의 감찰 없는 인력거를 발견한 것이 누상동 큰거리라고 했으니까. 그러면 이제는 언덕 위에 지은 큰집만 찾아내면 그만이다.

큰길 끝까지 다다랐다.

이 근처에는 인왕산 밑 언덕배기에 많은 문화주택들이 새로 들어서 있다.

그러니 그 어느 것이 김서방의 말한 서울 장안이 환히 내려다보이게 높은데 지은 큰 벽돌집인지 분간해내기가 어렵다.

영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갑자기 김서방을 손을 잡아 끝고 어두운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러저리 구부러져 다시 넓은 언덕길을 올라가게 되었다.

"여깁니다."

김서방은 비로소 알아내고 영호에게 가만히 속삭인다.

세상 사람이 다 아는 ×별장이다.

영호는 오복이가 누상동 거리에서 인력거를 발견했다고 할 때부터 이 × 별장을 마음속에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한 가정에 지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서방이 이 길로 인도를 하겠다, 또 서울 장안이 환히 내려다 보이는 큰 벽돌집이라고 했으니. 그러면 이 집밖에는 다른 집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 만일 김서방이 자기가 감금당하여 있던 방의 모양을 어쩐지 짓다가 만 것 같더라고까지만 미리 말했어도 찾아내기에는 더욱 용이하였을것이다. 좌우간 빈 집이겠다 지하실이 있겠다 해서 악당들에게는 안성 마춤이다.

두 사람은 구두를 벗어 길 옆에 놓고 조심조심 언덕길을 다 올라갔다.

널따란 정원이 나서고 그 뒤로는 그야말로 큰 벽돌집이다. 왼편으로 돌아가면 지하실로 내려가는 층계다.

두 사람이 막 집 모퉁이를 돌아설 때에 지하실 층계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쑥 나와 가지고는 이편으로 돌아서다가 주춤하고 발을 멈춘다.

그의 손에는 큼직한 꾸러미가 들리어 있다.

2

시커먼 그림자는 멈칫 서서 이편의 동정을 살핀다.

영호는 김서방에게 지하실 층계를 경계하라고 귓속말로 빨리 이르고 척척 앞으로 걸어나섰다. 검은 그림자는 뒤로 물씬물씬 물러선다.

영호가 와락 덤벼들려고 하는데 어느결에 저편에서 푸식 하고 시뻘건 불이 뛰어나온다.

쏘았으니 넘어졌으리라고 안심하고 저편은 또 하나 남은 사람을 쏠 요량인데 그러나 그는 총맞은 사람 ——— 영호에게 덮여 눌리고 말았다. 모두 번개 같은 일순간의 일이다.

영호는 어렵잖게 팔을 홱 비틀어 가지고 피스톨을 뺏어들었다.

영호는 지하실로부터 여당이 몰려나올 것이 염려되므로 우선 붙든 하나를 김 서방에게 맡기었다.

 

김서방은 포로의 두 팔을 등 뒤로 비틀어 쥐고 앉아 있고 영호는 빼앗은 피스톨을 한손에, 또 한손에는 회중전등을 들고 지하실의 철문을 바스스 열었다.

물큰한 습기 냄새가 코를 찌를 뿐 그냥 캄캄하다.

영호는 피스톨 쥔 손에 힘을 주어가지고 대담스럽게 회중전등을 눌렀다.

푸른 불빛이 둥글게 뻗치어나가 마주치는 곳에 유리창이 보인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직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영호는 잠깐 멈춰서서 동정을 살피다가 그대로 걸어들어갔다.

유리창이 보이던 곳에까지 와서 회중전등 빛으로 속을 굽어다보니 텅 비었다.

사람들이 거처한 자국은 남았으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다.

영호는 옆에 있는 도어를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시멘트 바닥에 가마니 조각이 깔리고 한편 구석에는 시멘트 묻은 괭이가 놓여 있다.

벽은 먼저에 김서방이 발견한 대로 짓다가 중지한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촛불 켜던 자국이 있고 담배 꼬투리며 귤껍질 같은 것이 흩어져 있다.

그러나 그 밖에는 아무것도 특이하게 단서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다.

영호는 그 방에서 다시 나와 왼편으로 꺾인 복도를 걸어갔다.

벽에 세 개의 철문이 있다.

처음치를 자물쇠를 비틀어 열고 보니 공사에 쓰던 도구가 어지러이 흩어져있을 뿐 찬바람만 휙 얼굴을 스친다.

둘째치에는 역시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기는 하나 한편 구석에 가마니가 펼쳐 있다.

여기에 사람이 감금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다음치 ——— 여기는 김서방이 감금되었던 것이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보았으나 촛불 켰던 자리가 있을 뿐 먼저 방과 다를것이 없다.

영호는 그 방을 나와 회중전등을 한바퀴 휙 내두르노라니까 복도의 막 다른 곳에 철문이 또 한 개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밀치고 들어서니까 두 가지의 색다른 향기가 코에 맡아진다.

하나는 값비싼 담배 냄새요, 하나는 고급 화장품이 여러 가지가 혼잡 되어가지고 나는 사치하는 여자에게서 맡을 수 있는 독특한 향내다.

영호는 뛰는 가슴을 누르면서 전등불을 비추어 보았다. 그러나 불 켰던 초 가 한 토막 나무통에 꽂히어 있을 뿐 네 닢이나 펴놓은 가마니 조각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한다.

영호는 촛도막을 손끝으로 집어 회중전등불에 비치어 보다가 손수건에 싸서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가마니를 편 근처에는 담배 금강이며 트리캐슬 같은 것을 비벼버린 꽁초가 많이 굴러져 있다.

영호는 전등불을 비추어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다가 드디어 기다란 머리털을 두 개 얻어내었다.

머리털과 향내…… 이 두 가지는 확실히 이 일당 가운데 여자가 끼여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밖에는 다른 방도 없고 더 조사할 것이 없다.

일당이 어디로 일을 하러 나갔던지 그렇잖으면 자리를 뜬 것이다.

그러나 한 놈 포로가 있으니 그를 잡아가지고 가서 족치리라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이건 또 웬일! 지키던 김서방도, 붙잡힌 포로도 보이지 아니하는것이다.

3

영호는 회중전등으로 땅바닥을 비춰보았다.

발자국이 요란스럽게 흐트러지고 방울방울 피흘린 흔적이 있다.

한편을 보니 아까 그 괴한이 들고 섰던 꾸러미가 굴러져 있다.

그러자 등 뒤에서 발짝 소리가 들리었다.

김서방이 손으로 코를 잔뜩 우디고 설설 기듯이 절름거리며 이편으로 오는것이다. 충분치 못한 회중전등불이건만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흐르는 것 이완 연히 보인다.

"웬일이야!"

"달어났세요."

"네끼! 밥버러지."

영호는 홧김에 욕을 해주었다. 김서방은 대답도 못한다.

"어떻게 하다가 놓쳤어?"

영호는 그대로 애처로와서 휴지를 내어주며 조금 어성을 부드럽게 물었다.

그것은 실상 김서방으로는 부주의도 못생긴 탓도 아니었었다.

김서방은 뒤로 비틀어 쥔 포로의 두 손목을 꽉 붙잡고 있는데, 처음에는 잘 잡고 있더니 차차 몸을 비틀며 용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뒤로 콱 젖히는 바람에 김서방은 코가 깨지고 매운 눈물과 코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 서슬에 한편 손목은 놓쳤지만 그래도 한편 손목은 놓지 아니하고 이편에서 역습을 하려 하는데 이번에도 어느 겨를에 몸을 돌렸는지 포로의 곧은 발길이 김서방의 동감을 내리질렀다.

할 수 없이 한편 손을 마저 놓치고 일어서서 뒤를 좇았으나 종적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영호는 입맛을 다시었다.

악당의 일파는 벌써 위험을 짐작하고 자리를 뜬 것이다.

영호는 저희가 자동차를 전복시켜 죽인 줄 알았지만 김서방은 살아서 달아났고 그런데다가 노인을 죽이기까지 했으니 김서방의 활동으로 경찰의 손이 미쳐 올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일파들은 미리서 떠나고 하나가 뒷수습을 하느라고 남아 있다 가영호에게 붙잡힌 것인데, 그마저 놓쳐버렸으니 인제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다.

서울이 좁다 해도 인구가 사십만이요 집이 십만 호가 넘는다.

그런데 이 속에다 신출귀몰하는 악당의 무리를 또다시 내놓았으니 실내 끼만한 단서도 없이 어떻게 그들을 찾아내며, 따라서 어떻게 '그 여자를그들의 수중에서 구해내랴!

영호는 발을 구르고 싶게 안타까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지난일을 후회만 하고 있었자 소용이 없는 것이다.

영호는 괴한이 버리고 간 꾸러미를 집어들었다. 큼직한 책보에 쌌는데 그다지 무겁지는 아니하다.

김서방은 쪼글트리고 앉은 채 일어나려고도 아니한다.

"일어나요, 가게."

"저는 안 가요."

"?"

"여기서 지키다가 그놈들을 잡을 테여요."

영호는 서글퍼서 웃었다.

그러나 그 순직한 품이 영호의 마음에 들었다.

"그놈들은 여기는 절대로 오잖아요…… 다 떠짊어지고 이사를 갔는데 웬걸 오나!"

"어데로 갔어요?"

 

영호는 다시 웃었다. 노인과 그 여자가 이 인간을 데리고 일을 하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으랴 싶었다.

"그걸 알면 좋게!"

영호는 그가 그래도 아니 움직이려는 것을 반은 강제로 반은 달래어 겨우 데리고 내려왔다.

인제는 최후로 남은 것이 김서방의 입으로부터 그들 부녀에 관한 이야기와 사건의 내용을 알아낼 것…… 그래서 간접적으로 지금 싸우고 있는 상대자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얻어낼 것밖에는 남겨진 수단이 없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네시가 지났다. 영호는 대학병원에 또다시 전화를 걸어 오복이의 병세를 알아보았다.

그런 다음 그는 우선 김서방에게 위스키를 두어 잔 먹이어 정신을 가다듬게 하였다.

4

김서방을 잠깐 정신을 가다듬게 하느라고 위스키를 먹여놓고 그동안에 영호는 ×별장에서 얻어가지고 은 촛도막의 지문을 검사하여 보았다.

바른편 엄지손가락과 무명지의 지문이 전연히 박혔는데 줄의 섬세한 것과 손가락이 가는 것으로 보아 여자의 것일시 분명하였다.

그리고 두 개의 머리털을 현미경으로 검사해본 결과 그것은 삼십으로부터 사십 세까지의 아직 정력이 왕성한 여자의 것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일당의 수령이 여자가 아니면 적어도 여자를 데리고 다니는 수령인 것을 넉넉히 짐작할 수가 있다.

실험을 마치고 응접실로 돌아오니 김서방이 얼굴이 벌개가지고 오 꼼하니 앉아 있었다. 그도 웬만하면 여러 날의 많은 피로와 정신이 타격으로 해서 잠이 왔겠지만 원체 흥분이 된 터라 눈이 또렷또렷하다.

영호는 우선 노인의 성명을 물었다.

그러나 김서방은 그 두터운 입술을 벌리려고도 아니하고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시골이 어디냐고 물어도 역시 그러하다.

아무것을 물어도 그 모양이다.

"? 왜 대관절 대답을 아니하느냔 말이야?"

영호는 역정이 나서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표정이 둔한 그의 얼굴은 변하지도 아니하고 겨우 대답한다는 것이 "영감님서 껀 아가씨서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되구 그랬지오니까."

"고향이 강활세그려?"

영호의 이 말에 김서방은 놀란 듯이 고개를 든다.

강화 사람이 '서껀이라든가 '오니까라든가 하는 사투리를 잘 쓰는것을 영호가 알므로 넘겨짚어 본 것이다.

"거 봐? 말 아니해도 내가 알어내잖어?"

김서방은 아무 말도 아니하고 고개를 숙인다.

"인제는 영감님도 돌아가셨고 하니까…… "이 말에 김서방은 엥! 소리를 치고 펄쩍 뛴다.

"돌아가섰세요?"

"그럼."

"나는 영감님 달어나시라구 그랬는데, 나는 되려 달어나고 영감님은…… "하다가 그는 앞 탁자에 푹 엎드려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것이다.

뚝배기보다는 장맛이 낫더라고 그중에도 전등을 폭발시키고 그들과 어우러져 싸우면 영감이 달아날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제법이다.

그러나 그 꾀는 도리어 실패하고 비극을 빚어낸 것이다.

김서방이 울고 있는 것을 보니 그 우는 모양이 우습기는 하나 한편 역시 비감한 마음이 들어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았다.

김서방은 한참 울다가 미친 듯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놈들을, 그놈들을 붙잡기만 하면 그저 간을 씹어먹을 테야!"

"그래 그래."

하고 영호는 그의 말을 받았다.

"붙잡어야 하고말고…… 또 아가씨도 어서 구해내야 하고…… 그러니까 영감님이랑 아가씨랑 아무한테도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그건 해치려는 사람한테 말이지 나같이 도와주려는 사람은 묻기 전에 되려 이야기를 해주어야지…… 응 그렇잖어?…… 글쎄 영감님이 돌아가신 것도 큰일인데, 더구나 아가씨가 저렇게 잽혀갔으니 어쩔 테야?"

김서방은 울음을 그치고 주먹으로 부은 눈을 씻고 나서 한동안 까막까막 생각 하였다. 영호는 유도신문(誘導訊問)의 방식을 따라 우선 오늘 저녁 이야기부터 물었다.

김서방은 그가 도망해 나오던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동차를 타고 달아나는데 또 한 대 자동차가 따라오다가 없어지고 화물차가 쫓아왔다는것, 그리고 그것이 필경 악당의 꾀에 넘어간 것이란 것, 그들의 습격을 받아 인제는 옴도 뛰도 못하게 생겼으니 자기 하나 죽을 셈 치고라도 한바탕 부스댄 것이 영감님이 그와 같이 해를 입었다고 하며, 또다시 눈물을 흘린다.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노인과 그 여자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 나중에 아가씨더러 자기에게서 들었다고 하지 말라는 부탁을 단단히 한 뒤에.

5

"영감님 성명은?"

영호는 위스키 한잔을 더 부어주고 자기는 식모가 가져다 주는 홍차를 집어 들었다.

김서방은 위스키를 들이켜고 나서 대답을 한다.

"성은 이씨고 함자는 재자(在字) 석자(錫字)여요."

"이재석씨? …… 그러고 아가씨는?"

"학희, 배울학자 계집희자."

"응 학희 학희…… 어찌 학학자를 쓰잖았을까?!"

영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고향은?"

"강화(江華)예요…… 바로 부내지요."

"그런데 지금까지 강화서 살았나?"

"아니요…… 그때가 그러니까 제 나이 ——— 제 성은 김가요 이름은 대성이라고 영감님이 지어 주섰지요 ——— 제 나이 열여덟 살 때니까 발써 십 오 년이나 됩니다…… 그때 떠나섰지요."

"어데로?"

"모르지요…… 떠나신 뒤에 누구는 청국(中國)으로 가섰다기도 하고 누구는 양국(洋國)으로 가섰다고 그랬으니까…… 그때 참!…… 도무지 웬 일로 그리 섰는지 모르겠어요!"

김서방은 한숨을 푸 내쉬고 자못 감개로운 듯이 옛일을 추억하는 눈으로 한눈 질을 하며 말을 계속한다.

"저는 그때 영감님 ——— 그때는 나리님이지만 ——— 그 어른 덕에 서울 와 서한 일 년이나 학교에 다녔더랍니다. 아마 배재학교지요…… 그 어른은 일 즉 개화를 하시고 또 예수를 믿으섰지요. 참 착하고 어즈신 어른이지요…… 제가 글 쎄 세 살 때 어미아비를 잃고 의지가지 없이 된 것을 데려다가 꼭 당신님 아들같이 길러주섰답니다…… 글방에 보내주시고 학교에 보내주시고 그러고 서울까지 공부를 보내주시고…… 실상 그 어른이 아드님이 없으 섰어요. 초취 아씨한테서 지금 학희 아기를 보시고는 상처를 덜컥 하섰지요. 아기가 제 돌 잡히든 해지요 아마…… 그러고 나서 서울로 재취장가를 드섰지요. 재취아씨는 그때 학교 졸업을 하신 신식 아씨였어요. 그러고 그이가 시집 온 게 열아홉인지? 어쨌든 저보담 두 살인지 한 살인지밖에 더 자시진 안 했어요…… 신랑이 나이 많고 신부가 나이 적으면 무척 귀애하시는 게 아마어 데나 일반인지 나리님이 새아씨를 귀애하시는 품이란 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안허시게 귀애하섰지요…… 그런데 하로는 곧 내려오라는 편지를 하 섰길래 부랴부랴 내려가 보니까 짐을 꾸려노시고는 인제 당신은 멀리 가시니 학비를 대줄 수가 없다고 그렇게 말씀하시겠지요. 하도 섭섭해서 울으니까, 돈 백 원을 주시면서 당신도 인제는 가난해서 좀더 주고 싶으나 할 수 없다고 그러시겠지요. 그러고 이 돈으로 밑천이나 삼어 인천 같은 데 가서 장사나 해먹고 살라고…… 그러시고는 그 이튿날 종적도 없이 그냥 떠나 바리 섰지요."

김서방은 이야기를 끊고 또다시 한숨을 푸 내쉰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말을 계속한다.

"그때 그런 일만 없었어도 내가 지금쯤은 공부를 해서 내 신세도 괜찮았을 텐데…… 그래 저는 그 뒤에 바로 인천으로 와서 그 돈 백 원으로 장사를 했지요. 그렇지만 인제 열여닯 살 먹은 놈이 전에 해보지 못한 노릇을 어떻게 하겠읍니까? 얼마만에 밑천을 털어먹고 그때부터 일본집 심 부림꾼으로 음식점 더부살이로 선창 도까다로 별별 짓을 다하면서 인천바닥에서 이 날 이때까지 살어왔지요…… 그러다가 작년 이맘때쯤해서 강화 다니는 똑딱선( 發動機船[ 발동 기선]) 선창에를 볼일이 있어서 나갔더니, 아 그 어른 이배에서 내리시겠지요! 첨에는 몰라뵈었어요. 인제 그 어른이 마흔 아홉 이 신 데 그러고 떠나실 때는 펄펄한 젊은 어른이섰는데…… 그러고 등 뒤에는 겨우 알어보게 생긴 학희 아가씨가 아주 다 자란 처녀가 되어 가지고 따라 나리 시고…… 두 분도 저를 겨우 알어보시고는 무척 반가워하시겠지요!"

"그러면?……"

하고 영호는 중간에서 말허리를 끊고 물었다.

"그러면 그 재취한 부인은?"

", 그이요…… 그이는 그때 같이 가시잖앴어요…… 내가 그때 서울서 내려갔을 때 보니까 집에 아니 계섰어요."

"어데 가고 없어?"

"모르지요."

 

영호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그 재취부인 성이 무어야?"

하고 물어보았다.

"()씨지요 아마…… "영호는 무릎을 딱 치고 고개를 여러 번 끄덕거렸다.

6

이재석이라는 그의 집은 생각컨대 재산도 있고 명망도 있어 비교적 안정 된 가정 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그가 안해 ——— 지극히 사랑하는 젊은 안해와 고향을 버리고 멀리 외국으로 갔다는 것과 이번 악당의 일행 중에 중요한 인물이 여자라는 것과 또 손가락을 싼 소포 껍질에 그 안해이었던 서가의 성이 씌어 있다는 것 등의 세 가지 사실로 미루어 우선 이번 사건의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여자에 관한 것이라는 추측을 내릴 수가 있다.

즉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이재석이라는 사람이 사랑하는 안해에게 배반을 당하고 그처럼 외국으로 떠났다가 지금 돌아와서 복수의 행동을 취하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렇다고도, 또는 그렇지 아니하다고도 단안을 내 리기에는 모든 재료가 너무도 빈약하다.

일이 그와 같이 단순하다고 보기에는 지금의 사건이 너무나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성을 띠고 있으니까.———

영호는 김서방의 그 다음 말을 재촉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김서방은 그곳에서 옛주인 부녀를 조용한 여관으로 안내하였다는 것으로부터 다시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그때부터 옛날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갔다.

김서방은 옛주인에게서 많은 변화를 발견하였다.

첫째 그가 나이보다 훨씬 더 늙은 것은 물론이요, 옛날에 그다지도 평화롭고 마음 착하던 그가 몹시 음험하며 매정스러운 성질을 가끔 보이게 된 것과 왼편 엄지손가락이 없어진 것이다.

그밖에 십오 년 전에 떠날 때에는 그가 말한 대로 갑자기 가난해서 그랬는지 행색이 매우 초라하였는데 이번 돌아와서는 돈을 물쓰듯 하는 것이다.

그 뒤 그들 일행은 서울로 올라와서 며칠 묵은 뒤에 김서방에게는 도저히 이해 하기 어려운 여행을 시작하였다.

 

평양으로 신의주로 진남포 원산 함흥…… 금강산 춘천.

그리고 남쪽으로는 대구 부산 목포 군산…… 조선 십삼도의 중요한 도회지라고는 아니 가본 곳이 없이 다 돌아다니었다.

전라도 군산과 김제라는 곳과 또 삼방과 석왕사 여주는 모두 두세 번씩이나 갔었다.

그러다가 필경 서울로 다시 돌아온 것이 지금으로부터 한 보름 전이다.

서울로 올라와서도 별로 하는 일은 없었다.

그저 기껏해야 아침에 두 부녀가 계동 중앙학교 뒷산으로 산보하러 가는것 쯤 이었었다.

그러더니 하루 아침은 산보하러 나갔던 그들의 얼굴이 둘이 다 새 파랗게 질려가지고 돌아왔다.

그들은 방에서 편지 ——— 온 사이가 없는데 웬 편지인지 내어놓고 재삼 읽으면서 그렇게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무서워하는 한편, 또 한편으로는 성난 눈이 불붙듯 황황 타고 이를 북북 가는 것이다. 학희는 그렇지 아니하지만 노인이. ——— 그 뒤부터 그들은 갑자기 신변을 몹시 경계하고 또 김서방더러도 무슨 일이 있든지 또는 누구에게든지 자기네 일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가만 있자."

하고 영호가 말하는 중간을 잘라서 물었다.

"그 편지는 그대로 어데다 두었나? 없애바렸나?"

"영감님이 바루 찢어바렸어요. 적반하장이야! 적반하장이야! 하시면서 이를 북북 갈고 편지를 박박 찢으시는데, 아이구 나는 그 어른이 그렇게 무섭게 구시는 건 생전 처음 봤어요."

"그런데 익선동서 붙잡어간 사람 ——— 손가락 자른 사람은?"

"네 그이요…… 그이 붙잡어가든 일을 생각하면 참 신통하지요…… 아가씨가 저더러 인력거를 가지고 교동 어귀에서 기다리다가 어떻게 해서든지 태워가지고 '그 집으로 오라고 그리세요…… 그래 시키는 대로 교동 어귀에서 기다리니까 비가 축축히 오시는데 그이가 비를 맞으면서 전차에서 내리시더니 타라고 하기 전에 인력거 이리 와 ——— 하고 부르겠지요…… 그래 가니깐 응!! 자넨가? 하고 머밋머밋하시드군요."

"? 그러면 전부터 알든 사람인가? 누구야?"

지금 그 '이상한 손님의 근지를 안다는 것은 여간한 큰 발견이 아니다.

영호는 급한 마음에 김서방에게로 바싹 다가앉았다.

 

7

"알구말구요!"

김서방은 자랑스럽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이가 바로 영감의 이종 되시는 이랍니다. 영감님 재취아씨 중매도 그이가 스신걸요."

영호는 부지중에 무릎을 탁 치면서 혼잣말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성명은 무어야?"

"유씨지요. 유대 설씨라고…… "영호는 연해 고개를 끄덕거리며 서광옥…… 유대설…… 이라고 소포에 쓰인 두 이름을 중얼거렸다.

김서방은 그뿐 아니라 그 이상한 손님인 유대설이를 맨처음 서 울 거리에서 발견 하였다.

잠깐 심부름이 있어서 옷도 갈아 입을 사이가 없이 교동 어귀까지 나갔었는데 그곳에서 그와 무뜩 만났다.

수염이 많이 나기는 하였으나 갈데없는 그인지라 김서방은 반가이 인사를 하였다.

그랬더니 그는 처음은 모르는 체 하다가 "응 대성이 …… 참 오래간만이군. 지금 무얼 하나?"

하고 물었다.

김서방은 사실대로 댈 수는 없고 마침 땟국이 묻은 바지저고리를 입은 터라 "병원에서 인력거를 끝어 먹읍니다."

고 둘러대었다.

그와 갈린 뒤에 여관에 돌아가 그 말을 하니까 부녀가 기뻐하는 품이란 여간 아니었었다.

그 뒤에 학희는 며칠 동안 밤으로 늦게 나다니더니 김서방을 시켜 익선동 그 집을 세로 얻게 하고 또 인력거 헌 것을 사다가 정말 인력거꾼을 만들었다.

그를 붙잡아 오던 날 밤 유씨는 김서방의 인력거를 타고 올라가면서 "이 거 남의 자가용 인력거를 이렇게 타서 안됐군!"

하기도 하고 또 "이 사람 혹시 누구 만나더래도 내가 여기 있더란 말은 말게."

하고 당부를 하였다.

그 다음 사실은 영호도 잘 아는 터이다. 그러나 더 알고 싶은 것은 그 유씨와 노인 간에 오고가고 한 이야기다.

그러나 김서방이 보기에도 바로 몽혼마취를 시켜 묶어놓고 손가락을 잘랐고 그러고는 깨어난 담에 부녀가 무어라고 그와 이야기를 하였으나 밖에서는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김서방은 이야기를 다 마치고 자못 피곤한 듯이 눈을 감았다.

"그런데 …… "하고 영호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 재취아씨가 친정이 서울 어데며 학교는 무슨 학교에 다닌지 몰라?"

"학교는 몰라도 친정댁은 양사골이 어덴지 양사골이라고 들었어요."

영호는 그만해 두고 김서방을 아래층 상준이의 방으로 데려다 주고 편히 쉬게 하였다.

영호는 다시 이층으로 올라와 두 곳에서 집어온 짐을 뒤지었다.

여러가지 자세히 뒤져보고 싶은 것이 많으나 우선 급한 것은 사진이다.

필경 찾는 사진이 나왔다. 학희 편의 트렁크 속에서 꺼낸 앨범에 노인의 젊었을 때인 듯이 모습이 같은 젊은이가 그때로 하면 모던걸로 차린 여자와 박은 사진이 한 장 붙어 있다.

상상한 바와 같이 요염하고도 독부형으로 되었다.

영호는 실컷 바라본 뒤에 두 편의 집이며 영감님의 외투 그 밖에 이번 사건에 수집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전부 침실로 가지고 들어가더니 감쪽같이 어디다 숨겨버렸다.

그는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어 상준이더러 인제 밝는 아침 일찍 종로 사정 목 ××양화점에 가서 '부르독꾸를 찾아가지고 동무를 데리고 계동으로가라는 전갈을 하라고 이른 뒤에 비로소 침대 속의 사람이 되었다.

잠깐 눈을 붙이노라니까 새벽같이 달려온 게 주먹코의 일행이다.

——— 지금으로부터 십오륙 년 전에 강화로 시집간 서 무엇이라고 하는 여자가 서울서 어느 학교에 다녔으며, 그 집안의 그 뒤의 종적을 양사골 일대에가 서 알아오라.

이것이 영호가 돈 오 원씩과 한가지로 내어준 분부다.

영호는 다시 침실로 들어가 늘어지게 한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후 한시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김서방이 자고 있는 것을 굽어다 보고 나오느라니까 마침 찾아온 이가 ×××경찰서의 형사 두 사람이다. 이번은 진짜 형사다.

좌우 협공 1 하나는 일본 사람이요, 또 하나는 조선 사람이다.

그들은 잠깐 물어볼 말이 있으니, 본서까지 가자고 정중하게 청을 한다.

한시 한분이 가까운 지금 경찰서에까지 불려다니기가 몸 괴로운 일이나 어쩔 수 없는 터라 그는 옷을 갈아 입고 나섰다.

어젯밤에 빌려다 탄 택시 ── 가 그대로 있는지라 영호는 두 사람의 형사를 태워가지고 ×××경찰서로 갔다.

동소문 밖 그 집에서 노인, 이재석의 시체가 발견된 것은 의외에도 오늘아침 여덟시였었다.

흥천사의 중이 내려오다가 문이 어지럽게 열린 것이 이상하여 들어가서 굽어 보다가 시체를 발견하고 혼비백산하여 뛰어나왔다.

이어 돈암리 주재소에서 알게 되고 동시에 ×××경찰서가 발칵 뒤집혔다.

서장이 직접 출동을 하고 경찰의와 검사가 출장을 하였다.

경찰의는 죽은 지 열 시간 이내라는 진단을 내리었다.

그리고 원인은 가까운 거리에서 발사한 탄환이 심장의 중심을 바로 관통 한 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연의 부합인지 모르나 시체의 왼편 엄지 손가락이 하나가 없었다. 처음은 몰랐다가 장갑을 벗겨보고야 겨우 그것을 발견 하였다. (영호도 그것은 발견치 못하였었다.)

그러면 이것이 어제 문제된 소포의 손가락 사건과 관련이 있는가? 그러나이 노인의 손가락은 잘린 지가 여러 해 경과된 것인데…… 좌우간 시체는 해부에 붙이기 위하여 바로 대학병원으로 운반하였다.

집 주위와 방에는 아무런 증거 재료가 남지 아니하였다.

발자국들이 여러 개 있기는 하나 모두 모래땅을 디딘 것이라 모형을 뜰 수도 없고, 어느 곳에나 지문조차 남아 있지 아니하였다.

집을 빌린 주인이 나섰다. 한 십여 일 전에 피해자 노인과 젊은 양장한 여자와 헙수룩한 사나이가 와서 월세 육 원씩 석 달치를 내고 빌었는데, 별 로이 사 짐 같은 것을 가져오는 눈치는 보지 못하였다고 진술을 하였다.

이 집주인의 진술로 인하여 경찰의 주목은 양장한 젊은 여자인 학희와 헙 수룩한 사나이인 김서방에게로 집중이 되고 그것이 사건이 결말될 때까지 끝 끝내 끌리어나갔다.

 

물론 노인의 소지품 전부가 없어진 것 같은 것은 단순한 강도의 소위라고 보겠는데, 그러면 이 관찰과 피해자의 동행인들이 살해하였다는 견해 사이에는 해결치 못할 틈이 나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그 집 문앞에 많은 자동차의 타이어 자국 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적어도 네 개의 다른 자동차가 이곳을 왔다가 돌아간 자국이 완연히 남아있다. 넷 가운데 한 개는 그 큰 품으로 보안 화물차인 듯싶었다.

이와 같이 자동차에 의문을 가지게 되자 맨먼저 어젯밤 동소문 옆 언덕에서 굴러떨어진 오복이에게 의심이 가고 동시에 그 사건이 있은 뒤에 현장을 지나다가 전복된 자동차를 발견한 사람 ── 즉 백영호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경찰에서는 먼저 대학병원에 부상 입원한 오복이를 출장 취조 하였다.

오복이는 어젯밤에 영호에게서 상준이를 통하여 가르쳐 준 대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어젯밤 여덟시쯤 되어 그는 자기의 차를 몰고 계동 백영호를 찾아갔다가 그 곳에서 한 시간 가량 놀았다. 그것은 일상 있는 일이니까 경 성 자동차 부에 물어보면 아는 것이다.

한 시간 후에 다시 차를 몰고 내려오는데 계동 중턱에서 웬 노인 하나를 만났다. 수염이 좋고 이상한 모자를 쓴 큰 노인이었었다. 노인은 차가 빈 차인 것을 알았는지 정거를 시키고 돈 삼 원을 선금으로 주면서 오늘 밤 열한시 반까지 동소문 밖 흥천사 들어가는 바른편 언덕배기 외딴 집으로 와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오복이는 그러면 삼 원 벌이가 생긴 터라 자동차부로 돌아갈 것이 없다 고도로 백영호의 집에 가서 놀다가 열한시 정각에 그곳을 떠났다. 동관서 앞서 가는 자동차가 있었고 박석고개에서는 뒤에 화물차가 오는 것을 발견 하였다. 동손문 밖 언덕배기에서 화물자동차에게 길을 비켜주려다가 충돌이 되었으므로 아는 것은 그것뿐이다.──

그러면 자동차가 전복된 현장을 보고 이곳으로 온 사람은 누구냐? 백영호다.

그러면 백영호가 어찌 병원에를 먼저 오지 아니하고 현장에를 먼저 갔을까?

이 점에 있어서 영호는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2

사건이 살인사건인만큼 ×××서의 서장이 중요한 피의자며 관계자를 직접 취조 하였다.

오복이의 청취서를 떠들어보면서 서장은 영호의 진술을 듣고 있다.

── 어젯밤 오복이가 여덟시에 왔다가 한 시간쯤 놀고 돌아가더니 다시 돌아와서 열한시까지 놀다가 돌아갔다.

열두시 반 가량 해서 경성자동차부의 주인이 오복이가 동소문 옆 언덕 배기에서 차가 추락이 되어 중상을 당하였다는 전화를 해주었다.

그래 놀라, 그러면 자동차를 한 채 보내달라니까 주인이 손수 운전을 해가지고 왔다. 마침 차가 다 나가고 없기 때문에 자기가 왔노라고.──

그래서 주인은 전방이 비었다고 돌아가고 영호는 차를 몰아 현장으로 갔다. 현장으로 먼저 간 것은 그때 이미 부상자를 병원으로 보냈다는 말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장에 가보니까 아무도 없고 추락된 차만 있길래 동리 사람을 깨워 그것을 부탁하고 바로 동소문 파출소에 들러 대학병원으로 와서 오복이를 보았으나 중태이므로 말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였다.

영호의 진술에 대하여 경찰에서는 경성자동차부의 주인과 영호가 주소 성명을 대어주는 동소문 밖 그 사람을 불러다가 물어보았다.

아무런 착오가 없이 영호와 오복이의 진술을 이서(裡書)하는 진술을 하였다.

물론 영호와 오복이의 진술은 빈틈이 많았다.

가령 어젯밤의 그 노인과 오복이와의 교섭을 무엇으로 실증하느냐?

또 영호는 그러면 왜 경성자동차부의 차를 그 길로 돌려보내지 아니하 고집에다 두었느냐?

또 영호가 대학병원서 자동차를 몰아 시내로 들어오지 아니하고 다시 동소문 편으로 나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나서거나 종묘 앞에서 그를 경 성 자동차 부까지 태워다 준 운전수가 나선다면 연극은 파탈이 나고 말것이다.

그러나 영호는 만일 그렇게 되는 날이면 모든 사실을 털어내놓고 되레 편하게 활동하겠다는 심산이 있으니까 태연무사하였다.

영호는 오후 네시나 되어서 ×××경찰서로부터 놓여나왔다.

그는 그 길로 대학병원에 들리어 오복이를 만났다.

어젯밤보다 알아보게 기운이 소생되었다.

간호부와 쓰끼소이가 있기 때문에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하고 내일쯤 퇴원 하여 집에 나와 누웠으라는 말을 이른 뒤에 집으로 돌아왔다.

영호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자기 아버지가 그와 같이 죽고 경찰의 혐의조차 자기의 몸에 돌아가고 있는 이때에 그는 지금 어디서 무슨 고초를 겪고 있나 싶어 마음이 못견디게 비참하여졌다.

자동차를 가져다 줄까 생각하다가 또 쓸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그대로 집으로 몰고 올라왔다.

가형사패의 키 큰 치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 강화로 시집을 갔다가 소박을 맞고 돌아왔는데 어디로 간지 모르고 그 집안도 행방을 모른다.

이것이 그의 보고다. 영호는 알아오라니까 모른다는 소식을 가져온 것이 우습고 싱거워서 더 자세 알아오라고 도로 쫓았다.

조금 있다가 키 작은 치가 와서 보고를 한다.

── 강화로 시집을 갔다가 일 년 만에 남편이 버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그도 남편을 좇아 외국으로 간 뒤에는 소식이 없고 집안은 어느 시골로 이사 했으며, 학교는 어느 학교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영호는 그래도 불충분하다고 역시 더 알아오라고 쫓아보냈다.

맨 나중에 주먹코가 주먹코를 벌름거리며 들어온다.

그의 보고는 키 작은 치와 비슷 같으나 그 가족이 내려갔다는 시골 이름을 알아낸 것이 유공하였다. ── 바로 여주읍인데 실상 이것이 원 고향이다.

"! ×)가 난 곳에서 난 보람이 있군!"

영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고 이어 물었다.

"학교는?"

"학교요? 대번 알어냈지요."

하고 주먹코는 한바탕 뽐낸다.

3

××여학교를 다니었다는 것이다.

영호는 주먹코를 집에서 기다리게 하고 바로 ××여학교로 자동차를 몰았다.

××여학교면 더구나 좋다. 대학 동창 하나가 그곳에서 교편을 잡고 있으니까.──

시간을 파한 뒤라 교원들이 대부분 돌아갔으나 남아 있는 사람 가운데 영호가 찾는 K가 섞이어 있었다.

 

"! 탐정님!"

"! 학장샌님!"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영호는 K와 손을 잡으며 서로 농을 섞어 인사를 하였다.

"손가락 사건에 분주할 줄 알었더니 고취(古臭)가 나는 학장샌님을 이렇게 찾어왔으니 대관절 무슨 무슨 바람이 불었나?"

K는 이렇게 허물없는 농을 건네면서 묻는 것이다.

"손가락 사건?…… 우리 같은 명탐정이 그까진 것쯤에 손을 대겠나?

그보담 더 스바라시이한 일이 있는데…… 좌우간 위선 이 학교의 십오 년전으로부터 그 이전 이삼 년 동안 졸업생 명부를 좀 보여주게."

"거 참 탐정다운 주문인데 …… 가만 있게."

K는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서 교우회보 한 권을 가지고 돌아왔다.

십오 년 전이면 즉 이 학교 졸업생 회수로는 팔회 이전이다. 그러니까 그 곳부터 찾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K는 설명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제팔회 졸업생의 부분을 찾아내어 가지고 영호는 손가락을 짚어가며 내려갔다. 그러나 서라고는 보이지 아니한다.

그 다음 칠회 …… 있다. 칠회에 가서 '서광옥이라고 또렷이 씌어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가 없다.

그는 K를 시키어 제칠회 졸업생 앨범을 가지고 오게 하였다.

그 앨범에 있는 서광옥이의 얼굴은 어젯밤 학희의 트렁크 속에서 나온 그 여자의 얼굴과 한 얼굴이다.

원적은 여주읍내요, 현주소는 경성 종로 ×정목 ×××번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영호가 이미 조사한 나머지의 것이다.

"헌데……"

영호는 다 보고 나서 K에게 물었다.

"칠회 졸업생 가운데 그 동기동창들의 소식을 잘 아는 여자가 없을까?"

K는 칠회 졸업생을 죽 한번 훑어보더니 P라고 하는 여자를 짚었다.

"이 양반이면?…… 지금 이 학교에 있고, 또 동창회의 역원이니까 혹 알는지 모르지…… ""지금 학교에 있나?"

"집으로 나갔어."

"집이 어데야?…… 아니 같이 좀 가세."

"남선생이 여선생집 찾어가는 건 금물이야."

 

"별 떫은 수작 다한다! 동경서 연애광으로 다니든 치가 이건 정말 학장 샌님이 됐구나?"

영호는 찝찝해하는 K를 데리고 P라는 여선생의 집을 찾아갔다.

P라는 여선생은 독신이 아니고 남편과 동거하기 때문에 방문하기가 되 레 좋았다.

그의 말을 들으면, 서광옥이는 졸업하던 그 이듬해 강화 사는 부자의 첩으로 되어 갔다. 후취인 것이 분명한데 그는 어떻게 들었는지 첩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원래 돈 많은 사람에게 돈을 바라고 첩으로 간 터라 간 지 일 년만에 갈리어 도로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와서 잠깐 그림자를 보이는가 했더니 바로 종적이 사라져 버렸다. 전하는 말을 들으면 상해 등지로 갔다고 하나 확실한 징험은 없었다.

학교 시절에는 재주가 있고 활발하였으나 성적은 좋지 못하였지만 사람을 주무르는 데 수완이 있어서 그때 한 반의 생도들은 모두 그의 애인( 동성연애) 이요 부하였었다.

만일 선생이 배짱이 맞지 아니하면 무슨 짓을 해서든지 기어코 한번은 골탕을 먹이고라야 마는 성미였었다.

재학 시절부터 그때도 아직 흔치 아니하던 연애를 많이 하였었다. 원체 미인이고 해서 뒤따르는 사람도 많았거니와 골탕먹은 사람이 숱해 많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종적이 없어진 그를 P는 얼마 전에 길에서 문득 만났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오매 영호는 바짝 긴장이 되었다.

4

P라는 여선생이 서광옥이를 만난 것은 약 이 주일 전이었었다.

해가 거진 저물어가려고 하는 저녁땐데 종로 ××상회 앞 전차 정류장에서 전차를 기다리노라니까 저편 길 옆으로 웬 자동차 한 대가 머물러 서서 있고 그 안에는 눈이 부시게 양장한 미인이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보았으나 어쩐지 낯이 익은 듯하여 두 번 보고 세 번 보고 하였다. 그러나 종시 누구였던지 생각이 나지 아니하였다.

조금 있다가 자동차는 서대문 편으로 떠나고 말았다.

P 여선생은 그 뒤에도 그 여자의 인상이 남아 있었는데 우연한 기회에 졸업 앨범을 떠들어보다가 그가 서광옥이었던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나 확언할 수는 없는 것이, 서광옥이면 지금 나이가 적어도 서른 네댓 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동차를 탔던 그 양장한 미인은 비록 모습은 많이 같으나 나이는 기껏 해야 스물서넛밖에는 아니 되어 보였던 것이다. 여자가 옷을 잘 입고 화장을 잘 하면 좀 젊어는 보인다지만 십 년의 차이라는 것은 용이히 속 일수가 없는 것이다.

P여선생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하였다.

영호는 치하를 한 뒤에 그 집을 나와 K를 작별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가형사패 중의 키 큰 치가 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지천을 먹고 도로 쫓겨가서는 이번에는 강화로 시집간 그 여자의 아버지의 이름과 오랍동생의 이름을 알아가지고 왔다. ── 서순규와 서광식.

이어서 키 작은 치가 오기는 하였으나 별다른 보고거리도 없었다.

영호는 그들에게 막걸리값을 주어 돌려보낸 뒤에 대학병원으로 전화를 걸어 상준이더러 곧 돌아오라고 일렀다. 오복이는 그만하면 안심할 수가 있으니까. ── 영호가 아래층 식당에서 저녁상을 받고 앉았으니까 김서방이 그때야 부스스 일어나서 절름거리며 들어온다.

"놈들을 잡어 간을 씹는다는 사람이 왼종일 잠만 자나?"

영호는 농삼아 한 말이나 김서방에게는 가슴이 아프게 들린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다.

"자네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게 …… 괜히 경찰서에서 지금 자네를 잡으려고 드니까."

"왜요?"

"생각해보게 …… 자네하고 학희하고 영감님하고 서이서 집을 얻어 들었는데 영감님은 그렇게 죽고 자네들은 없으니까 아무라도 자네들을 의심 할것이 아닌가?"

"골통을 부서놓지요."

김서방다운 말이다. 영호는 웃으면서 어젯밤의 일을 조롱해 주었다.

김서방도 옆에 앉아 밥상을 받고 저녁을 먹는데 마침 석간신문이 배달 되었다.

신문들은 동소문 밖 살인사건으로 거의 사회면 전부를 채웠다.

그러고 문제의 손가락 사건과는 피해자가 엄지손가락이 한 개 없는 것으로 보아 일맥의 상통점이 있는 것이라는 의미의 기사도 실리었고, 의문의 양 장미인과 젊은이를 전력 수사한다는 것도 씌어 있다.

김서방에게 그 대목도 가리켜 주며 읽으라니까 한참 들여다보더니 원망 스 럽게 신문을 밀쳐버린다.

주인의 원수는 갚기커녕 그런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 장히도 불쾌한 모양이다.

영호는 밥을 먹으면서도 신문을 굽어다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무한히 궁리를 하였다.

필경 무엇인지 단행할 결심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호가 이러한 지 한 시간 후.

×××경찰서에서는 이상한 전화 하나를 받았다.

── 신문을 보니까 동소문 밖 살인사건의 혐의자로 피해자와 동행 하였다는 양장한 여자와 젊은 사나이를 찾는다니 거기 대해서 참고로 기별한다.

그 젊은 사나이는 계동 ××번지 ××호 백영호의 집에 있을 듯하다.

전화는 그뿐이다. 더 말을 물으려 하였으나 뚝 끊어버렸다.

그러자 낙원동 제일여관에서 자기 집에 이번 사건의 인물들이 한동안 유숙 해 있었다는 말을 하러 그 주인이 ×××서까지 출두하였다.

형사대는 즉각으로 영호의 집으로 파송이 되었다.

5

경찰서에서는 그야말로 혈안이 되었다.

사건의 단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

오복이와 영호는 그들의 진술에 의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

조사한 결과 어젯밤 열한시 전에 웬 이상한 사나이를 동소문 밖 그 집으로 태워다 준 운전수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는 자동차부까지 찾아와서 태워다 달라는 대로 태워다주었을 뿐 아무것도 더 참고할 말이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문제의 트럭은?

거기에 대해서도 운전수는 번호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였다.

방금 전 시내에 형사를 흐트려 화물자동차를 조사하는 중이나 그것이 얼마만한 효과를 낼는지 의문이다.

그러는 차에 문제의 밀고전화가 왔다.

대사건이 있으면 투서나 전화로 장난삼아 또는 다른 별다른 목적으로 그러한 것을 하는 일이 많은지라 전연 믿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좌우간 그대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밀고전화를 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것은 영호더러 물으면 대번 '그 악당의 일파라고 서슴지 아니하고 대답 할 터이다.

사실 그러하다.

그들은 어젯밤 옥인동 ×별장에서 영호와 김서방의 습격을 받았다.

그래서 영호가 그를 데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물론 영호가 자동차와 한가지로 낭떠러지에서 굴러떨어져 죽었지 않으면 크게 부상했으리라고 믿었었다.

그런 것이 몇 시간 후에 그 사나이를 데리고 ×별장 ── 이미 자리를 떠났고 뒷수습하던 한 명이 붙잡혔다 달아난 것이지만 ── 을 습격한 인물이 있어 궁금히 여기는 판인데 오늘 석간에 보고 부상한 것은 영호의 부하인 줄로 알았다.

이래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한 그들은 경찰서에 밀고 전화를 한 것이다.

응당 밀고를 하겠으면 그들은 좀더 증거될 만한 재료를 제공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너무 극단에 이르러 영호가 진짜 의심을 받고 취조를 당하는 날이면 그의 입으로부터 그동안의 사건 전부가 할 수 없이 진술될 것이요, 따라서 그것은 영호의 무죄가 성립되는 동시에 자기네에게 경찰의 손이 되레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다만 영호가 경찰의 주목만을 받아 활동력을 어느 정도까지 잃 도록만 하자는 것이다.

영호도 오늘 석간을 보고 응당 그 사나이 ── 김서방을 딴 데로 보내었을것이다. 그러니까 가택수사 같은 것을 해도 발견이 안될 것은 영호라는 인물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면 영호가 경찰에 감시받는 인물이 되며, 따라서 그동안과 같이 눈부신 활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농간에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경찰서의 형사대 일행 다섯 명은 계동으로 닥쳐 올라왔다.

두 사람은 앞뒷문을 경계하고 세 사람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상준이가 나왔다.

"주인 어데 갔소?"

"안 계십니다."

"언제 나갔어?"

"모릅니다."

상준이는 대학병원에서 오복이의 병간을 하다가 방금 돌아왔으므로 모른다 고 대답할밖에 없는 것이다.

식모를 불러내었다.

"주인 어데 갔어?"

"어데 가신지 모릅니다."

"언제 나갔어?"

"한 시간도 못 되세요."

"둘이서 나갔지."

"둘이요?"

하고 식모는 이마를 찌푸렸다.

"아니요. 혼자 나가셨세요."

"그러면……"

하고 형사들은 척척 올라섰다.

가택수사를 해보려는 것이다.

그들은 상준이를 주인 대신 데리고 다니며 방방이 수사를 해보았다.

아래층의 세 방과 이층의 세 방과 부엌과 뒤채 전부를 찾아보았다.

그들이 만일 이 계동 관내를 맡은 ××경찰서에서 왔다면 묻지도 아니하고 지하실의 문을 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집의 건축허가나 낙성검사를 아니한 ×××경찰서에서 왔기 때문에 지하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지하실은 없어?"

이렇게 그들은 따라다니는 상준이더러 물어보았다.

6

"없읍니다."

상준이는 눈도 깜박하지 아니하고 천연스럽게 대답을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어데 갔나?"

형사는 눈을 무섭게 뜨고 식모더러 묻는 것이다.

"그 사람이라니요? 네 저 오복이요? 자동차 운전수? 그이야 병원에 있다는데요."

"자동차 운전수 말구 …… 어제 저녁에 온 사람 말이야."

"그러면 모릅니다. 어제 저녁에는 쥔 나리가 늦게 나가셨다가 혼차 돌아오시고 아무도 온 이가 없는걸요."

식모의 말대답은 식은죽 먹듯이 거침새가 없다.

"정말이야?"

 

형사는 또 한번 눈을 휘두른다.

"그럼 정말이 아니고요? 내가 무얼 안다고 거짓말을 해요!"

"그러면……"

하고 다른 형사가 묻는다.

"오늘 아침에도 아무도 오잖앴나?"

"없에요 …… 우리 집에는 쥔 나리하고 이 상준이 도령하고 나하고 셋뿐이고 운전수가 가끔 오긴 하지요만 그외에는 아무도 오잖어요."

"확실히 주인이 아까 혼자 나갔어?"

"."

마침 영호가 돌아왔다. 그는 들어선 사람들을 보고 자못 놀라운 듯이 둘러본다.

그들은 긴말을 아니하고 영호와 동행하여 ×××경찰서로 갔다.

서장은 영호의 집을 수사한 것과 또 식모를 심문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나서 영호를 심문하였다.

그러나 영호는 부인을 하였다.

그러한 사람은 알지도 못하고 또 데려다 둔 일도 없다고.

그러면 오늘 저녁은?

오늘 저녁은 집에서 저녁을 먹고 그때가 여섯시 반이다 …… 일곱시까지 신문을 보고 바로 다마스끼집에 가서 다마를 치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는 형사들이 식모를 심문하고 있었다.

서장은 부하를 시켜 영호가 다마쓰끼집에 간 시간과 돌아온 시간을 물어보았다.

그곳에 당도한 것이 일곱시 오분이요 돌아간 것이 여덟시 반이라고 저편에서 대답을 하였다.

영호는 경찰서에서 나와 자동차를 몰아 올라오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싱그레 웃었다.

"이렇게 좌우 협공을 당해서야 원!…… 그러나 놈들도 꽤 영리는 한데…… 그렇지만 어데 보자!"

실상 영호가 집을 나간 것은 일곱점이었었다.

그는 김서방을 자동차 바닥에 뉘어 그 위에다 이불을 실어가지고 절친 한의사의 병원에다가 입원 시키었다.

병이야 다리를 조금 상한 것과 어젯밤 괴한에게 가슴을 차인 것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간호부나 다른 사람의 의심은 면할 수가 있고 의사는 영호가 절대 비밀이라는 당부에 OK라는 대답을 했고.

 

병원을 나와 다마스끼집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고.──

영호는 상준이에게 꽤 많은 돈과 비밀한 명령을 주어 밤차로 여주로 떠나 보냈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정확하게 …… 그리고 돈이 더 필요하거든 전보를 쳐라.

문 밖에서 이렇게 겸쳐 당부를 하였다.

이튿날 아침 …… 영호가 가짜 소포 사건에 다들린 제사일째 되는 날이다.

불과 나흘 동안에 눈부시게 사건은 뒤를 이어 발생하였다.

영호는 중간에 실패는 있었을망정 그러나 그 실패는 완전한 실패가 아니 요한 고장이었고, 어쨌거나 사건의 진행과 한가지로 활약을 해왔던 것이다.

영호는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침대 속에서 오늘 할 일의 프로그램을 세우면서 조간신문을 집어들었다.

영호의 기다리는 것은 손가락 사건으로 일어나는 딴 무슨 반응이다. 그러나 어제 조간에도 석간에도 아무런 그런 것은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신문에 보도된 대로 하면 그 뒤에 경찰의 수사는 별로 진행이 되지 아니 한 것이다.── 밀고전화의 일건은 경찰서에서 발표를 아니했는지 게재되지 아니하였다.

죽 기사를 훑어보다가 한 군데 이르러서 영호의 시선은 딱 머물렀다.

그는 기사를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새로운 사건 1 신문기자는 경성역에서 트렁크 속에 넣은 시체를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경성역의 일이등 대합실에는 언제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대형(大型)의 트렁크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트렁크로부터 이상한 물이 흘러내리고 약간의 불쾌한 냄새까지 났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발견한 것이 어제 오후 네시. ── 그리하여 어제 오후 일곱시가 되어서는 경성역에서 그 트렁크를 ×× 경찰서로 보내었고 동서에서는 그것을 열어본 결과 한 개에서는 동체로부터 위 편의 시체가 나오고 다른 한 개에서는 동체 아래편의 것이 나왔다.

사십 이상 된 남자를 두 토막에 잘라 나누어 넣은 것이 분명하고 얼굴은 초산을 끼얹어 물크러져서 알아볼 수가 없이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바른편 엄지손가락 한 개가 최근에 잘라낸 자국이 남아 있어 즉시 ××경찰서에 보관한 문제의 손가락을 가져다가 대조 해본 결과 그것이 이 시체에서 잘라낸 것으로 감정이 되었다.

그리고 확실한 것은 해부를 해본 결과가 아니면 확정하기 어려우나 그 손가락은 피해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 자른 것이요, 죽은 원인은 살해가 아니라 자연사(自然死)인 듯하다.

그 밖에 시체를 담은 트렁크는 중국 등지에서라야 구할 수 있는 것이요, 트렁크에 붙어 있는 호텔 라벨은 고의로 전부 뜯어버린 자국이 있다.

영호는 기사를 다 읽고 혼자 생각하였다.

그들이 이 피해자 즉 이상한 손님인 유대설이에게서 학희네와 한 자리로 빼앗을 물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희네가 포로로 잡아놓은 것을 약탈하여 간 것인데 빼앗을 것을 빼앗았는지 못 빼앗았는지 그것은 모르겠으나 너무 쇠약하여 죽어 버리니까 그와 같이 트렁크 속에 넣어 경성역에다 내버린 것이다.

어쨌거나 저희들의 신출귀몰한 활동만 믿고 담대한 짓을 저질러놓았다.

이렇게 되면 경찰의 신경만 더욱 혼란되게 되었다.

영호는 아침 소쇄를 마치고 조반을 먹은 뒤에 실험실로 들어가 서광 옥이의 사진을 석 장 가량 복제(複製)하였다.

그는 복제한 사진을 가지고 사진 뒤에는 원 나이와 또 보이는 나이며 특징 같은 것을 대강 더 적었다. 그는 집 주위며 형사의 '미하리가 없음을 다진 뒤에 복제한 사진을 가지고 주먹코를 찾아가 그들 세 사람에게 돈 십 원씩과 한가지로 나누어 주었다.

── 지금은 양장을 하고 다니니까 그것을 참작해서 어디서든지 발견하 거든 곧 뒤를 따라가 집만 알아두고, 그러나 특별히 긴한 일이 없는 외에는 계동으로 자주 찾아오지 말라.

영호는 그들과 갈리어 경성자동차부로 와서 지금 자기가 몰고 다니는 자동차를 오복이가 완쾌하여 새차를 사기까지 세를 내기로 하고 아주 빌리었다.

영호가 대학병원으로 차를 몰고 갔을 때에 오복이는 새벽부터 퇴원할 준비를 하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에 붕대를 동이고 타박상이 아직 아물지 아니한 바른편 다리를 절름거리며 오복이는 그래도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기쁨에 연해 벙실벙실한다.

자동차 속에서 비로소 두 사람은 그새의 경과를 서로 이야기하였다.

오복이는 이를 갈았다. 놈들을 붙잡으면 대갈통을 부서버린다고.

그 꼴이 어쩌면 김서방과 비슷하여 영호는 빙그레 웃었다.

아까 집을 나갈 때에는 보이지 아니하였는데 돌아오면서 보니까 저편 골목에 양복장이가 어름어름하고 섰는 것이 미하리씨()인 것이 분명하였다.

 

영호는 속으로 찝찝하게 생각하면서 못본 체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식모와 오복이에게 몇가지 부탁을 하고 실험실로 들어가 어젯밤 노인의 옷고름에 찍힌 지문을 떠두었다.

그리고는 침실문을 안으로 닫아걸고 비로소 밀린 일을 시작하였다.

2

영호는 침실 도어에 안으로 쇠를 잠근 뒤에 동편 벽을 가리어 선 책장, 그 책장 모서리에 숨겨져 있는 초인종 단추 같은 것을 눌렀다.

그러니까 그 무거워 보이는 책장이(무거워는 보이지만 속은 텅 비었다.)

도어가 열리듯이 슬그머니 벽으로부터 벌어진다.

책장이 물러난 자리에는 바닥에 널따란 판자가 깔리고 그 판자의 저편을 누르니까 이편 끝이 발딱 일어서 사람이 삼사인은 한번에 들어갈 수 있는 구멍이 입을 벌린다.

영호가 그 구멍으로 들어가자 다시 판자가 덮이며 이미 책장이 슬그미 움직여 전대로 놓인다. 침실은 전과 같이 감쪽같아진다.

영호가 들어간 구멍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경사 급한 층계다. 속은 캄캄 어두우나 영호는 더듬지 아니하고 층계를 내려갔다. 다 내려가서 층계는 한번 접 질리었다. 지금까지 내려온 이 건물의 아래층이요 이제부터가 지하실이다.

층계가 다한 곳에 문이 있다.

그 문을 열고 나서면서 벽에 붙은 단추를 누르니 천장의 전등이 희미하게 켜진다. 넓이가 한칸 가량 되는 복도다.

복도는 바른편으로 뻗치었고 왼편에는 부엌에서 들어오는 층계의 끝을 가린 문이 있다.

지금 영호가 나온 문이나 그 문이나 모두 철문인데 페인트를 이상하게 칠하고 또 벽과 사이에 틈도 벌어지지 아니하였으며 게다가 손잡이도 없어 언뜻 문으로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복도는 여섯 칸쯤 가서 바른편으로 다시 구부러진다. 역시 천장에 십촉 전등이 켜져 있다.

복도를 구부러지며 바른편에 철문이 있다.

철문에는 위로 조그마한 철창이 있고 그 위에는 다시 흰 페인트로 ' 1’ 자가 씌어 있다. 그 다음에도 그러한 문이 있는데 그 문에는 '2’자가 씌어 있다. 마치 감옥 같다. 더우기 이 '1’'2’의 두 방의 철문에는 밖 으 로 쇠빗장이 걸리고 자물쇠가 잠기어 있다.

누구든지 이 지하실을 한번 들어와 보면 먼저 영호를 수상한 인물로 점 찍지 아니할 수가 없이 되었다.

복도가 막다른 곳에 다시 철문이 있고 그 철문에는 역시 흰 페인트로 'S'

자가 씌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안벽에 있는 단추를 누르니 눈이 부신 백촉 전등이 확 켜지며 방안이 환히 둘러보인다.

방이 크기는 위층 응접실만큼 하고 네귀 번듯한데 사면의 벽은 값비싼 종이로 발랐다.

들어서면서 왼편 한구석으로 사치스러운 덮개 덮은 침대가 있고 그 발치로는 두터운 커튼이 토일렛 룸(화장실 겸 변소)을 조그맣게 둘러싸고 있다.

방바닥에는 값비싼 천이 깔리어 있고 한가운데에 굉장하게 큰 탁자가 놓여있다. 탁자와 침대 사이에는 조그마한 전기난로가 놓여 있다.

탁자 앞에와 그 주위며 또 이곳저곳에 안락의자와 소파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실내며 복도며 할 것 없이 통풍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나 공기가 결코 무겁지 아니하고 바깥과 마찬가지로 신선하다.

그러면서 바깥에서 나는 소음이라고는 하나도 들리지 아니하고 마치 지축 속인 듯싶게 고요하다.

탁자 위에는 전선과 연락된 두 개의 확성기(擴聲器)와 한 개의 마이크로폰이 놓여 있다. 확성기 가운데 '()’자를 쓴 것은 현관, '자를 쓴것은 응접실에 비밀히 장치된 마이크로폰과 각각 연락된 것이요, 마이크로폰은 침실의 확성기와 연락이 된 것이다.

탁자 위에는 그 밖에 책이 몇권에 철필이며 잉크가 놓여 있고 한편으로는 이번 사건에 수집된 모든 재료가 그득히 쌓여 있다.

영호는 들어오던 철문의 쇠빗장을 걸고는 탁자 앞 암체어에 푸근히 앉았다.

지금까지 침대 속에 묻어두었던 학희의 모자가 그의 품속에서 나와 탁 자위에 놓여진다.

그는 모자와 노인의 외투를 번갈아 보며 푸 하고 한숨을 내쉰다.

한참이나 앉아 모자를 어루만지고 외투를 바라보고 하다가 그는 일어서서 학 희의 트렁크를 열고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3

 

영호는 두 개의 트렁크 중에 우선 하나를 열었다.

이 두 개의 트렁크는 영호가 익선동 '그 집을 엄습하였을 때에 학 희네 부녀가 이상한 손님 ── 유대설 ── 을 살해하여 그 속에다 집어넣지나아니하였나 생각하고 '두 개의 꽤 무거운 트렁크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던 그 트렁크들이다.

영호는 그때 일을 생각하고 싱긋이 웃었다.

이것은 학회의 전용인 듯하였다. 대부분이 의복이요 그 밖에 화장하는 도구 같은 것이 들어 있는데, 만일 그 소유자인 학희 자신이 옆에 있다면 잘 겁하며 숨길 여자의 '비밀한 것들도 들어 있었다.

이러한 물품은 모두 조선에서 쓰는 일본 제품이 아니었었다. 전부가 아메리카 것이요, 그중 몇가지만이 중국 제품이다.

이 밖에는 다른 것 ── 가령 편지나 서류 같은 것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트렁크에 비밀한 장치가 있나 하고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영호는 트렁크 속에서 나온 의복을 가지고 포켓들을 일일이 뒤져본 뒤에다 시 겹으로 된 놈만 추려내었다.

이 겹으로 된 놈을 가지고 속을 뒤집어 이상하게 꿰맨 자국이 없나 조사 하여 보았으나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학희의 트렁크의 조사는 다 끝났다. 그러나 영호는 그것을 걷어 넣으려고도 또 다른 트렁크를 조사하려고도 아니하고 그대로 앉아 학희의 옷을 만 지고 주무르고 한다.

필경 그는 보드라운 스커트를 집어다 볼에 대어보기까지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보는 사람도 없건만 무렴해서 얼른 스커트를 내려놓는다.

영호는 마침내 의복과 물품을 도로 차곡차곡 트렁크에 집어넣은 뒤에 나머지 트렁크에 손을 대려다가 마침 옆에 있는 보자기에 싼 꾸러미를 끌어당겼다.

그저께 밤에 ×별장에서 괴한이 버리고 달아난 것이다.

보자기 속에서는 기성복집에서 사 입은 지 오래잖은 듯한 잡색 스코치 양복 위아랫벌이 나왔다. 군데군데 피가 묻고 한 것이 동소문 밖 집에서 흉행 할 때에 입었던 것인 듯하다.

이놈을 가지고 기성복집으로 돌아다니면 적어도 그의 인상(人相)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련만, 그러나 부하 한 사람의 인상쯤 그다지 큰 단서거리가 아닌지라 단념하고 포켓을 뒤지어보았다.

마코가 한 갑이 나오고 피스톨 탄환이 열두 개 나왔다.

×별장에서 뺏은 피스톨에 전충하여 쓸 탄환이다.

 

영호는 역시 탁자 위에 놓은 피스톨을 집어보고 또 그날 밤 영호의 생명 을지 켜준 방탄조끼를 어루만지었다.

그날 밤에 입고 갔던 운전수 복장 앞가슴에 큼직한 불탄 자국이 난 것 도영호는 비로소 발견하였다. 다음은 학희네 짐 가운데 또 하나 남은 트렁크다.

이놈은 먼저보다 더 크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속을 열고 보니 역시 노인의 것인 듯한 사철양복과 몇벌의 조선옷이 나왔을 뿐 서류나 편지 같은 것은 보이지 아니하였다.

영호는 그 옷의 하나하나를 집어들고 먼저 학희의 옷을 조사하듯이 조사 하여 보았다.

동소문 박 현장에서 집어가지고 온 외투도 그렇게 해보았다. 조그만 수상한 곳이 있으면 바느질밥을 뜯고 보았다.

신던 것인 듯한 구두도 한 켤레 들어 있었다.

안으로 붙은 상표를 보니 미국 시카고의 어느 상점의 것이다. 영호는 문득 학 희의 트렁크를 다시 열고 화장품이며 거울이며 도구 같은 것을 다시 조사 하여 보았다. 그런 결과 여러 가지 것에 시카고의 상점 상표가 박힌 것을 발견 하였다.

그것은 학희 부녀가 시카고에서 중국을 거치어 돌아왔다는 것을 증명 하는것이다.

영호는 노인의 구두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놓았다 다시 집어들었다 하다가 급히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만에 방울집게 하나를 가지고 돌아왔다. 실험실에 가서 가지고 온 것이다.

그는 다짜고짜로 구두꿈치의 가죽을 잡아떼었다. 그 짝에서 아무 소득이 없 음을 보고 나머지 한 켤레의 뒤꿈치를 마저 뜯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힘이 아니 들고 뒷굽이 중간에서 뚝 떨어진다.

그 속에는 갓난애기 주먹 하나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어져 있다.

4

그러나 구멍은 텅 빈 채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아니하다.

영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분명 이 속에 이번 사건과 큰 관계를 가진 무슨 비밀서류가 들어 있었던것이다.

한데 그것을 최근에 꺼내어 몸에 지니고 다녔던지 학희를 주었던지 했다.

 

그렇다면 노인이 손수 지니고 다녔던지 학희를 주었던지 좌우간 악당의 손에 들어갔기가 십상팔구다.

이렇게 되어서는 악당들이 팔구분이나 승리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니 영호는 속이 초조하였다.

그는 구두꿈치를 전대로 해놓고 트렁크를 검사하였다.

밑창을 자세히 검사해보니 과연 비밀한 장치가 있다.

어떻게 요리조리 만지니까 바닥 한 겹이 떠들리며 그 속에서 서류가 나왔다.

그러나 서류라는 것은 시카고 어느 은행에 이만 불을 예금한 통장과 또 경성의 ××은행에 당좌예금으로 일만오천 원 가량 남은 통장이 있을 뿐 십원 짜 리로 현금이 돈 천 원이나 들어 있는 외에는 아무것도 다른 서류나 편지 같은 것은 나오지 아니하였다.

영호는 모든 것을 전대로 해서 치워놓았다.

학희네 짐으로 이 두 개의 트렁크 외에는 더 조사할 만한 것이 없는 것이다. 하기야 김서방의 짐꾸러미와 담요며 이불을 있으나 그런 것은 조사 해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다음은 익선동 마나님네 집에서 가져온 이상한 손님인 유태설이의 짐이다.

어떠한 내용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와 같이 이손 저손에 붙잡혀 명색 없이 만만히 죽었느니라 생각하니 가엾은 생각도 들었다.

이 짐은 한번 조사해본 나머지니까 달리 조사할 것은 없고 수상한 바느질 밥에만 주의하였다.

그랬더니 동복 등어리에서 상해 ××은행 지점에서 경성 본점을 통하여 유창순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부친 영수증과 역시 유창순의 이름으로 경성 ×× 은행에 만 원을 예금한 당좌예금통장이 도장(유창순)과 한가지로 굴러 나왔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영호가 헙수룩한 낡은 양복을 뒤져보다가 그 뒷깃에 바느질 밥이 이상한 것을 보고 좍 뜰어본 결과 그 속에서 의외로운 것이 발견 되었다.

조선 문창호지인데 위아래가 반지 한 장 폭만하고 한편 끝에 가서 쭉 찢어져 없어진 채 나머지가 한 뼘 가량도 못되는 것인데 모필로 굵직굵직하게

7242 8161 이러한 건으로 듬뿍 씌어 있다.

요전 제일여관의 아궁이에서 얻은 암호표에 의하면 당장 풀 수가 있는 것이다.

영호는 우선 딴 것들을 모두 제자리에 집어넣고 이 암호서류와 또 학 희의 트렁크에서 지문이 남아 있음직한 분곽과 거울과 크림병을 꺼내놓았다.

그런데 마침 현관으로 통한 확성기에서 오복이의 말소리가 들리더니 조금 있다가 응접실 확성기에서 "선생님."

부르는 오복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왜 그래?"

영호의 이 말소리는 마이크를 통하여 침실의 확성기에서 응접실로 들리게 된다.

"허철이라고 하는 이가 왔는데 선생님 꼭 좀 뵙겠다구요."

허철이라면 영호의 중학 때의 동기동창이요 대학에도 한 일 년 같이 다니던 친구다. 매우 가까왔고 서울서도 종종 상종하는 터이다. 그는 문학 지망을 하고 대학도 일 년 반에 내던진 채 조선에 돌아와 문단의 한구석에 참례는 하였으나 쇼펜하우엘의 영향을 잘못 받아 늘 사람이 우울하다. 명랑한 때라고는 어느 정도까지 낭비할 수 있는 돈의 힘으로 유흥을 할 때다.

"누가 오든지 바쁘다고 돌려보내라니까 그래!"

영호의 나무라듯 하는 말에 오복이는 변명을 한다.

"그래도 아주 중대한 상의가 있으니까 기다려서라도 꼭 뵙고 간다고 그래요."

"그러면 미안하지만 한 시간만 기다려 주시라고 아래층 식당방에서 차나 대접하고 자네가 모시고 있게."

친한 친구인데다가 중대한 상의라고 하니 아니 만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호는 다시 하던 일을 계속하여 암호풀기에 착수하였다.

5

영호는 딴 종이에 언문의 자음 모음을 쓰고 그 옆에 1 2 3의 번호를 단 뒤에 그와 대조하여 암호를 풀어갔다.

"신 약 성 서 ── 대영 성서공회 발행 제일판 한 궈 "여기까지 오고는 그 끝은 찢기어 없어진 채다.

이거야 암호를 푸느냐 마나다. 신약전서 ── 대영성서공회 발행 제 일판 한 권( 이 궈는 권이란 말인데 그 끝은 ㄴ이 없어진 듯하다)라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가령 대영 성서공회 발행의 신약전서 한 권을 구한댔자 그 다음은 암호가 이렇게 끝이 없으니 안될 말이다.

 

정말 비밀을 해결할 것은 노인이 구두꿈치에 숨겼다가 최근 꺼낸 …… 그리고 이미 악당의 수중에 들어갔을 그 쪽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한쪽을 가진 악당은 지금 영호에게 있는 이놈 한쪽을 마저 구해 야만 할 터일 것이다.── 가령 이 암호의 푸는 법을 안다고 하면.

영호는 그 암호를 접어 노인의 트렁크를 열고 그 구두 뒤축 속에 집어넣었다.

대강 탁자 위를 갈무리한 뒤에 지문 검사하려고 꺼내논 것을 집어가지고 침실로 올라왔다.

다시 실험실로 들어가 분곽에서 비교적 선명한 학희의 지문을 검출하였다.

왼편 엄지손가락과 무명지의 것 두 개다.

×별장 지하실의 촛도막에서 얻은 지문, 유대설의 지문을 넣어둔 곳에 학 희의 것도 잘 간수한 뒤에 검사에 쓰던 재료들은 또다시 지하실 S호 방으로가 지고 내려가 학희의 트렁크 속에 넣어두었다.

영호는 손수 아래층으로 내려가 허철과 악수를 하며 긴한 일이 있어 기다리게 한 것을 사과하였다.

두 사람은 응접실에서 마주 대하고 앉았다.

허철이는 머리를 1920년식으로 길게 기른 것이 우선 눈에 띈다.

얼굴은 볼이 홀쭉한 게 창백하고 표정이 우울하다. 그중 눈만을 재기가 있어 보인다.

입은 양복은 천은 좋으나 함부로 굴어 꼬기작거리고 술 흘린 자국이 지저분하게 묻었다.

그 나약한 품 우울한 품이 기운차고 명랑한 영호와 좋은 대조가 된다.

"그래? 요새 재미는 어떤가? 금년에는 걸작을 하나 내놓아야지?"

영호는 쾌활하게 묻는다.

"걸작이고 무엇이고 문단이 하도 아니꺼워서 원!"

허철은 힘없이 대답을 한다.

"여보게 자네, 그 독자도 없고 한 소위 예술소설 다 집어치우고 내가 재료는 제공할 테니 탐정소설이나 쓰게 응? 나는 샬록 홈즈 …… 자네는 와트슨? 어때? 허허허허."

"그까짓 탐정소설을 쓰느니 자살을 하고 말겠네."

"?"

"그따우 탐정소설이니 대중문예니 또 소위 계급문제니 하는 것들은 문 예 축에도 못 끼우는 것이야 …… 다 날탕패나 문단에서 낙오된 찌 스레 기들이 할 수 없으니까 그거나마 가지리쓰꾸하지."

 

허철은 이야기하면서 흥분이 되었는지 창백한 얼굴에 조금 혈기가 돈다.

"글쎄 …… 나는 예술이라는 그런 델리케트한 손잽신에는 문외한이니까 몰르겠네만 어쨌으나 나는 탐정소설이 제일 재미가 있데."

허철은 영호의 말하는 얼굴은 보지 아니하고 힘없이 싱그레 웃는다.

그러다가 얼굴을 돌이켜 묻는다.

"그래 지금도 역시 탐정 도락은 하겠다?"

"그렇지."

"실상 그래서 내가 찾어온 건데 …… 자네 혼자만 알고 좀 비밀히 활동 해줄 일이 있네 …… ""해보지 …… 요짐 좀 바뿌기는 하지만 …… 무언가? 자네 애인의 실종 사건이나 아닌가?"

영호는 농삼아 이렇게 물어보았다 (애인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애인?!…… 애인도 없네만 그런 분홍빛 사건도 아니라네 …… "여기서 허철은 어떻게 말을 꺼낼까 하고 잠깐 주저를 하다가 포켓 속에서 편지 한 장을 말없이 꺼내어 보라는 뜻으로 영호에게 준다.

편지를 받아들고 봉투 글씨를 유심히 보던 영호의 얼굴에는 놀라운 빛 이 알 연히 떠오른다.

6

편지는 허철의 아버지 허준이에게로 온 것이요, 차출인은 없는데 그 글씨는 영호가 악당에게서 받은 협박장과 조금도 틀리지 아니하였다.

영호는 허철을 잠깐 기다리게 하고 침실로 해서 다시 지하실 S호실에 들어가 간수해 두었던 협박장을 찾아내었다.

역시 틀림이 없다.

내용의 글씨도 그러하였다. 영호는 응접실로 도로 나와 봉투를 다시 검사 하여 보았다.

종로 이정목 우편소의 일부인인데 약 이 주일 전 것이다.

영호에게 한 것과 같이 속달이고. ── 영호는 속편지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우리가 이야기하던 것은 종차 해결할 셈 치고 위선 옹색하니 오천 원만 오늘 밤 자정에 장춘단으로 가지고 와 연못가의 등나무 밑에서 사방모자 쓰고 검정안경 쓰고 짧은 외투 입고 휘파람으로 수심가 부르는 학생에게 전하 시오.

 

거절하지 아니할 줄 믿읍니다.

그러고 내게서 가는 서신 일체는 전에도 말씀했거니와 본 뒤에는 반드시 불에 태워야 합니다."

사연은 이것뿐이다. 끝에 ""이라고 쓴 한 자는 서광옥이가 아닐까? 생각 하면서 영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이것을 왜 인제야 가지고 왔나?"

허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오늘사 발견한걸!"

"어데서?"

"아버지 문갑 속에서."

"또 없더냐?"

"거기 쓰인 대로 다 불에 살러버리신 모양이야 …… 무슨 편지를 불에 사르시는 것을 나도 한번 본걸 …… 그놈만 아마 총망중에 사르지 못 하신 게지…… ""그러면 그 돈 오천 원은 가져다 주셨나?"

"아마 그런 모양이야 …… 그런 것이 요전에 내가 예금통장을 가지고 은행에 간 일이 있었는데, 보니까 이월 스무날인지 오천 원을 찾은 것이 쓰여있길래 그때는 그저 심상하게 여겼더니 지금 생각하니까 거기 쓰느라고 찾으신 모양이야 …… "영호로는 생각지도 못한 방면에 악당 일파의 손이 미친 것이다. 그들의 수령이 서광옥이인 것은 팔구분이나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실상 그 돈 오천 원을 군자금으로 오늘날까지 그와 같은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인데, 그러면 대관절 허철의 아버지 허준이가 어찌 해서 그들에게 요구하는 대로 순순히 오천 원이란 적지 아니한 돈을 내어주었을까?

편지의 문구로 보아 그것은 확실히 청이 아니요 협박에 가까운 강청이다.

이러한 강청에 응종한다는 것은 그만한 약점이 이편에 있는 때문이다.

무슨 약점일까?

영호는 편지를 다시 집어들었다. 맨 꼭대기에 쓰인 "우리가 이야기하던 것."

여기에 조건이 붙은 것이다. 무엇을 사고 팔고 하나?

"요새 토지나 무엇 사잖았나?"

영호는 갑자기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허철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없어."

 

그럴 것이다. 사고 팔고 하는 교섭이라고 하기에는 편지의 투가 너무 오만하다.

어쨌거나 허준이에게 무슨 약점이 있는 것을 악당의 일파가 알아가지고 이와 같이 돈을 강청하여 가는 것인데, 그건 그렇다고 하고 그 돈 오천 원만 아니었었더라도 그들은 그다지 눈부신 활동을 하지 못했으리라고 생각 하니 영호는 이 사건을 인제야 알게 된 것이 안타까왔다.

"요 최근에는 예금통장에서 또 돈을 많이 끄내지 아니하셨든가?"

영호는 물어보았다. 그들 악당에게 돈은 즉 힘이니까.

"삼사 일 전에 내가 삼천 원을 또 한번 찾어다 드린걸 …… ""!"

하고 영호는 부지중에 혼자 탄식을 하였다.

"그런데 말이야."

하고 허철은 비로소 자진하여 이야기를 꺼낸다.

"삼사 일 전에 아버지께서 나를 불러앉히시더니 아주 이상한 말씀을 하신단 말이야! 나는 입때까지 아버지께 그런 말씀을 들어본 적이 없어!"

7

허철은 잠깐 말을 멈추고 영호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 말을 계속한다.

"무슨 일이 있든지 ── 생각잖은 의외의 일이 생기더래도 절대로 남에게 알리거나 경찰서 같은 데 알려서는 안된다고 그러시면서 …… 응 참 …… 그러고 무슨 사고가 생기든지 고집을 세지 말고 타협을 하라고 그리신단 말이야."

"그것뿐이야?"

"."

영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허준이의 그 아들에게 하였다는 말이 아무 속도 모르는 아들에게는 이상할지 모르나 영호에게는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어떠한 사건이 생기든지 남에게나 경찰에 알리지 말고 타협을 하라 한 것은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과거이 약점 ── 비밀을 세상에 알리지 아니하려는 것이다.

"그래 내가 …… "하고 허철은 더 계속을 한다.

"그건 무슨 말씀이에요? 하고 물으니까, 인제 차차 알지야 그리실 뿐이겠 지!"

영호는 한참 생각하다가 결의를 하고 허철에게 물었다.

"대강은 아는 터이지만 어데 자네 어르신네의 과거 이야기랄지 그런 것을 좀 이야기해 보게 …… 아는 대로 숨기지 말고."

허철은 별로 주저하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아는껏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허철의 아버지 허준은 어려서 매우 빈곤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러나 그는 가난 속에서도 그것을 싸워 이기고 성공하겠다는 불굴한 정신의 소유자였었다.

그는 일찍부터 상업 방면에 눈을 떠 재빠르게 활동을 하다가 ×× 은행의 지배인 자리에까지 올라앉았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 그의 나이 겨우 서른세 살 때였었다.

그는 은행의 대주주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었던 것이다.

그의 수완으로 해서 은행은 매우 번창하였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는 그다지 재산을 장만하지 못하였다. ── 느니보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의 가진 주()라고는 일백 주밖에 아니 되고 월급도 그것을 모아가지고 큰 재산이 되기에는 빈약한 것이었으니까.

더구나 부모의 유산 없이 적수공권으로 실업계에 뛰어들어 애초에 목적 한 돈은 모으지 못하고 신망만 얻었을 뿐이니까.──

××은행의 지배인으로 있은지 육 년 만에 즉 지금으로부터 십사 년인 지오 년인지 이 이전에 그는 은행의 지배인 자리를 내어놓고 시골로 내려갔다.

허준이가 이와 같이 ××은행의 지배인 자리를 내어놓고 표연히 낙향을 한데 대하여서는 여러가지 풍설이 많았다. 그중에 제일 유력한 것은 그가 은행의 돈을 횡령하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그가 시골로 내려가 땅도 사고 집을 짓고 호화스럽게 지내기 시작한 것이 입증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몇해 후에는 다시 솔가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큰 집을 짓고 역시 배부르게 생활하고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만일 그때 허준이가 은행돈을 횡령하였다면 그는 무사히 그 돈을 삼키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버젓하게 내놓고 자기의 명의로 토지를 사고 집을 짓고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하물며 그를 신임하고 지배인까지 시켜준 ××은행의 대주주인 아무는 종전보다 그와 더 두터운 교제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일방에서는 허준이가 근검자자하여 남몰래 돈을 모아 두었다 기도하고, 또 누구는 주식(株式)을 대어 일확 수만금하였다고도 한다.

좌우간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십오 년이 지나갔다.

그에게는 상처한 아내가 남기고 간 아들 허철이 있다.

재취장가를 갔었으나 이삼 년 전에 그마저 죽고 지금은 독신으로 오십 넘은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가 외아들 허철을 귀애하는 품은 각별하다.

웬만한 무리와 고집은 그대로 들어준다. 그의 나이 지금 스물 여섯 이로되 결혼을 아니하는 것도 역시 강제시키지 못하고 혼자만 애달파한다.

귀한 아들 허철이 늘 침울하여 근심이 될 뿐 그 밖에는 아무런 근심과 걱정이 없던 허준이가 최근 일 개월 동안 갑자기 침울해지고 사람이 딴 사람이 된 듯이 신경질로 변하였다.

8

지금부터 약 삼 주일이 채 못되는 즉 은행 예금을 오천 원이나 찾았다는 그 이삼 일 전이다.

허철은 그에게 고유한 불매증으로 이부자리 속에서 뒹구는데 사랑에서 갑자기 그 부친 허준의 높은 소리가 들리었다.

허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짝 소리를 죽여가면서 사랑으로 나가 엿을 들어 보았다. 말소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 십만 원?…… 십만 원을 주고 나면 나는 파산을 하네."

이것은 약간 떨리는 허준의 목소리다. 그 말을 받아 젊고 또렷또렷한 목소리가 조롱하듯이 반박을 한다.

"십만 원을 주었다고 파산을 하세?…… 엄살을 하지 마십시요. 그놈 이십만 원으로 지금 영감은 사십만 원 재산은 만드섰지요? 그런데 십만 원쯤 내 시기를 그렇게 인색하게 구세요?"

"사십만 원? ! 알기도 잘하네 …… 내 재산이라는 게 지금 톡톡 털어야십만 원 내외밖에는 아니 되네."

여기까지 듣고 있던 허철은 생각하였다.

남들이 허준의 재산에 불순한 조건이 붙었다더니 그러면 그것이 확실하다.

혹시 저 젊은 사람의 것을 횡령한 듯하다.

재산이란 본시 더러운 것인데, 더구나 그런 불순한 것이면 깨끗이 내어주었으면 시원할 터인데 왜 저렇게 고집을 쓰노?

 

이런 생각을 하며 당장 쫓아들어가 다 내어줍시다, 옜다 가져가거라 하고 부르짖고 싶은 생각이 무럭무럭 치밀어 오르는데, 방에서는 그대로 이야기가 계속된다. 허준의 소리다.

"좌우간 그때 그 돈 사십만 원을 가지고 두 편에서 나누잖았나? 그랬으니까 공평하게 문제는 낙착되었는데 지금 와서 또 내라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이 말을 듣고 보니, 그러면 그 재산이라는 것이 찾아온 젊은이의 것을 횡령한 것도 아닌 듯하다. 차라리 둘이서 협력하여 제삼자의 것을 집어 삼킨것이다.

"그거야 그렇지요."

하고 젊은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그렇지요만 우리는 우리가 잘못해서 그랬든지 운이 나뻐서 그랬든지 그것을 다 써바렸고 영감은 그놈을 밑천삼어 그 갑절이나 되게 만 드 섰으니까 옛 일을 생각해서 좀더 나누어 주시란 말씀이지요."

"내가 그놈을 가지고 갑절을 늘리지도 못했지만 어쨌거나 십만 원을 내 놀수는 없네."

"그러면 재미 없지요."

이 말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 젊은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거 보십시오 …… 그렇게 고집을 세지 마시고 잘 생각해 보세요. 저는 돌아가서 다시 상의할 테니까 잘 생각하세요."

"좌우간 다시 한번 만나세마는 십만 원은 너무 무리한 요구라고 가서 그렇게 전하게."

허철은 몸을 비껴서서 방으로부터 나오는 젊은이를 엿보았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전등불에 비쳐 보니 사방모자를 쓰고 교복을 입은 학생이다. 허철은 가벼운 놀람과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었다.

그 뒤 집안은 아주 장마진 여름날같이 우울하여졌다.

허철이가 그와 같이 노상 침울한데다가 노인마저 우울해져 가지고 괜히 하인들을 나무라기, 밤 늦게 출입을 하였다가는 술이 취하여 돌아오기, 또 전에 없이 허철을 조그마한 트집을 잡아가지고 나무라기 …… 허 철은 몇번이나 저편에서 요구하는 대로 재산을 갈라주라고 그 부친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그랬다 듣지도 아니할 것이요 되레 엿을 들었다고 나무람이나 듣겠으므로 그대로 지내왔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어제는 또 한가지 이상한 일 하나를 허철에게 들키었다.

부자가 저녁상을 받고 앉았는데 마침 배달되는 석간신문을 하인이 들여오 자 사회면을 죽 훑어보던 허준은 한참만에 괴로운 신음소리와 한가지로 얼굴이 해쓱해지고 사시나무 떨듯이 와들와들 떨었다.

그 신문은 동소문 박 살인사건 보도한 것이었었다.

전에는 잔인스러운 살인사건 같은 것이 보도되더라도 무서워하기는 고사하고 흥미 있게 그 사건의 수사를 보아왔는데, 이번에 한하여 그와 같이 공포를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허철은 부친더러 그 피해자 이재석이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愚弄[우롱]

1

아들이 그와 같이 묻는 것을 보고 허준은 낭패하여 그저 모르는 사람이라고 얼버무려 넘겼다.

그러나 허철이가 보기에도 결코 모르는 사람인 것 같지는 아니하고, 알되 과거에 어떠한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인 듯하였다.

허철은 긴 이야기를 마치고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아니하여 담배를 연해 뻑뻑 빤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영호더러 묻는다.

"그러니…… 그러니 말일세…… 대관절 그게 모다 어떻게 된 수수꺼 끼며 나는 또 어떤 입장을 취하면 좋겠나?"

"그거야."

하고 영호가 대답하였다.

"그거야 자네가 자량해 할 일이지. 가령 자네 어르신네께 말씀해서 저편의 요구대로 십만 원을 떼어주든지, 그렇잖으면 그저 구경만 하고 있든지…… 그러나 저편에 대해서 지금 돈을 준다는 것은 큰 동력을 제공 하는 셈이니까 나로 보아서는 반댈세 …… ""그러나 주지 않고 버티다가 무슨 봉변이나 하게 되면?"

"아직 자네 어르신네께서 저편을 다독거리고 있는 판이니까 불칙한 일이 갑 재기 생기지는 않겠지 …… 그러는 동안에 내가 뒤로 나서서 사건을 해결 지어 바리면 일은 무사할 게 아닌가?"

"해결?…… 무사히 해결지을 도리가 있다?"

허철은 눈을 반짝거리며 반겨 묻는다.

"있지 …… 내가 지금 손대고 있는 그 사건의 부산물(副産物)로 자네 댁 사건은 볼 수가 있으니까 ── 원줄기만 해결하면 그 나머지 것은 자연히 해결 되겠지 …… 그러나 멫 가지 약속이 있네."

 

"약속이야 얼마든지 하지."

"첫째는 손톱만한 일이나 말을 절대로 비밀 지키고, 내가 이 사건에 손대었다는 것을 아무한테도 말을 내지 말 것…… "그거야 자네가 말 아니해도 내가 자진해서 비밀을 지킬 것이니까 …… 그러고?"

"그러고 …… 될 수 있으면 집에 들어 있어 드나드는 수상한 사람을 감시 하는 한편 무슨 새 사실이 생기면 일초도 유여 말고 곧 내게로 달려올것."

"그것 역시 어렵잖지."

약속을 단단히 하고 나서 허철은 우선 한짐을 벗은 듯이 푸 하고 한숨을 내어 쉰다.

그는 그리하여 올 때보다는 조금 명랑한 기분으로 영호를 작별하고 돌아간다.

그날 저녁 석간은 여전히 번화했다.

별로 새 사실은 없으나 피해자의 신원이 판명되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제 일 여관의 숙박부에 기록한 것은 모두 거짓말이고 실상은 강화에 살던 이재석이가 피해자요, 양장한 여자는 그의 딸 이학희라는 것, 또 젊은 사나이는 옛날 그의 집에 있던 김대성이라는 사람인 듯하다는 것.

그리고 이재석이는 지금부터 십오 년 전에 우연히 고향인 강화를 떠나 외국으로 돌아다니다가 일 년 전에 장성한 외딸 그 학희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얼마 묵지 아니하고 바로 서울로 올라왔다는 것 …… 들이 강화경찰서의 조사라고 해서 발표되었다.

그 다음 경성역에서 발견된 트렁크 속의 두 토막 시체는 아직도 신원이 판명 되지 아니하였으나 해부한 결과 살해가 아니라 자연사(自然死)로 추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호에게는 경찰에서 이미 피해자의 신원이 판명되었으니 그의 우연히 외국으로 표랑한 원인이며, 또 당시의 가족관계에 대하여 착안을 하는지 아니하는지가 흥미의 중심이다.

그러나 수사 관계로 발표를 시키지 아니하는지 신문에는 그에 관하여 한 줄도 쓰지 아니하였다.

사실 경찰의 손이 그 방면으로 뻗치어간다면 악당의 일파는 활동을 잠시중 지하든지, 또는 멀리 해외로 달아나든지 할 터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영호에게 여간한 타격이 아니다.

그러한 일이 있기 전에 어서 바삐 활동을 해야 할 것인데, 그러나 무슨 줄거리가 있어야 말이지!

 

영호는 신문을 보고 나서 막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가려고 하는데 ' 주먹코에게서 급한 소리로 전화가 왔다.

"저 부루도꿉니다. 저 저 종로 ××상회로 빠 빨리 오십시요."

영호는 더 묻지 아니하고 뛰어나가 자동차를 종로로 몰아세웠다.

2

영호가 자동차를 내던지고 내려서자 ××상회의 서관(西館)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주먹코가 벌씸벌씸 웃으면서 나선다.

"어데 있나?"

영호는 이렇게 물을밖에 …… "저편 동관(東館) 삼층에서 사기그릇을 흥정합니다."

"틀림없지? 양장했지?"

"아니요. 조선쪽을 짓고 조선옷을 입었어요.…… 기생같이 차렸든 걸요 ""어데서 만났나?"

"여기서 만났어요 …… 오늘 왼종일 이 근처로 빙빙 도는데 조곰 전에 저기 있는 저 자동차가 오더니 그 속에서 나왔어요."

영호가 보니 길 옆에 자동차 한 채가 놓여 있다.

"자동차 번호는?"

"경제(京第) ×××."

"내리면서 운전수더러 무슨 말을 했지?"

", 아마 기다리라고 그랬나봐요."

"자네는 저편 동관으로 가서 승강기 옆에 서서 승강기와 층계를 감시 하게…… 그러나 자조 바깥도 내어다보아야 해."

"."

말로 이르고 영호는 서관으로 들어섰다.

휙 둘러보았으나 눈에 띄지 아니하므로 이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없다. 동관으로 건너가는 구름다리에 서서 저편을 살펴본 뒤에 다시 서관으로 돌아서 삼층으로 올라갔다.

역시 한번 둘러본 뒤에 동관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사기를 파는 곳에는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 보이지 아니한다.

영호는 한번 둘러본 뒤에 다시 사층으로 올라가 좌우의 식당을 둘러보았으나 또한 보이지는 아니한다.

영호는 초조하여 승강기로 아래층까지 내려왔다.

 

주먹코가 멍하니 승강기 속을 굽어다보고 있다.

"아니 내려왔나?"

하고 영호는 밖을 내다보니 방금까지 있던 그 자동차가 없어지고 말았다.

영호는 거리로 뛰어나서 보았다. 그러나 자동차의 간 종적은 찾을 길이 없다.

대관절 어느 겨를에 어디로 나와가지고 자동차를 타고 가버렸을까?

도무지 눈에 띄지 아니하고 나갈 기회는 없을 터인데 …… 그러면 자동차는 기다리다 못하여 저대로 가버리고 그 인물은 아직 이 안에 있나?

영호는 주먹코와 손을 나누어 다시 한번 샅샅이 샅샅이 뒤지어 보았다.

그러나 드디어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거리로 나왔다.

"내릴 때 차삯을 주는 것 같든가?"

영호가 물어보았다. 주먹코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요."

영호는 우두커니 서서 궁리를 하다가 주먹코를 데리고 또 한번 동관 삼 층으로 올라갔다.

"여기 있는 사기그릇을 어느 놈을 만지든가?"

영호는 귓속말로 가만히 물어보았다.

그 인물을 찾아내는 것도 찾아내는 것이려니와 확실히 그 당자인 여부도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 이놈을 여러 번 만졌어요."

주먹코는 여러 개 채곡채곡 쌓아놓은 양접시의 맨 밑에 치를 가리킨다.

"장갑을 끼고 만지더냐?"

"아니요 …… 미끄러질까 봐서 그러는지 일부러 장갑을 벗고는 만져 보든데요."

일은 묘하게 잘 되어간다.

영호는 두말 아니하고 그 양접시를 샀다.

점원이 종이에 싸주겠다는 것을 한사코 마다하고는 조심하여 손에 들고 나섰다.

좌우간 그림자는 놓쳤으나 그가 그인지 확실히 알아가지고 그 다음에 자동차 번호는 알아두었으니까 그것을 단서잡아 그의 간 곳을 찾아보리라고 주먹코를 태워가지고 집으로 올라갔다.

영호는 사가지고 온 양접시를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그가 타고 간 자동차 번호까지 알았으니 인제는 그 당자이기만 하면 갈데 없이 붙잡았느니라고 은근히 기뻐하며 지문을 검출해 보았다.

3

지문은 점원의 것이 듯한 것, 또 딴 사람의 것, 영호의 것이 모두 있기는하나 그중에서 서광옥이 ── 라느니보다 ×별장 지하실의 촛도막에서 검 출한 지문과 꼭같은 지문이 선연히 나타났다.

바른편 엄지손가락의 지문이 안으로 있고 역시 바른편 무명지의 지문은 밖으로 있고, 그리고 하나뿐 아니라 여러 개가 모두 선명히 나타난다.

촛도막의 것과 몇번 대조해 보아도 한 금도 틀리지 아니한다.

영호는 날뛰듯이 좋아하였다.

이제는 제아무리 무어라도 독 안에 든 쥐다.

그렇게 좋아하다가 영호는 갑자기 입맛을 다시며 응접실로 나와 주먹 코를 불러 올렸다.

"자네가 뒤를 밟으니까 연신 돌아보든가?"

"…… 처음에 아래칭 칭칭대에서 홱 돌아보고 또 이칭 칭대에서 또 한번 돌아보더니 그때는 해쪽 웃겠지요."

주먹코는 코를 벌름하고 한번 웃는다.

"그래서?…… 아마 자네한테 반했든 게지."

영호는 그 인물이 왜 웃었는지 그 속을 알기는 하나 주먹코를 놀리느라고 한마디 한 것이다.

"참 이쁘기는 이쁩디다."

"잘 되었군 …… 그 여자는 자네한테 반하고 자네는 그 여자한테 반하고…… 가만있게. 인제 중매 서주면서 …… 헌데 대관절 그 뒤에는 어쨌어?"

"아무렇지도 아니했어요. 옆으로 슬슬 대서야 본체도 아니하든데요."

"본체만체해서 섭섭했겠네만. 한 대 뽄 좋게 먹었는데."

그 여자는 주먹코가 미행하는 줄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자기 볼일을 다 보았다.

그러자 미행꾼이 없어진 것을 보고 이건 아래층에서 승강기와 층층대를 지키지 않으면 문 밖에서 기다리나보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승강기도 층계도 다 버리고 상점에서 그 뒤의 사무실로 난 구름다리를 건너 뒤꼍에 가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살그머니 앞으로 빠져서는 주먹코가 승강기와 층계를 주목 하고있는 틈에 자동차를 몰고 달아난 것이다.

 

영호는 이렇게 추측하매 미상불 여자라도 결코 홀가분한 상대자가 아님을 절절 히 느끼었다.

그러나 아직도 강점(强點)은 이편에 있는 것이다. 자동차를 어디서 타고 왔으며 어디서 내렸는지 그것을 이편은 조사해낼 수가 있으니까. ── 영호는 경성자동차부에 전화를 걸어 주인을 불러가지고 제×××호차가 어디 것인지 물어보았다.

지금은 모르나 곧 알 수 있으니 전화로 기별하겠다는 것이 저편의 대답이다.

영호는 전화를 끊고 기다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민첩한 여자다.

더구나 요즈음 경찰에서 양장한 젊은 여자를 찾는 터이니까 비록 자기가 학 희는 아니라도 혹 주목을 받을까 봐 조선쪽에 조선옷을 입고 나온 것을 보더라도. ── 이렇게 주의가 주도한 여자인지라 ××상회에서도 미행이 붙은 줄을 아는지라 혹시 자동차를 중간에서 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차를 타고 왔다가 역시 그 차를 타고 갔으니까 운전수를 꾀면 가령 커미션을 먹였다 하더라도 타고 온 곳은 알아낼 수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영호는 아직도 낙관을 하였다.

삼십 분쯤 해서 경성자동차부의 주인이 전화를 걸었다. ××× 호 차는 ×× 자동차 부의 소유라고. ── 영호는 즉시 ××자동차부로 전화를 걸고 제×××호차와 그 차를 운전 해가지고 나간 운전수가 돌아왔는가 물어보았다.

저편에서는 그가 방금 돌아왔다가 또 나갔다고 대답한다.

그러면 특별 요금이라도 낼 터이니 그 차 운전수가 돌아오거든 계동 이러 저러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래놓고 초조히 기다리는데 다시 삼십 분쯤 하여 경적 소리가 나고 기다리던 운전수가 드디어 찾아왔다.

"당신이 약 한 시간 반 전에 어느 젊은 여인을 태워가지고 ××상회에 갔다가 다시 태워가지고 갔읍니까?"

영호는 운전수를 은근히 응접실에 안내해 앉히고 여송연을 권하면서 물었다.

4

 

운전수는 현관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분에 넘치는 공순한 대접에 이게 웬일이냐?는 듯싶어 어리뚱하였다. 그러다 필경 영호의 묻는 말에 "네네. 그러면 이것을 …… "하고 포켓 속에서 편지 한 장을 탁자 위에 내어놓는다.

편지? 영호는 속으로 외치며 그것을 집어드는데 운전수는 말을 더 계속 한다.

"차에서 내리시면서 혹시 누가 ××상회에 태우고 갔던 그 젊은 여자 를어 데서 태웠으며 어데서 내렸느냐고 묻거든 이걸 드리라고 편지를 주 시드군요 …… 그리고 무슨 말씀을 묻거든 다 바른 대로 대 드리라고요 …… "영호는 편지를 뜯으려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른 대로 대주라고? …… 대관절 어데서 맨처음에 태우고 어데서 맨 나중 내렸소?"

"경성역에 손님 모시고 나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모시고 왔어요. 그래 ×× 상회까지 갔는데 잠깐 기다리라고 그리시길래 생김새가 점잖고 그래서 삯도 받잖고 기다렸지요. 그랬더니 한 삼십 분 뒤에 도로 나와서 진고개로 갔지요. 진고개 어귀에서 차를 멈추고는 바로 그 앞에 있는 상점으로 들어가서 봉투하고 종이하고 연필하고 사가지고 나와서 거리에 선 채 그 편지를 써주 시드군요."

"그리고는?"

"그리고는 그 말을 부탁하면서 차삯을 주시고는 진고개로 들어가셨어요."

운전수는 아무 거리낌없이 술술 대답을 한다. 영호는 편지를 뜯었다. 봉투는 흰 양봉툰데 겉에는 '백선생님이라고 또렷이 씌어 있다. 속에서는 보통 상점에서 파는 사백자 원고지에 연필로 휘날려 쓴 편지가 나왔다.

"백선생님! 수고 많이 하십니다. 그러고 호위병(護衛兵)을 그렇게 보내주시고 그래도 미흡해서 손수 ××상회까지 와주셨으니 글쎄 그런 고마울 데가 어데 있읍니까! 호호…… "여기까지 읽어온 영호의 얼굴은 상기가 되기 시작한다. 그는 꾹 참고 다음을 읽었다.

"그렇지만 내가 무어라고 그렇게 황공한 대접만 받고 있을 수가 있어야지요. 그래 살그머니 뒤채 사무실로 빠져서 자동차를 타고 왔지요. 호의를 그렇게 물리쳐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세요 네?…… 그러고 참 내가 참고 거리를 드리느라고 양접시에다 지문을 남겨놓았는데 갖다 검출해 보셨지요? 일부러 장갑을 벗고 여러 개를 찍어 두었답니다. 아마 그 바보 같은 선생님의 부하 가 그 양접시를 충실하게 가리켜 드렸을걸요?"

영호는 이 계획적 우롱에 분이 복받쳐 편지를 들고 읽는 손이 와들와들 떨리었다. 그는 편지를 박박 뜯어버리고 싶었으나 그 다음을 다시 읽었다.

"어때요? 저기 ×별장 지하실에서 얻은 촛도막의 지문과 꼭 같지요?

나는 ×별장을 떠난 뒤에 그래도 미심해서 한번 둘러보았더니, 과연 선생님이 그날 밤에 촛도막을 가져가셨드군요. 수하놈들을 그렇게 동촉 했건만 글쎄 촛도막을 남겨놓았었답니다그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한 장난 거리의 재료가 되었으니 되려 기쁩니다.

그리고 참, 저 유대설이의 짐 속에서 무엇 발견하신 것이 있거든 잘 좀 보관 했다 주십시요. ── 없으면 할 수 없고 ── 그러면 아 안녕히 계십시요. 날새 한번 만나뵙지요. 그리고 한가지 부탁은 젊은 혈기에 너무 불장난에 골몰하지 마십시요. 잘못하다가 손을 데우면 가엾어 어떻게 합니까!

그러고 참! 정말 잊어버렸네. 그 계집애요. 그애는 내가 잘 데리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요. 그애가 내 움딸이요, 또 우리 백선생님의 애인인데 소홀히 할 리가 있읍니까! …… 자 그러면 안녕히 …… ."

영호는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의자에 펄씬 주저앉았다. 그는 머리를 우디고 한동안이나 있다가 다시 고개를 쳐들고 무료히 앉아 있는 운전수를 바라보았다.

"여보! 속이지 말고 바른 대로 말해요. 바른 대로만 대어주면 내 전 재산이라도 다 내어주리다 …… 어데서 태워가지고 ××상회로 갔었소? …… 정말 바른 대로 대면 십만 원 줄 테야 십만 원…… "5 자동차 운전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치어다보기만 한다.

그는 이 젊은이 ── 영호가 그 여자 손님과는 애정 관계가 있어가지고 그의 행방을 이와같이 기쓰고 찾으려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실 알지 못한다. 알기만 알아서 알으켜만 준다면 십만원이니 전재산이니 하는 소리는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용돈냥이나 톡톡이 얻어 쓸 수가 있을 텐데 …… 생각하니 되레 안타까왔다.

"응 바로 대주어요. 정거장 말고 어데서 태워가지고 왔소?"

영호는 재촉하듯이 묻는다.

"속이잖습니다 …… 이렇게 물으시는데 알면 왜 대드리잖겠읍니까? ……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었드면 진고개에서 그 뒤나 좀 밟어두었을걸 그랬지요."

영호는 끄윽 운전수를 바라보고 있다가 침실로 뛰어들어가 손금고 속에서 돈을 있는 대로 털어내었다.

은행에 예금을 해놓고 쓰는 터이나 요즘은 그야말로 비상시라 좀 찾아다 둔 것이 있어 한 오륙백 원은 된다.

그는 그 돈뭉치를 운전수 앞에다 내놓았다. 만일 운전수가 서광옥이의 행방이며 나온 집을 알고도 아니 대어준다면 그것은 저편에서 돈을 먹었거나 그 의 부탁이기 쉬우니 그렇다면 돈으로써 우선 매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운전수는 입맛이 당기는 듯이 돈을 치어다볼 뿐 그 이상 더는 대어주지를 못하였다.

영호는 할 수 없이 운전수를 돌려보내 놓고는 혼자 민민하였다.

결코 용이치 아니한 적수다.

이편은 한사코 활약을 하는데 저편은 유유하게 상대자를 우롱할 여유까지가 지고 있다.

사리가 치밀하고 활동이 기민하고 한 품이 이편에서 앞으로 조금만 방심을 하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조그마한 계집이! 담대하게 그리고 오만하게!

영호는 그야말로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신음소리가 저절로 흘러져 나왔다.

마침 허철에게서 전화가 왔다. 속이 울적하여 술을 한잔 먹으러 왔으니 ×× 동에 있는 뻐커스라는 빠로 와달라는 것이다.

영호는 술을 먹고 유흥을 하고 하는 방면에 결코 문외한이 아니다. 정다운 친구를 만나 주석이 어울리면 잘 마시고 잘 놀고 하는 축이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그런 방면에 탐닉하지는 아니하였다.

될 수 있으면 웬만한 기회는 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밤 허철의 청에는 두말 아니하고 응락하였다.

서광옥이에게 한바탕 우롱을 당하고는 속이 울분하기도 하고 한 판이니 허 철을 만나 혹 무슨 이야기라도 있으면 들을 겸 집을 나서 뻐커스로 갔다.

허철은 빠 뻐커스의 바닥손님이다.

그는 친구를 만나든지 술을 한잔 마시려든지 차 한잔을 마시려든지 대개는 이 뻐커스로 온다. 그런데 최근 이 주일 동안에는 더 빈번히 ── 아니 거의 매일 뻐커스를 오게 되었다.

그것은 새로 데려온 마담 하나가 그의 눈에 든 때문이다. 조선의 빠 ──라는 것이 정말 빠 ── 인지 티룸인지 카페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그 곳에 와서 있는 마담이라는 것도 마담인지 웨이트레스인지 분간이 서지아니한 다. 다른 데보다 이 뻐커스는 그러한 기분이 한창 농후하다.

향초라는 게 그 새로 왔다는 마담의 이름인데 데려오던 처음 며칠 동안은 관청에 잡아다 놓은 촌닭처럼 어리둥절하고 몹시 수줍어하였다.

그러던 것이 한 일 주일 지나서는 카페에서 수완이 능숙한 웨이트레스 이상으로 서비스를 잘했다.

그러한 중에도 허철에게는 더욱 유난히 은근하게 굴었다.

허철이가 와서 앉았는 동안이면 카페에서 당번 맡은 웨이트레스 이상으로 그 옆에 달라붙어 앉아가지고는 언제 그렇게 숙친해졌으며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저 소곤소곤 이야기도 하고 웃고 하는 것이다.

다른 손님이 아무리 무어라고 해야 들은 체도 아니하고 저 할 일을 하다가 허 철이 돌아가면 그때는 다른 손님에게 가서 어리광을 부리고 노염을 풀고하는 것이다.

허철은 굳이 패시브로 나온 것은 아니나 저편이 그렇게 곰살궂게 구니 차차 마음이 끌리다가 필경은 일 주일이 못하여서 찰떡 같은 사이가 되었다.

함 정 1 오늘 밤에도 허철이 들어와 앉는 것을 보기가 무섭게 향초는 딴 손님을 떼치고 쫓아왔다.

"숫덴 나하츠."

어디서 배웠는지 이렇게 귀떨어진 독일말로 인사를 하며 그 옆에 가 앉는다.

언제 보나 어설픈 허철의 얼굴도 향초의 보조개가 움푹 파이는 웃는 낯을 보면 알연히 화기가 떠돈다.

"아버지 좀 어떠세요?"

허철은 그의 부친이 요즈음 병이 나서 그래 그 시중을 하노라고 향초에게 이야기 하였던 것이다. 그는 최근의 사단 이외에는 가정의 이야기를 거의 다 향초에게 까바치었다.

원래 남녀가 만나 이야기할 때에 자기의 비밀을 먼저 이야기하는 사람이 옳게 반한 사람이니까.──

허철은 위스키를 섞은 홋트레몬을, 향초는 칼피스를 각기 한잔씩 앞에 놓고 앉았다.

 

"참 당신은 친구도 없우?"

무얼 생각했는지 향초가 마시던 칼피스잔을 내려놓으며 묻는다.

"친구?…… 없기는 왜?"

"있긴 멀 있어…… 늘 봐야 혼자 와서 혼자 오도카니 앉었다 가는걸!"

허철은 웃었다. 사실 같이 술잔이라도 먹을 친구가 몇은 없는 것이 아니나 생각하면 향초를 눈독들인 뒤로는 친구를 별로 만난 적이 없다.

"이렇게 우리 둘이만 '심미리하게 노는 것도 좋지만 그래두 가끔 양념으로 동무를 데리고 와서 놀기도 해야지."

"그러면 지금이라도 한 뭇 가량 붙잡어올까?"

"아이구! 그래선 무얼 하게."

향초는 일부러 놀라는 듯이 눈을 홉뜬다. 허철에게는 그것이 어떻게나 예쁜지 볼때기를 도닥도닥 해주고 싶었다.

"그저 하나나 둘이면 좋지."

"그러면 좀 불러올까?"

"."

"어떤 사람이 좋아? 나처럼 소설쟁이?"

"싫어! 부게끼나 가오해가지고…… 그러고 술 먹으면 주정하고…… ""허허 허허, 그럼 나버틈 미역국이로군?"

"당신은 빼놓고…… 그렇지만 당신도 좀 호가라까해져야 해요…… 인전 봄도 오고 그랬으니깐."

"호가라까해질 수가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소만."

허철은 우연히 턱을 어루만지며 한숨 끝에 다시 묻는다.

"그건 그렇고…… 그러면 회사원을 하나 데려올까?"

"못써…… 술을 먹어도 집에서 기다리는 마누라를 생각하고 위스키잔 수를 주판알로 알고 먹는걸…… ""그러면…… "하고 허철은 생각하였다. 같은 문사 축이나 회사원이 아니면 학교 교원인데, 그것은 향초가 더욱 싫어할 것이고…… 영호? 되었다.

"탐정을 하나 데려올까?"

"탐정?"

향초는 이상스럽게 눈에 광채가 빛난다.── 마치 그 말을 기다렸던 듯이.

"."

"좋아 좋아…… 내 그 탐정이란 어떻게 생긴 사람들인지 좀 구경할 테야?"

 

"탐정이래야 그저 사람이지 별다른 것 있나!…… 그런데 말이야, 그이가 오더래도 내가 탐정이라고 가르쳐 준 눈치를 뵈여서는 안돼요 응? 그저 시치미를 뚝 떼고 그냥 내 친구로만 아는 체해요."

영호가 옆에서 듣는다면 귀퉁이를 한번 쥐어질러 줄 소리다.

계집에게 반하여 이것 저것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을 시골 속담에 ' 소에게 물린 놈이라고 한다.

허철이가 정히 그 꼴이다.

좌우간 그런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이 그는 영호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일이 공교하게 되느라고 영호는 영호대로 머리가 혼란한데다가 분이 복받쳐 어쩔 줄을 모르는 판이요, 더구나 당장은 무엇 일에 손댈 것도 없는지라 허 철의 부르는 대로 서슴잖고 뛰어나오게 된 것이다.

영호가 빠 뻐커스에 자동차를 몰고 왔을 때는 아직 초저녁이라 그런지 손님은 몇 패 없고 한편 구석에 가 허철과 향초가 붙어앉아 오손도손 종알 거리 던 판이다.

그는 허철과 이곳에서 만나기는 처음이요, 또 전에 향초를 보지 못 했으므로 그 둘 사이가 가까와졌다거나 하는 것은 아직껏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셋이서 마주 앉아 몇마디 이야기하는 동안에 영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눈치 채고도 남았다.

2

가장 친한 친구라고 허철이가 영호를 소개하니까, 그렇게 가까운 친구를 두 고도 인제 겨우 소개를 하느냐고 향초는 짐짓 암상을 부린다.

위스키를 병째 가져다 놓고 영호와 허철은 통음을 하였다.

두 사람이 모두 술이 얼근하게 취하였다. 허철은 얼근의 도가 넘치어 폭 신 취하 였다.

그도 그럴 것이 본시 주량이 적지 아니한데다가 몸이 건강한 영호와 대작 하였으니 더 취할밖에 없는 것이다.

"영호, 영호, 나 나, 이 인제, 이 우리, , 향초허구 겨 결혼할 테야."

허철은 갠소롬한 눈으로 향초를 바라본다. 혀가 꼬부라져 말이 말을 아니 듣는다.

"어쩌면! 인제 평생에 호강을 한번 해보나보다!"

향초는 영호의 앞인지라 그 말을 달갑게 받기가 무엇한지 되레 비꼬아 넘긴다.

 

"호 호강? 그 그렇지…… 우리 영호는 둘러리서고…… ? 영호?"

"아무렴…… 결혼만 하게…… 둘러리는 내가 그림자까지 둘이라도 설테니…… ""그 그래…… 영호가 자 장가갈 때는 나허구, 햐 향초하고 두두 둘러리 서고…… ""그렇지만 나는 색시가 있어야 장가를 가잖나? 설마하니 그림을 놓고 결혼이야 하겠나?"

"새 색시?…… 여 여기, 햐 향초."

"아이구 망칙해라."

"허허허허."

이와같이 뼈도 없고 가시도 없는 잡담을 지껄이며 자정까지 술을 먹었다.

영호는 크나큰 대사건을 목전에 두고 유유자적하게 술을 먹기는 하나 한편으로 속이 쓰이는 데가 있어 술맛이 달지가 아니하였다.

향초의 청으로 드라이브를 하려 세 사람이 뻐커스에서 영호의 차에 올라탔다.

한 시간 가량 차를 달리고 나서 향초를 그의 거처하는 ×××아파트의 문 앞에 내려놓아 주었다.

허철은 비틀거리며 내려서서 향초와 악수를 한다.

", 나 내일이고 모레고 당신하고 저 백선생님하고 우리 집으로 초대 할테야."

향초가 이렇게 제의를 한다.

"초 초대? , 좋지."

"네 백선생님, 제가 초하대면 오시지요?"

"오고말고요."

영호는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 그러면 내일이고 모레고 전화 걸께 꼭 오세요."

"꼭 오랄 게 아니라 꼭 전화를 걸으시요."

향초를 작별하고 영호와 허철은 다시 딴 곳으로 빠를 찾아갔다.

한시가 지났으므로 대개는 문을 닫았지만 아직도 홍차 한잔에 제법 티룸기분을 내는 곳이 있었다.

영호는 그만 돌아가고 싶었으나 허철이가 더 먹겠다고 졸랐던 것이다.

집에서 부친의 신변을 살피고 하란 말을 지키지 아니한다고 나무라나 이미 곤 주가 된 허철에게는 그것이 마이동풍이다.

영호가 허철을 그의 집에 실어다 주고 계동 집으로 돌아온 것은 세시가 지 나서다.

그동안 집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이튿날 조간·석간은 역시 이번 사건으로 번화했으나 경찰의 수사는 별로 진전이 되어 보이지 아니하였다.

예에 의하여 신문은 경찰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경찰이 사상 취체에만 전력을 들여 왔기 때문에 일단 이러한 형사상 중대사건이 폭발되면 그 무능함이 백일지하에 폭로가 된다고.──

영호는 온종일 무료하게 지냈다.

상준이는 아직 돌아올 날이 멀었고 주먹코 일행이 그나마 무슨 단서를 얻어내었으면 좋겠는데 역시 소식이 없다.── 원래 큰 기대를 둔 것은 아니었지만.

석간신문을 다 둘러보고 저녁을 마친 뒤에 김서방을 숨겨둔 병원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아직은 별 이상이 없다.

여덟시쯤 해서 향초에게 전화가 왔다.

아주 구면같이 전화로 인사를 하는 것이다.

3

"그런데요……"

하고 향초는 요건을 말한다. 얼굴도 얌전하거니와 전화 목소리도 예쁘다고 영호는 생각하였다.

", 어제 저녁에 선생님하고 허하고 초대한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오늘 제가 마침 틈이 있어요. 그래서 허한테 기별했더니 곧 오겠다고 그랬으니까 선생님도 와주세요."

"네 고맙소. 갈 텐데 무어나 좀 흠씬 장만했소?"

영호는 농을 건넸다.

"아이구 아무것도 못했어요. 갑자기 한 시간 전에야 오늘로 작정 했으니 무얼 장만합니까? 저녁진지나 대접할렸더니, 지금 머 저녁은 다 잡수셨을테고…… 그러니 그냥 오셔서 노시다가 밤참이나 잡수셔요."

영호는 곧 가겠다는 대답을 하였다.

그는 혹시 하는 생각으로 오복이에게 문단속을 잘하라고 일렀다.

부엌문과 현관문만 닫아 걸면 용이히 집 안에 들어오기가 어렵고, 또 이 층에서 층계의 뚜껑을 닫고 복도에서 도장으로 내려가는 층계의 문만 닫아놓 으면 더구나 이층에는 범접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복이는 이층을 단속 하자니 불가불 응접실에 올라와 소파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영호가 ×××아파트로 향초를 찾아갔을 때에는 여덟시 반이 지났었다.

곧 온다던 허철은 아직 아니 왔다.

"허군 웬일이요?"

영호는 우선 들어서면서 허철을 찾았다. 허철이 없으면 이 초대는 무의미하고 곧 혐의쩍은 것인 때문이다.

"글쎄, 곧 온다고 그랬는데…… 인제 곧 오겠지요."

영호는 머뭇머뭇하다가 할 수 없이 향초가 권하는 대로 아랫목 자리에 앉았다.

간반짜리 조선방인데 도배를 새하얗게 하였다.

웃목에는 트렁크가 큰 놈 하나 작은 놈 하나, 그 옆에 가 경대 한 개, 그리고 금침. 이것이 도통 향초의 세간이다.

벽에는 얼룩덜룩한 옷과 때도 묻은 세수 적삼이 걸리어 있다.

"자취하오?"

영호는 권하는 홍차를 집어들면서 물어보았다. 허철이가 올 동안 아무 이야기나 하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 뒤꼍에 마루가 있는데 판장으로 둘러싸 가지고 그것이 부엌 이 랍니다."

"요기는 무엇이 들었소?"

영호는 무심코 등 뒤의 다락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때 영호는 보지 못 하였으나 향초의 기색이 잠깐 변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곧 천연스럽게 "텅 뷔었지요."

"그럼 애인을 숨기기 좋겠군."

"망칙해라…… 애인을 누구한테 숨겨요!"

"엔 아더 리베."

"아이 헤븐트."

"애인은 많을수록 좋다우."

"글쎄 그렇게도 해보았으면 하는데 어데 그렇게 많이 생겨야 말이지요."

"그까짓 애인쯤…… 만들려 들면 하로에 열 뭇이라도 못 만들어내요?"

"아이고 참…… 백선생님 점잖으신 줄 알았더니 입이 퍽두 걸으셔…… "향초는 발딱 일어서 부엌에 있다는 뒷문을 열고 나가더니 준비해 두었던지 과실 쟁반을 가지고 들어온다.

그는 얌전스럽게 과일을 벗겨 영호를 권한다.

 

비록 소유권등기가 되었고 또 빠의 여자일망정 노상 사내들끼리만 모여 모험으로 긴장되고 거친 생활을 하는 영호에게는 이렇게나마 이성과 대하여 잠시 노는 것이 결코 유쾌치 아니한 것이 아니다. 학희가 생각이 나서 속이 싱숭 거리 기는 하지만.──

과실을 먹고 나서 시계를 보니 아홉시가 몇 분만 지났다.

깜박 잊고 이야기하며 과실을 먹는 동안에 허철은 그래도 오지 아니한 것이다.

"이이가 웬일이야! 퍽도 실없네."

향초는 미안한 듯이 없는 허철을 푸념한다.

그때 문간에서 발짝 소리가 들리었다.

그러나 그것은 향초의 방 앞을 그냥 지나치고 만다.

영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까 향초가 한사코 붙잡아 앉히는 것이다. 제발 열시까지만 더 기다려서 아니 오거든 그때는 가라고 절절히 만류를 한다.

영호가 뿌리치지 못하여 도로 앉는 것을 보고 그는 혹시 뻐커스에 들르 기나 했나 전화를 걸어보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4

전화를 걸고 들어오는 향초의 얼굴에는 초조해하는 빛이 보인다. 그것 이허 철이 오지 아니하는 때문으로 여기는 영호는 되레 미안하여 화제를 돌리었다.

"고향은 대관절 어데요?"

"고향은 서울이랍니다."

"그런데 아파트 생활을 해요?"

"그러믄요…… 아무도 없으니까…… 그리고 상해에서 온 지 한 달도 다 못 되 는걸요."

영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상해의 캬바레 같은 데서 굴던 여자 거니 생각하고 "상해서 자랐소?"

"아니요…… 한 일 년 전에 갔지요."

"부모는?"

"어머니하고 오빠만 지금 상해 있어요."

"조선은 무엇하러 나왔소?"

 

"고국이 그리워서 나왔는데, 아이구 못견대겠어요…… 여비나 장만 하면 도루 가야지."

향초는 추연해서 이야기를 하나 그는 점점 더 안절부절하고 이상스럽게 당황 해 한다. 일 분 만에 한번씩 시계를 본다.

"가긴 왜 가요? 그대로 있지…… 좋잖소? 허군 같은 애인이 다 생기고…… ""! 말로 애인이지. 가령 제가 그이를 사랑한들 빠에서 만난 계집인데 남의 집 귀공자가 그것을 알어주며, 알어준들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그럴 리가 있나!"

하면서도 영호는 네가 옳게 생각하는구나 했다.

시계바늘이 아홉시 반을 바로 가리키자 향초는 일어서면서 몇번이나 주저 하던 끝에 "선생님, 위스키 한잔 잡수세요."

하고는 뒷문을 열고 나간다.

조금 있다가 쟁반에 위스키 한잔과 레몬을 한잔씩 놓아가지고 들어온다.

"킹 오브 킹인데 한잔 잡수세요."

하고 위스키잔을 집어 권한다.

영호는 위스키잔을 받아들었다.

"여보, 그렇게 존 놈이거든 병째 가져오구려…… 잔도 더 가지고."

하고 웃었다.

"아이 그렇게 하세요."

향초는 되 일어서서 나갔다.

영호는 옆을 보았다. 반씩도 먹지 아니한 홍차잔이 그대로 놓여 있다. 영호는 위스키잔에 혀끝을 대어보다가 어느결에 먹었는지, 또 무슨 필요인지 빈 잔을 얼핏 홍차잔에 두어 번 씻어서 손에 들고 있다.

향초가 위스키병을 들고 들어오며 영호의 낯꽃을 샅샅이 살피는 얼굴은 몹시 해쓱하고 손이 가볍게 떨린다.

"킹 오브 킹은 조선서 얻어먹기 어려워…… 오랜만에 먹으니 맛이 그럴듯한 걸…… 자 여기 한잔 더 부어주."

영호는 잔을 내어민다. 향초의 손에 든 병에서 꼴꼴꼴 소리가 나며 노란 술이 남실남실 부어진다.

영호는 잔을 그대로 내려놓고 이번에는 병을 받아 향초가 또 한 개 가져다놓은 잔에다 한잔을 붓는다.

", 나 혼자만 먹어서 되나! 한잔 같이 듭시다그려."

 

영호는 모르고 자기가 먹던 잔을 들어 향초를 주었다.

그러니까 향초가 다른 잔을 얼핏 집어 들며 "이게 내 잔이야."

하고 그대로 입으로 가지고 간다.

"! 그렇든가!…… , 프로진트?"

영호가 마시면서 술잔 너머로 보니 향초의 손끝은 가볍게 떨리나 그대로 쭉 들이킨다. 영호도 들이키었다.

"여보! 향초."

영호는 또 한잔 위스키를 받아들고 돌연히 취한 듯이 말을 하는 것이다.

"상해 가지 말구려…… 우리 이렇게 놀으니 좋잖소?"

"좋긴 좋지만 그래도…… "이렇게 향초가 대답은 하나 그의 정신은 어디 가 있는지 인제는 거의 십초 만에 한번씩 시계를 내려다본다.

"좋긴 좋지만 어때?"

"좋긴 좋지만 그래도 상해만 못해요."

"?"

"머리도 그렇고 또 인심도 사나워서…… ""허 따, 저 웬걸 시계를 저렇게 자꾸만 보나! 인제는 허군은 아니 왔으니 그냥 놉시다그려…… 대관절 멫시요?"

"삼십삼분……"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호가 들었던 위스키잔을 놓치고 양손으로 허공을 움키면서 "어 어 어."

하고 마치 경풍 난 사람같이 헤매다가 그대로 방바닥에 콱 엎드러진다.

엎드러진 영호의 몸뚱이에서는 경련이 일어나 뒤틀린다.

5

영호가 이와 같이 썩은 나무토막같이 딩굴어 넘어지는 것을 보는 향초의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오른다. 그의 전신은 사시나무같이 떨린다. 얼굴은 백랍같이 해쓱해지고 입술에는 검은 피가 맺혔다.

그는 와들와들 떨리는 손으로 다락문을 똑똑 두드린다.

조금 있다가 다락문이 열리며 그다지 출 수 없이 생긴 사나이가 둘이 눈 방울을 휘두르며 나온다.

 

뒤엣사람은 손에 큼직한 좁쌀 부대와 동바를 들었다.

영호는 그때 경련도 지나가고 완전히 쭉 뻗은 채 엎드러져 있다.

앞서 나온 사나이가 발끝으로 영호의 엉덩이 근처를 툭 걷어차며 혀를 끌끌 찬다.

"! 이 자식 똑똑한 체하고 덤벼싸더니, 쌍통 묘하다!"

"지금쯤 염라대왕이 조서를 받겠네."

뒤에 나오던 사나이가 한마디 거든다.

그러나 이 말에 향초는 눈을 휘둥그래가지고 영호의 시체를 내려다본다.

"아니 여보, 몽혼을 시켜서 데려간다드니 죽였어?"

"그래 죽였지…… 네가 죽였어."

앞서 나온 사나이가 이렇게 빈정거린다. 이 말에 향초의 눈은 확 벌어지고해 쓱 하던 얼굴은 새파랗게 사색이 질린다.

"내가 죽인 게 무어야! 나는 몽혼약이라길래 그런 줄만 알고 멕였지!"

"!…… 괜히 착한 체 말고, 옜다 이거 가지고 너는 상핸지 막덕인지 간다면서 어서 삼십육계 줄행랑이나 놓아라."

그는 지폐뭉치를 향초의 앞에 내던진다. 향초는 그것을 집으려고도 아니하고 발을 동동 구른다.

"글쎄 이 일을 어째! 사람을 속여서 사람을 저렇게 죽이게 했으니 이 일을 어째!"

"너더러 어쩌라니? 너는 인제 할 일 다 했으니 어서 짐이나 참겨…… 괜히 우물우물하다가는 교수대가 앞으로 걸어온다."

그 사나이는 눈을 불량스럽게 뜨고 향초를 꾸짖는다. 그러나 향초는 그것을 무서워하지도 아니한다.

"글쎄, 내가 이이허구 무슨 원수가 졌다고 저렇게 죽여! 나는 몰라, 나는 몰라. 나는 지금 경찰서에 가서 자수할 테야."

"머 어째?"

하고 앞서 나온 사나이는 달려들어 향초의 손목을 움켜쥔다.

"이년아, 가서 자수할 테거든 해봐!"

"자수했자 네게만 죄가 돌아온다…… 다소곳하고 어서 달아나거라."

벌써 좁쌀 부대 속에다 영호의 시체를 밀어넣고 있던 뒤에 나온 사나이가말을 한다.

"우리가 너더러 죽이라고 시킨 증거가 있니?…… 괜히 자발스럽게 굴다가는 큰코 다친다."

이 말에 향초는 아무 대답이 없이 눈을 내리깔고 섰다가 한숨을 푸 내어 쉬 더니 방바닥에 굴러져 있는 돈을 집어들었다.

"천 원 준다더니 이게 얼마요?"

"백 원이다."

"? 겨우 백 원이야?"

"그거나마 고맙다고 해라…… 그래도 우리 수령아씨가 인심이 좋아서 주신 거다. 한푼도 안 주기로니 네가 어데 가서 송사를 하겠니?"

향초는 어깨를 축 처뜨리고 웃목으로 가서 손재게 짐을 챙기었다.

그동안에 두 사나이는 영호의 시체를 좁쌀 부대에 넣어 아가리를 처 매고다시 향초의 이불에다 뚤뚤 말아놓는다.

그들은 얼굴의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마치 이사짐 챙기는 사람이 이불 보통이 한 개쯤 짐꾸리듯 심상히 하고 있다.

향초가 짐을 다 챙기었다.

그는 작은 트렁크를 들고 나서서 한 사나이는 큰 트렁크를, 그리고 또한 사나이는 영호의 시체를 뚤뚤 만 향초의 이불을 어깨에 메고 나섰다.

누가 보나 이사하는 짐으로밖에는 의심할 사람도 없거니와 마침 드나드는 사람도 없다.

향초는 사무실에 저녁때 미리서 잠시 시골 갔다 오겠노라는 말을 해둔 터라 역시 의심을 받지 아니하였다.

장교에서 기다리는 화물차에 트렁크 두 개와 이불같이 보이는 시체를 실었다.

향초는 다른 자동차로 정거장으로 나갔다.

경성역에서 화물차는 잠깐 머물러 향초의 두 개 트렁크만 내려놓고 그대로 용산 쪽으로 향하여 달리었다.

6

안동현을 향하여 떠나는 차는 십오분을 앞에 남기었다.

출찰구에서 차표를 사가지고 나선 향초는 그대로 서서 망설인다.

그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무거운 트렁크를 집어들고 삼등대합실로 들어갔다.

개찰구에는 장사진을 치고 사람의 떼가 몰려나간다.

그는 일어서서 정거장 밖을 향하여 몇 걸음 걸어가다가는 또다시 돌이켜 온다.

그러다가 결심을 한 듯이 안내계에 가서 전화를 빌린다.

 

빠 뻐커스의 전화통에서 허철의 취한 목소리가 들린다.

"기다리셨지요?"

"기다린 게 다 무어야…… 사람이 눈이 빠질 지경인데…… 어데 있소?"

 

"나 저, , 어데 좀 급히 가는데…… ""머 어째?"

깡총 뛰는 소리다. 초저녁부터 입때껏 기다리다가 겨우 전화가 온 게 또 갑자기 어디를 간다니 놀랄밖에 없는 것이다.

"어데 좀 가는데…… , 가서 편지 하지요."

"아니 그럼 먼 데 가나?"

"응 아니…… 인제 편지 보면 알아요…… 그런데 저, , 좀 부탁이 있는데요."

"응 무어야?…… 웬만하면 만나서 이야기하고…… 또 영호랑 초대도 하고 모레쯤 가지."

향초는 그만 가슴이 뜨끔하고 눈앞이 아찔해진다.

"! 이 죄를 어떻게 하나!"

하는 탄식이 소리없이 흘러져 나왔다.

"아니야! 아니야! 급해서 안돼요…… 인제 편지하지요."

향초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영호가 다만 '죽었다고만이라도 말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머리가 혼란하고 가슴이 두근거려 결단이 서지를 아니하였다.

삼 분을 남겨놓고 그는 그대로 플랫폼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 허 철의 아버지에게서 돈을 빼앗아다가 그 돈을 미끼로 영호를 죽이게 한 그 돈 백원을 품에 넣고.

이편은 영호의 시체를 실은 악당의 화물차.

방금 사람을 죽이어 그 시체를 싣고 파출소 앞도 지나고 순사가 가는 옆도 지나고 사람들이 들끓는 경성역의 광장에 머물기도 하면서, 그러나 아무 거리 낌도 없이 제 목적한 대로 용산으로 향하여 갔다.

제일인도교를 지나 왼편 언덕을 내려 모래사장으로 달린다. 남이 보기에는 모래를 실러 온 화물차다.

강가에다 바싹 대고 헤드라이트를 죽인다.

두 사나이가 이불을 벗겨버리고 좁쌀 부대의 시체를 떠메고 물가로 간다.

미리 구해놓았던지 보트 한 척이 기다리고 있다.

"자식 경치게 무겁기도 하다!"

"무거워도 인제는 제가 별수 있나!"

 

"놈이 무겁기는 한 놈이야!"

"수령아씨도 혀를 썰썰 내 두르시데…… ""그러고 저러고 간에 인제는 다 그만이다."

"인제는 일이 거진 되여가는 모양이지?"

"그럼…… 이 녀석만 아니었으면 발써 다 성공해 가지고 지금쯤 우리도 돈 만 원씩이나 얻어가지고 응 척…… 응 그럴 텐데 이 망할 자식이 그렇게 방해를 놓고 다녀서…… ""한 만 원씩 주실까?"

"주고말고…… 그런데 인제는 고놈의 계집애만 입을 빠개면 된다는데 그 년이 도무지 입을 봉하고 있으니까…… ""소용에 쓰고 나서 나 주었으면 좋겠더라."

", 발써 다 예약이 됐다네."

"그렇겠지…… 우리 같은 놈한테 그런 미인이 차례가 돌아올라구!"

이렇게 주고받고 이야기하며 시체를 보트에 실었다.

한 사나이가 보트에 올라탔다.

"다녀오게."

"…… 그런데 이거 혼자는 힘들겠는걸…… ""…… "어둡 기는 하나 수면으로 보트가 미끄러져 가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찰싹찰싹 보트는 소리도 크게 내지 아니하고 저어간다.

한 십 분 동안 저어가다가 그는 노를 꽂아놓고 위선 담배를 한대 붙여 문다.

보트는 강 한가운데 중류에 떴다.

담배를 붙여 문 그 사나이는 보트에 실어두었던 줄을 집어든다. 줄에는 추가 달리었다.

"네가 그렇게 나대다가 필경 고기밥이 될 줄은 너도 몰랐으리라."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추가 달린 줄로 시체를 담은 좁쌀 부대에 비 끄러 맨다.

7

보트의 그 사나이가 막 시체 담은 좁쌀 부대에 추 달린 줄을 비 끄러 매려 할 때에 갑자기 빡 하는 둔한 소리와 한가지로 부대가 좍 벌어진다.

시체가 살아난 것이다. 그들의 수령의 말이, 그 약을 다 먹이면 제아 무리 장사라도 삼 분 안에 즉사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보아라. 시체는 부대를 찢고 유유히 나오지 아니하느냐!

그 사나이는 그러나 그런 졸가리 있는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무서운 백영호…… 그가 다시 살아난 건 귀신이건 좌우간 보트 안에서 이렇게 만났으니 그저 혼비백산이다.

"!"

소리와 한가지로 그는 물로 뛰어들어갔다.

"허허허허…… 못생긴 놈!"

영호는 부대를 헤치고 나오며 이렇게 유쾌하게 웃는다.

물소리를 들었는지 화물차에서 헤드라이트가 좍 비쳐온다. 무심코 휙 돌아보니 눈부신 불이 쏘아오고 있다.

그 불빛에 영호를 알아보고 화물차는 그대로 대가리를 돌려 뺑소니를 친다.

수면에서는 저편으로 헤엄쳐 가는 대가리가 보인다.

영호는 보트로 쫓으려고도 아니하고 되레 이편 사장을 향하여 빨리 노를 저 었 다.

그는 그까짓 부하 한 놈쯤 잡았자 신통할 것도 없고 또 데리고 가서 그들의 소굴을 캐어내는 데나 쓰겠는데, 그러나 인목이 번다한 곳에서 공공 연하게 포로를 붙들어갈 수도 없고 한데, 그보다도 그에게는 향초가 필요한 판이다.

"배라먹을 년! 돈은 허철이더러 달래도 줄 것인데……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는 보트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달리었다.

영호가 살아난 것?

그거야 별로 신통할 것도 없다. 그는 살아난 것이 아니라 죽지 아니한 것이다.

향초가 한사코 붙잡는 데 벌써 그는 의념이 들었다. 어쨌거나 무슨 연극을 꾸미느라고 생각했다.

위스키를 가져오는데 단 한잔 가져온 것이 둘째로 의심스러웠다.

위스키를 병째로 가져오라고 내보낸 뒤에 혀끝을 대어보고는 재털이에 쏟았다. 그리고 홍차잔에다 씻어버렸다.

향초가, 이게 내 잔이야 하는 데는 먼저 잔에 독약이 든 것이 마침내 사실 임을 증명하였다.

요 계집이 무슨 연극을 꾸미나 보겠다고 이편도 연극을 했다. 죽는 체 한 것이다.

 

그랬더니 의외에도 큼직하게 서광옥의 부하가 다락에서 뛰어나왔다. 영호는 그 당장에 일어나 그들을 처치했겠지만, 그는 돌이켜 생각했다. 즉 그들이 시체 아닌 시체를 그들의 소굴로 가져갈 줄 영호는 생각했던 것이다.

부하만 잡았자 소용이 없다. 정작 서광옥이와 같이 잡아야지.

그러나 거기에 영호의 오산(誤算)이 있었던 것이다.

보트에 태울 때까지도 영호는 그것을 몰랐다. 보트에 태워가지고 강 건너 어느 곳으로 가져가느니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다가 '고기밥이란 말에 그는 비로소 이거 수장(水葬)을 하는구나!

깨닫고 뛰어 일어선 것이다. 부대 속에 넣을 때에 다행히 몸을 뒤지지 아니 했기 때문에 늘 준비해 가지고 다니던 잘 드는 칼로 부대를 박 찢고 나온것이다.

악당은 죽었는지 아니 죽었는지 한번 더 조사해 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실패를 하고 영호는 오산을 하였기 때문에 실패를 하고, 두 연극이 다 실패에 돌아갔다.

영호는 전차길로 나왔다.

향초가 행여 떠나지 아니했으면 일루의 희망이 있는 것이다. 즉 그의 입을 통하여 악당의 소굴을 알아낼 수가 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아까 그들과 이야기하던 말로 미루어 본시부터의 그 일파도 아니요, 임시로 교사(敎唆)를 받은 것이다. 받되 살인을 승낙한 것이 아니라 마취제 먹이 기를 승낙한 것이다.

따라서 그렇게 나쁜 여자는 아니다. 되레 선량한 구석이 있는 좋은 여자다. 잘 길들이면 쓸모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영호는 우선 급한 대로 전차에 뛰어올라 용산까지 와서 택시를 잡아탔다.

아까 그와 같이 주저했으니까 역시 떠나지 아니하고 정거장에서 망설이고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또 경찰서로 자수를 하러 갔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면 안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영호의 마음은 조급하였다.

8

안동현 기차가 떠난 지는 벌써 십 분이나 지났다.

영호는 우선 삼등대합실을 둘러본 뒤에 일이등대합실로 들어섰다.

있다! 한편 구석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는 게 틀림없는 향초다.

영호는 가만가만 걸어가 그 앞에 우뚝 섰다.

 

무심코 고개를 쳐들던 향초는 '!’ 놀란 소리를 치며 엉거주춤 일어선다. 그의 얼굴에는 극도의 공포가 떠돌고 있는 것이다.

몸은 사시나무같이 떨린다. 싱그레 웃고 섰는 영호가 그에게는 귀신으로밖에는 보이지 아니한 것이다.

"살었어."

목소리 보드랍게 말하는 영호의 이 한마디에 향초의 얼굴에서는 공포의 빛 대신 기쁨이 확 피어오르며 그대로 일어서서 영호의 품에 몸을 내던지었다.

그리고 영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흑흑 느껴 운다.

남이야 보건 말건 무얼 상관하랴! 보았자 애인끼리 무슨 사단이 있는 줄쯤 알고 구경이나 하겠지.

영호는 향초가 안기는 대로 그러안고 등을 다독다독하여 주었다.

영호의 마음은 무한히 기뻤다. 무엇이?

다른 것이 아니다. 향초의 마음이 지극히 고움을 안 때문이다.

만일 향초가 마음이 그와 같이 곱지 못하다면 그는 놀라는 다음 순간 영호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을 생각하여 더욱 무서워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 사람의 항용 마음자리다.

그러나 향초는 영호가 살았다는 말을 듣고 무엇보다도 반가와 ── 반가 움이 넘쳐 남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의 품에 안기어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그럴 리도 없지만 혹시) 영호를 사랑하는 때문에 그가 죽지 아니 한 것을 반가와하는가?

그러나 언제 영호에게 정이 갈 기회도 없으려니와 그에 대하여서는 나중에 영호에게 한 말로 미루어도 정이 들지 아니한 것을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러니까 다만 그저 다만 자기가 잘못 꼬임에 빠져 죽인 줄 알았던 그 사람이 살아왔다는 것이 반갑고 기뻤던 것이다.

영호는 맑은 가을하늘 한 장만 떠도는 흰구름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향초를 데리고 일단 ×××아파트 앞까지 가서 그곳에 내버렸던 그의 자동차를 몰아 계동으로 올라왔다.

그동안까지 향초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 아무 말도 묻지도 않고 하지도 아니하였다.

마침 경찰서의 미하리도 없고 또 서광옥이의 부하가 망보는 기색도 없어 안전하게 향초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층 응접실에서 영호는 향초와 마주 대하여 앉았다. 비로소 보니 그의 손에는 일단 펀치로 찍은 차표가 쥐어진 채 있는 것이다. 플랫폼까지 나갔다가 도로 들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왜 안 가고 도루 나왔소?"

영호는 될 수 있는 대로 보드랍게 물었다. 향초는 머뭇머뭇하다가 겨우 대답을 한다.

"경찰서로 자수하러 갈려구 그랬어요."

"여보 향초?"

하고 한참만에 영호는 다시 말을 하였다.

"험한 데로 많이 돌아다니든 당신이 어쩌면 맘이 그다지 곱소?"

맘이 곱다니 조롱하는 말로 알아들었는지 향초는 더욱 고개를 숙인다.

"아니야, 조롱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는 말이요…… ?"

"돈에 욕기가 나서 사람을 죽이려 드는 년이 맘이 고와요?"

향초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아니한 채 조그만 소리로 대답을 한다.

"아니 당신의 마음은 그 허물을 씻고도 남을 만큼 곱소. 돈에 가령 한때 욕심이 났다더래도 그것은 큰 허물이 아니요. 모든 것을 모르고 한 일이니까…… 아무 염려 마오. 이 일을 나는 절대 비밀을 지켜 입밖에 내지 아니 할 테니…… "향초는 비로소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러면 저를 용서하세요?"

"용서 여부가 없소. 허물치 아니하는데 용서가 어데 있겠소. 다만 한가지 사무적으로 들어볼 게 있소…… 대관절 향초를 그렇게 꼬인 사람이 애초 에누구며 어데 가서 만났소?"

영호에게는 지금 당면하여서 무엇보다도 간한 일이다. 향초의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큰일이 좌우가 되는 것이다.

9

향초의 대답은 영호를 실망케 하였다.

향초의 그동안의 이야기는 이러하였다.

향초가 상해로부터 돌아온 것은 지금부터 한 달 전이요, 그가 신 문 광고를 보고 뻐커스에 찾아가 채용된 것이 삼 주일 전이다.

뻐커스에 새로 채용된 지 며칠 아니 되어 웬 대학생 하나가 왔었고 그는 그 이튿날 향초의 아파트를 찾아왔다.

그는 여러 가지 그럴 듯한 말로 둘러대어 가지고 뻐커스의 바닥손님인 허 철의 일동일정과 그 가정 소식을 알아내어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그 보수로 한 달에 삼십 원씩 주겠다고 하며.──

 

향초는 그것이 범죄에 관계된 것인지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으나 그래도 어쩐지 맘이 내키지 아니하였다.

그리하는 동안에 그는 허철과 되레 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학생이 가끔 찾아와 부탁한 것을 묻지만 향초는 사실대로 대어주지 아니하고 어물어물 해 넘기는 때가 있었다.

그러자 바로 그저께 밤 늦게 그 학생이 찾아와서 이번 사건을 부탁하였다.

그것은 그 학생의 누이 하나가 있는데 허철과 아주 절친한 백영호라는 탐정과 전에 연애관계가 있었다.

한데 백영호는 우연한 일에 오해를 하고 손을 끊자 자기 누이는 그만 병이 들어 누웠다. 병은 매우 중한데 최후의 소원이 백영호와 한번 만나 시 원스 레 이야기라도 했으면 하는 것인데 백영호는 그 청도 들어주지 아니한다.

그러니 불가불 강제로라도 잡아가자면 향초의 힘을 빌어 몽혼약을 먹여가지고 떠메어가는 것이 가장 묘책이다. 만일 일이 여의하게 성공이 되면 돈천 원을 줄 테니 돌아간다는 상해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향초는 그만 것이면 맘에 거리끼거나 어려울 것이 없겠으므로 승낙하였다.

그래서 구체적 실행 방법이며 모든 것을 그 학생은 가르쳐 주었다. 몽혼약이라는 흰 가루약도 가져다 주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영호는 잠잠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학생의 인상은?"

"키는 선생님만하고 선생님처럼 어깨통이 떡 벌어져 힘차게 생겼고 얼굴은 갸롬하며 표정이 또렷또렷하고 그리고 눈이 광채가 영롱하고."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는 하나 그것만 가지고는 별로 재료가 되지 아니 한다. 그러나 인상으로 미루어 그가 서광옥이의 오랍동생이라는 서광 식이인 것만은 분명하다. 안국동우편국에서 속달을 부치던 그요, 허준이를 찾아가 교섭을 하던 그다.

좌우간 그 이야기는 그만 해두고 인제는 향초의 처치다.

허철에게 정말 중매를 붙여주고 싶으나 두 사람의 진정이 어느 정도의 것인지 알 수도 없고, 또 허철의 부친 허준이가 반대를 할 것이고…… "허 군을 사랑하오?"

영호는 웃으면서 물어보았다. 향초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아니한다.

"주저할 것 무엇 있소? 어데 진심대로 이야기를 해보구려."

향초는 숫색시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가 영호의 재촉에 겨우 대답을 한다.

"이렇게 험한 데서 구는 여자가 누구한테 맘이 있은들 섬뻑 정을 주겠 읍니까?…… 우리 같은 여자는 그야말로 노류장화로 누구나 장난삼어 꺾어 보 려 드는데 진정도 모르고 섬뻑 그랬다가…… ""그러면 지금까지 허군을 사귄 것이 전연 가면이란 말이지?"

"노상히 그렇지도 않어요…… 이래서는 안되겠다 안되겠다 하면서 질질 끌려 들어간 것이 지금 생각 하면…… ""그러면 지금과 같은 환경만 아니면 맘을 턱 놓고 그 감정을 길러나갈 수가 있겠구만?"

"글쎄요…… 그렇지만 저는 이번에 선생님한테 큰 은혜를 입었으니까 선생님만 허락하신다면 한평생 선생님 옆에서 시중이나 들어 드리고……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향초의 귀때기는 새빨갛게 붉어오른다.

"허허허허."

영호는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유쾌하게 웃었다.

"그래…… 그러고 내가 만일 결혼을 하자면 OK하겠단 말이지? 응 그렇소?"

영호는 향초에게 얼굴을 가까이하며 다가묻는다.

10

영호의 재삼 재우쳐 묻는 말에 향초는 겨우 "그거야 어데 바랄 수 있나요."

하고 만다.

"?…… 내가 왕후장상이요? 그렇잖고 남보담 무어 특별한 게 있소?"

"그건 그렇지만, 저는 그늘에서 살어오는 사람인데…… ""내가 그런 것을 모다 초월한다면?"

"저는 몰라요."

여자가 대답을 못할 일에 다들리면 평상시는 모른다고 하고 악에 받쳤을 때는 날 죽여라…… 하고 외치는 게 상례다.

향초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OK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마디만 더…… "하고 영호는 다시 묻는다.

"이게 좀 말이 노골적으로 들어가는데…… 그러나 무어 거리낄 것 있소…… 대답하오…… 향초가 내게 은혜를 입었다는 의리감(義理感)으로 그러는 것이지 내게 무슨 정이 있어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향초가 영호를 사랑하고 있다면 아까 정거장에서 영호의 살아온 것을 보고 반겨하며 운 것이 영호의 추측대로 단순히 마음이 착해서가 아니라 애 인을 다시 만났다는 그 기쁨이겠으므로 영호의 향초에 대한 호감은 환멸의 비애를 느끼게 될 것이다.

향초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겁하지 않고 대답을 한다.

"그거야 언제 그럴 겨를이 있었어야지요?…… 그러고 진정이란 것은 어데 그렇게 두 군데 세 군데로 갈릴 수가 있나요?"

영호는 무거운 짐을 벗어논 것같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학희의 환영이 그의 가슴 속을 통차지하고 있는 이때에 만일 향초의 감정이 그 속을 비 집고 들어온다면 그것은 영호에게 있어서 여간 마음이 무거운 일이 아니다.

그러고 또 한가지 향초의 심성이 착하다는 관찰이 어그러지지 아니한 것까지 해서 영호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가뿐해졌다.

그리하여 그는 향초에게 설명을 하였다.

연애 지상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지만 의리와 애정은 딴 물건이다. 의리라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는 애정을 무시할 때도 있지만 지금의 경우는 다르다.

향초가 조그마한 영호에게의 의리로 해서 허철에게 향해진 애정을 짓 밟으려는 것은 한 센티멘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허철은 영호의 가까운 친구다. 조그마한 의리를 미끼로 친구의 애인을 빼앗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의리 부동한 짓이다.

설명을 하고 나서 영호는 몇가지 다시 주의를 시키었다.

다른 데로 가지 말고 당분간 영호의 집에 있을 것, 또 허철은 물론이요 누구에게든지 눈 띄우지 아니하도록 될 수 있으면 방안에 들어 있을 것, 이번 사건은 아무에게도 절대로 입밖에 내지 말 것.──

향초는 허철과도 만나지 말라는 것이 좀 이상하였으나 그대로 전부 승낙 하였다.

아래층 식당방을 치우고 향초를 거처하게 하기로 하였다.

식모는 이제 주부(主婦)가 생겼나 하여 눈이 휘둥그래지고, 오복이는 학 희에 대한 것을 아는지라 입을 뛰 내어밀고 즐겨하지 아니한다.

영호는 향초를 데리고 아래층까지 내려가 치워놓은 식당방을 안내하여 주었다.

"큰 방에 혼자 거처하긴 허전허전하겠지만."

이렇게 말을 하고 올라오려는데 향초가 부른다.

"이건 어떻게 해요?"

하고 지전뭉치를 내어보인다.

"그 녀석들이 주고 간 것인데…… " "그대로 두어두구려."

"싫여요."

"괜찮아요…… 그게 실상은 놈들이 허군에게서 협박해서 뺏어온 돈이니까 잘 두었다가 허군을 주든지, 인제 결혼할 때에 비용으로 쓰든지 맘대로 하구려."

끝에 말에 향초는 얼굴을 붉히면서 아무 말도 아니한다. 그러나 허철을 만나지 말라면서 결혼할 때 비용으로 쓰라는 것이 이상도 하지만 속으로 기쁘 기도 하였다.

그렁저렁 한시가 되었다. 영호는 응접실로 올라왔다가 막 침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현관문이 퉁탕거린다.

목소리가 분명 허철이다.

무슨 사건이 또 생겼기에 이렇게 밤 늦게 쫓아온 것이거니 생각하고 영호는 손수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1

영호는 허철이가 그와 같이 떠들고 달려드는 것이 마땅치 못하였다.

그저께 허철이가 찾아와서 협박장 일건을 이야기하고 간 것을 악당들은 그날로 알아내어 가지고 즉시 향초를 꾀어서 그와 같은 흉계를 꾸몄으니, 말 하자면 영호나 허철이가 그들의 완전한 감시하에 있다고 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할 말이 있거든 전화로 불러내어 조용한 곳에서 만나든지 하지 않고 이렇게 야밤에 동네방네 떠나가게 떠드는 것은 일에 대해서는 여간한 지장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허철은 술이 곤주가 되게 취하였다. 그는 이층에서 내려오는 영호를 보고는 현관마루에 펄썩 주저앉으며 "우 우리 향초가 어데로 다 달어났어."

하고 방금 울듯하다.

영호는 골이 슬그머니 났다. 그래도 무슨 긴요한 사건이나 생긴가 하였더니 이렇게 요란스럽게 떠들어놓고는 기껏 하는 소리가 그 소리라니!

"이 사람아, 내가 향초를 훔쳐왔단 말인가? 어데로 빼돌렸단 말인가?……

그렇게 주의를 시켜도 시키는 일은 아니하고 지금 이판에 그것쯤 가지고 이렇게 요란스럽게 구나!"

영호가 이렇게 닦아세우나 허철은 되레 어리광을 피우듯 한다.

 

"아니야 아니야…… 여 영호, 자 자네나 하니까 내 내가 이렇게 이러지…… …… 우 우리, 햐 향초가 정거장에서 저 전화를 했어…… 어데가 간다고…… 응 찾어주어 영호! 나는 못살어."

영호는 주정뱅이에게 성을 낼 수도 없고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살살 타일러 돌려보내되 연극이나 한바탕 꾸미어보리라고 작정하고 응접실로 데리고 올라갔다.

"향초가 꼭 있어야겠나?"

영호가 묻는 것을 보고 허철은 취한 중에도 바짝 당기는 모양이다.

". 꼬 꼭."

"찾어주까?"

", 어데 있어?"

정신이 바짝 들어가지고 말도 똑똑히 한다.

"나도 아직은 몰라…… 그렇지만 자네가 내 말만 꼭 들으면 찾어주지."

허철은 더욱 귀가 솔깃하여 바싹바싹 다가든다.

"?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이든지 다, , 듣지…… 우리 집 재산이 부채 정리하고라도 사십만 원은 되니까 그 놈 반이라도…… 아니 다라도 내놓지…… 무슨 말이야?"

"첫째 내가 허락하기까지 일체 밖에 나오지도 않고 술도 아니 먹을것…… ""OK."

"둘째 자네 아버지가 십오 년 전에 누구에게서 뺏은 듯한 그 이십만원을 그때의 임자가 나서면 내놀 것."

"OK."

"."

"……"

"안 지키면 향초를 찾어다가 딴 데로 시집보낼 테야 ""그 대신 자네가 못 찾어놓으면?"

"자네 앞에서 내 눈을 뽑지."

"OK."

"그러면 어서 가서 자게…… 그런데 어르신네 병환은?"

"아 참."

하고 허철은 문득 생각이 나서 대답을 한다.

"어제 저녁부터 단단히 앓으시는데…… ""무슨 증센데?"

 

"한의를 멫 보였더니 심화 병이라고…… ""좌우간 어서 가서 약시중도 하고 절대로 밖에 나오지 말게."

영호는 현관까지 허철을 데리고 내려왔다.

"자네는 그럼 어데 간지 알고 있잖나?"

허철은 신발을 신으면서 묻는 것이다. 영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허철을 보내고 식당방 문을 열고 보니 향초가 우두커니 벽에 기대서서 앞벽을 정신없이 바라본다.

"못 만나서 그리워하는 것도 한 행복이랍디다. 좀 참으시요."

영호는 웃으며 문득 생각난 경구(警句)로 위로를 해주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튿날은 영호가 모처럼 아침 운동과 산보를 하고 돌아와 부엌을 굽어다 보니 향초가 식모를 데리고 에프런 맵시에 주부인 듯 일을 하고 있다.

식모는 속도 모르고 아씨라고 연해 부르며 의심도 아니하고 주부 대접을 한다.

오정때쯤 하여 여주를 내려간 상준이가 의외에도 빨리 돌아왔다.

失 足[ 실족] 1 영호는 상준이가 어리기는 하나 영리한만큼, 가령 큰 수확은 없다더라도, 그렇다고 맨손으로 돌아오지는 아니할 줄 믿고 있었다.

그는 우선 오복이의 횡액을 위로하고 ── 여주서 신문 보고 퍽 놀랐다고 한다. ── 응접실로 올라와서 다녀온 요건을 영호에게 보고하였다.

서광옥의 친정은 아주 몰락이 되었다.

그의 부친은 연전에 죽고 노모만 달랑 혼자 동리 사람의 선심을 입어 살아가고 있다.

외아들 서광식은 서울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연전에 동경으로 건너갔다.

어느 사립대학을 다닌다고 하나 그는 그의 부친상을 당하고도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그가 동경으로 건너간 뒤로는 일체 음신이 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 서울서 돌아온 사람의 말을 듣건대 길에서 언뜻 서광식이 비슷한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서광옥이는 그가 강화로 시집을 갔다가 일 년이 못되어 도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그냥 그의 남편 이재석이보다 앞서 종적이 없이 사라졌다. 누구의 말에는 그가 남편의 뒤를 쫓아 상해로 갔다고도 하나 실상은 사실이전도 되었다.

이래 십오 년간 소식이 없다가 약 두어 달 전에 조선으로 돌아오겠다는 간단한 편지 한 장이 그의 노모에게로 왔다.

그 뒤에는 다시 소식이 없으므로 돌아왔는지 아직 상해에 그대로 있는지 알지 못한다.

상준이는 그 편지와 또 서광옥이나 서광식이의 사진을 그의 노모에게서 빼앗아내려고 각가지로 애를 썼으나 드디어 얻지 못하였다.

상준이는 더 머물러 있자, 일이라는 것은 사진이나 필적 같은 것을 얻어내는 것이겠는데 그것은 가망이 없고 해서 일단 돌아왔다는 것이다.

상준이의 보고는 그것뿐이다.

영호에게는 그다지 반짝하는 보고는 아니라도, 그러나 아니 간 것보다는 나은 편이다.

첫째 서광옥이가 그 학생이라는 것이 사건의 중심 인물인 것을 인제는 의심 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둘째로 서광식이가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니, 그것을 졸가리삼아 그의 사진이라도 얻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영호는 우선 친구 가운데 ××고보를 졸업한 사람을 찾아내어 그 교우 회보를 빌어왔다.

작년 가을에 발행한 것인데, 서광식이는 재작년 즉 제이십삼회에 가 그 의 이름이 박혀 있다.

그리고 현재 동경의 ××대학 의과(醫科) 재학이라고 씌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가 중도 퇴학을 하고 돌아온 것을 알 수가 있다.

영호는 경성에 주소가 있는 서광식이의 동기동창을 추려가지고 연줄 연줄 여러 곳에 청질을 하여 그 이튿날에는 그들의 졸업기념 앨범이 수중에 들어왔다.

서광식이의 인상은 향초가 말하던 것과 꼭 같았다. 그의 누이 서광 옥이의 사진과 비교해 보니 남매인만큼 모습이 비슷하였다.

영호는 넉 장을 복제(複製)하여 그중 한 장은 두어두고 석 장은 주먹코 일행을 불러다가 나누어 주었다.

변명인지 흰소리인지 모르나 그들은 그야말로 발에 티눈이 박히도록 돌아다닌다고 공치사를 하였다.

그중 키 작은 치는 정말인지 모르나 바로 어저께 진고개 ×× 백화점에서 서광 옥이와 같은 여자를 발견하였는데 뒤를 따르다가 그만 혼잡한 군중 속에서 그림자를 놓쳤다고 한다.

귀중한 이틀 동안이 별로 소득이 없이 무료한 가운데 지나갔다.

신문에서는 그동안의 사실을 가지고 여전히 떠들기는 하나 경찰의 수사 가조 금도 진척된 보도는 없다.

이제는 신문들이 제가끔 자기네의 추측대로 얼토당토 아니한 의견을 써놓기 시작한다. 그중에는 그 노인은 자살을 한 것이요, 두 사람의 남녀는 그의 사위와 딸인데 살인의 혐의를 피하여 종적을 감춘 것이라고 쓴 신문도 있다.

이튿날 …… 가짜 소포가 영호의 손에 들어온 지도 열흘이 되고 학희가 잡혀간 지도 일 주일이 가까이 되는 날이다.

영호는 몸에서 좀이 쑤시건만 어찌할 바를 몰라 응접실 소파에서 딩굴고 있는데, 허철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마침 오정때였었다.

"백영호"라고 찾는 그의 전화 소리는 매우 당황하였다.

2

"나야 왜 그래?"

영호는 전화를 받았다.

"영호야? 응 저 …… 아이구 숨차 …… 글쎄 사십만 원 재산을 지니고 서 울 바닥에서 살면서 전화 하나도 안 거는 우리 아부지란 참! 에 참!"

"아니 그건 무슨 소리야?"

당황히 찾아가지고는 요건은 젖혀놓고 자기 아버지가 전화 가설을 아니 한 푸념을 하는 품이 미상불 허철의 허철다운 면목이 나타난다.

"응 참 …… 지금 곧 좀 와 …… 내 자동전화까지 뛰어오느라고 숨이 차서 죽겠구만 …… 자동전화로 온 건 잘했지?"

영호는 실소를 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당황하노?

"그래 삼십 분 안에 가봄세."

"…… 급해."

영호는 전화를 끊고 상준이를 시켜 인력거 하나를 부르게 하였다. 될 수 있으면 차랄지 차부랄지 깨끗한 놈으로.

그동안에 영호는 침실로 들어가 변장을 하였다.

얼굴 모습을 조금 변하고 얼굴을 해맑게 하고 윗수염을 채플린 수염으로 해 붙이고 양복을 딴 놈으로 갈아 입고 그러고 손가방을 들고 ── 이 만하 면 첩경 의사로 보았지 영호가 변장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허 철의 집 앞에서 늘 망을 보는 악당에게도 주의를 주지 아니할 것이다.

변장이 그럴 듯한가 아니한가 시험하려고 아래층 식당 방문을 슬그머니 열고 고개를 들이미니 손수건 끝에 수를 놓느라고 잠착하고 있던 향초가 눈 이 둥 그래가지고 벌떡 일어선다.

"누구세요?"

"."

하고 영호는 목소리와 말씨까지 변하였다. 인력거가 아직 아니 왔으니 그동안 장난이라도 해보려는 것이다.

", 여기 음, 향초라는 여자가 있나요?"

"…… , 그런 사람 없어요."

향초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없어요? 당신이 바로 향초라는 여자 아니요?"

영호는 좀 딱딱거렸다. 그러니까 향초도 지지 않고 기승을 낸다.

"당신은 누구여요? 웬 사람이에요?"

"나요? 그거야 종차 알고 이리 좀 나오우."

이 말에 향초는 갑자기 천장을 향 하여 "선생님, 선생님."

하고 날카로운 소리로 외친다.

영호는 그만 허허허허 웃고, 향초의 외치는 소리에 오복이와 식모가 뛰어나왔다.

오복이는 영호를 알아보고 빈들빈들 웃고 섰고, 식모와 향초는 오복이가 웃는 것으로 안심은 하였으나 웬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두리번한다.

향초는 한참만에야 겨우 영호를 알아보고는 "아이구머니!"

하고 방바닥에 주저앉는다.

"거 무슨 짓이세요! 사람을 놀래게 해두 …… 나는 웬놈이, 아이 참, 웬 사람이 나를 붙잡으러 온 줄만 꼬빡 속았지!"

식구들은 한동안 웃음으로 꽃이 피었다.

영호가 인력거를 타고 허철의 집에 이르렀을 때에는 대문간에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이 기회에 한번 허준이나 보아 두리라고 인력거꾼에게 가방을 들려가지고 그대로 사랑 마당으로 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부대한 얼굴이며 반만 벗어진 반백의 머리며, 안색이 초췌는 하였으나 그래도 혈기 좋아보이는 낯빛 …… 이런 것이 모두 전형적 부르조아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영호는 이 영감이 이렇게 혈색이 좋으면서 어찌 후취나 첩을 얻지 아니하나 싶어 이상히 생각하였다.

의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허준은 그 아들더러 청하지 말라고 한 의사를 기어이 청했느리라 생각했는지 상을 찌푸렸다.

청진기도 없고 검온기도 없는 가짜 의사 영호는 괜히 맥을 짚어보는 체 도하고 가슴을 타진도 해보고 눈두덩도 뒤집어보고 하다가 그대로 방을 나왔다.

영호가 나오자 영감이 성난 소리로 "거 누구 없느냐?"

하고 부른다.

"."

대답 소리와 함께 안에서 나오는 허철과 영호는 사랑 댓돌에서 마주쳤다.

허철은 어리둥절하다가 겨우 영호를 알아보고는 그대로 사랑으로 들어가 한바탕 화풀이를 받고 나왔다.

허철은 영호를 자기의 거처하는 안사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요건은 젖혀놓고 부우부우 영호를 원망한다.

3

허철의 말을 들으면 그 부친은 병중에 화가 나면 어린애처럼 약을 먹으려 하지 아니하는 괴망스러운 성벽이 있다는 것이다.

허허 웃고 나서 영호는 말을 하였다.

"이 사람아, 이것도 필요가 있어 하는 노릇일세 …… 한데 대관절 급 한일이란 무엇인가? 또 애인이나 찾어달라고 떼나 쓰잖겠나?"

"이걸 보게."

허철은 책상서랍 속에서 속달편지 한 장을 꺼내어 영호를 준다.

첩경 보아도 그것은 요전 것과 같은 협박장이다.

"번번이 안되었지만 알 수 없는 사정이니 오천 원만 요전과 같이 오늘 밤새로 한시에 한강 건너 한강신사 들어가는 길로 가지고 오시오. 만일 병석에서 일지 못하겠거든 아무 내용 이야기를 하지 말고 자제를 시켜도 좋소.

그곳에서는 역시 학생복에 사방모자를 쓰고 휘파람으로 수심가를 부르는 사람이 저편에서 올 테니 말없이 전하게 하시오."

사연은 이뿐이다. 봉투의 일부인을 보니 광화문우편국에서 열한시에 맡은 것이다.

"자네 어르신네가 이걸 보셨나?"

영호는 편지를 보고 나서 물었다.

"아니, 마침 내가 받어서 …… ""잘 되었네 …… 만사는 다 내게 맡기게."

"그래도 돈은 가져다 주어야지?"

"돈이 그렇게 흔하거든 그야말로 전화나 한 개 가설하게."

"그래도 이 사람아, 그놈들이 나중에 …… ""염려 말어 …… 염려 말고 자네 사진이나 멫 장 내놓게."

허철은 웬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앨범을 내어놓는다.

영호는 그중에서 정면으로 박인 것, 왼편으로 박인 것, 바른편으로 박인것, 전신을 박인 것 해서 허철의 사진 넉 장을 떼어 포켓 속에 집어 넣었다. 그는 일어서면서 허철에게 당부를 하였다.

"오늘 밤 세시 안으로 내가 오든지 무슨 기별하든지 함세 …… 그런데 물론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내가 세시까지 오지도 않고 소식도 없거든 자동차 한 대로 미리 준비해 놓았다가 자네 어르신네를 뫼시고 인천 월미도 호텔로 가서 있게 …… 병환 중에 좀 무리겠지만 꼭 그렇게 해야 하네."

"아버지가 가실려고 하실까."

"그대로 있다가는 큰일이 난다고 좀 속이게그려 …… 그래 거기 가서 내가 무슨 기별을 할 때까지 꼼짝 말고 있어야 하네 …… 만일 어르신네가 안 들으시거든 강제로 떠메고라도 가야 해?"

허철은 무슨 불길한 예감이 드는지 불안한 빛이 얼굴에 떠오른다.

"아모 염려 말아요. 염려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요 …… 지금 이판에 모험을 아니하고야 일을 성공할수 있나!…… 그러고 깜박 잊었군 …… 오늘밤 열두시 반쯤 되거든 자동차를 불러 타고 한 바퀴 휙 돌아서 한시 반쯤 집으로 돌아오게. 그 차를 그대로 집 뒤꼍에서 기다리게 하는 게 좋겠지 …… 잊지 말어 응? 세시 …… 그리고 아버지 모시고 나갈 때 뒷문으로 나가고…… "허 철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리고 그는 영호의 눈치를 살피다가 주저 하던 끝에 묻는다.

"참 저 향초, 어떻게 그 뒤에 소식이나 있나?"

허철의 가뜩이나 야윈 볼이 더욱 홀쭉해지고 우울한 그의 표정은 원인이 향초를 놓치고 기다리는 데 있는 것이다.

영호는 이렇게만 되어가면 한가지 연극은 성공에 가깝다고 생각 하였으나 겉으로는 그저 흔연하게 방금 그 방면으로도 활동하는 중이라고 대답 하였다.

"자네만 믿네."

허철은 맥없이 말을 한다.

", 염려 말게 …… 지금쯤 어데서 인제 자네를 줄 양으로 손수건에 수를 놓고 있는지도 누가 아나!"

"그랬으면야 …… ""자네는 급한 일을 당하면 너무 허둥대니 오늘 저녁은 좀 침착하게 일을하게."

영호는 신신 부탁을 한 뒤에 허철을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김서방을 맡긴 병원에 들러 그를 휘장 덮은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호가 지리하게 기다리는 해가 지고 집안 식구가 식당방인 향초의 방에 모여 저녁을 먹으려고 하는데 주먹코 일행 중의 키 큰 치가 헐헐하고 달려왔다.

4

현관으로 나오는 영호를 보고 키 큰 치는 밑도 끝도 없이 "만났어요."

하는 것이다.

"어데서?"

영호가 급히 물었다. ── 이 싱겁게 생긴 친구가 그래도 제법이로구나 생각 하면서.

"대학병원 앞에서요."

"대학병원 앞에서?…… 사내를? 계집을?"

"사내요."

영호는 이 대학병원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들어오기는 하였으나 그때 당장은 그대로 스치고 지나가버렸을 뿐. 그것이 다음날 큰 도움이 될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영호는 다음 말을 재촉했다. 키 큰 치는 좀 머뭇거리다가 "놓쳤어요."

하고 히죽이 웃는다.

"네끼! 밥버러지! 어떻게 하다가 놓쳤어?"

 

키 큰 치의 말을 들으면 그는 이렇다 할 무슨 근거도 없이 오늘은 성북동으로 나가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오는데 동소문 파출소 앞에서 바로 오정목으로 빠져나가려다 아직 저녁 먹을 때도 못 되고 해서 박석고개를 넘어 창경원까지 와가지고는 그대로 전차길을 따라 걸었다.

대학병원 문앞에 왔을 때에 병원 안으로부터 웬 대학생 하나가 나왔다.

대학생이라면 덮어놓고 유심히 보는 판인데, 그 학생은 갈 곳 없이 지금 그 의 포켓 속에 든 사진의 얼굴과 꼭 같았다. 되었다. 대서라. 이렇게 속으로 기뻐하면서 그는 뒤를 밟았다.

학생은 힐끗 뒤를 한번 돌아보더니 그대로 앞을 선 채 천천히 걸어갔다.

네거리에 이르러서는 잠깐 망설이다가 여전히 전차길을 따라간다.

황교를 지나 조금 더 가다가 바른편 샛길로 해서 순라골로 들어섰다.

순라골로 들어서 연초전매국 뒤에 왔을 때에 학생은 발을 멈추고 돌아섰다.

키 큰 치는 저편이 눈치를 채고 역습을 하나보다 싶어 머뭇머뭇하는데 그때 두 사람의 상거는 한 칸도 떨어지지 못하였다. 학생은 키 큰 치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의외에 보드라운 목소리로 "미안합니다만 성냥 가지셨거든 하나 빌려 주십시요."

하고 포켓 속에서 담배를 꺼내었다.

키 큰 치는 겨우 안심을 하고 성냥을 꺼내어 주는데 그저 눈 깜박할 사이에 무쇠 같은 주먹이 벼락같이 아래턱을 올려쳤다. 뒤로 벌떡 나자빠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궁장 담벼락에 뒤통수를 부딪고 그대로 정신없이 넘어졌다. 얼마만에 겨우 일어나서 이렇게 온 것이다.

"수고했네 …… 올라와서 저녁이나 많이 먹고 가게."

영호는 하도 어이가 없어 더 나무랄 멋도 없고 저녁을 대접하여 돌려 보냈다.

열한시가 되자 영호는 준비를 시작하였다.

우선 넉 장의 허철의 사진을 놓고 정밀하게 그 모습대로 변장을 하였다.

영호의 얼굴을 가지고 허철의 얼굴을 만들기에는 아무리 변장이 능한 영호라도 매우 힘이 들었다. 상당한 시간이 걸리었다.

변장을 마치고는 허철이 요새 입은 양복과 빛깔이 비슷한 놈을 갈아 입고 모자는 헌팅을 눌러 썼다.

포켓 속에는 클로로포름을 듬씬 축인 가제 뭉치를 고무주머니에 넣어 집어넣었다.

 

다음 김서방과 오복이와 상준이를 불러 자기가 이외로 더디 돌아오든지, 또 무슨 사고가 생기더라도 결코 놀라지 말고 집을 잘 지키되, 혹 무슨 일이 있거든 김서방은 아래층에서, 오복이와 상준이는 향초를 데리고 이 층에서 버티고 있지 경솔히 공격적으로 나서지는 말라고 지시를 하였다.

향초는 오늘 두번째 놀랐다. 먼저는 가짜의사에게 이번은 가짜 허철에게.

──

열두시가 지나고 다시 반을 가리킬 때에 영호는 집을 나섰다. 자동차를 빨 리도 아니요 더디지도 아니하게 몰아 용산으로 향하였다.

돌아오는 전차가 가끔 있을 뿐, 제일인도교에 당도했을 때에는 완전히 인적이 끊기었다.

자동차를 그대로 몰아 신사 들어가는 길 으슥한 곳에서 내리었다. 시계는 꼭 한시다.

영호는 천천히 걸었다. 얼마 아니 가서 저편에서 수심가를 넘기는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5

영호는 발길을 멈추고 기다렸다.

휘파람 소리가 가까와지며 검은 그림자가 시계(視界)에 들어온다.

협박장에 쓰인 대로 교복에 사방모자를 쓴 학생이 영호의 등 뒤에서 멀리 비치는 가등불을 받아 확실히 나타났다.

두 사람은 딱 마주쳤다.

××고등보통학교 제이십삼회 졸업생의 앨범에서 본 서광식이다.

머리를 중대가리로 박박 깎은 그 사진에 비하면 좀 노성해 보이나 역시 그 얼굴은 그 얼굴이다.

저편은 힐끔 치어다보더니 그대로 지나치는 체하면서 왼손을 쑥 내어민다.

바른편손은 포켓 속에 들어 있는 피스톨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어 쥔 것이 분명하다.

영호는 그대로 서서 있다.

손을 내어밀면 이편에서 내어주는 것이 있으리라고 의심도 아니한 그 학생 ── 서광식은 의외에 아무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홱 돌아섰다.

바른편 포켓 속이 움직거리면서 불룩한 끝이 영호의 얼굴을 겨누고 있다.

서광식은 영호를 노리어본다. 영호는 그냥 범범히 서서 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범범히가 아니라 머리터럭만한 틈만 붙잡으면 비호같이 달려들어 저편 을 메어꼰질 준비가 되어 있다.

한편은 노려보고 한편은 바라다보고 한동안 살기띤 침묵이 계속되었다. 긴장 된 찰나다.

"왜 아니 내놓아?"

이미 피스톨을 꺼내어 그 새까만 구멍으로 영호의 얼굴을 겨누는 서광식은 얕으나 저력 있는 소리로 묻는다. 머리를 겨누었으니 영호의 방탄( 防彈) 조끼는 소용이 없어진다.

"돈 못 가져왔소."

영호는 허철의 음성을 본떠서 대답하였다.

"?"

"돈이 없어서 …… ""돈이 없어?"

서광식은 조롱하듯이 웃입술을 삐쭉한다.

"그건 저리 좀 걷어치우."

하고 영호는 턱으로 피스톨을 가리키며 말을 한다.

"나같이 약비한 사람한테야 그런 게 무슨 소용이요?"

그러나 저편은 조금도 방심을 아니하고 똑바로 겨눈 곳을 겨누고 있다.

"! 그중에 내숭은 들어서!…… 대관절 왜 돈을 아니 가져왔어?"

"없어서."

"없기는 왜 없어? 은행에 수만 원씩 예금을 해놓고도 없어?"

"아니 여보."

하고 영호는 한걸음 다가섰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를 늘어놓아 가지고 이러고저러고 하는 동안에 틈을 엿보아 때려뉘자는 것이다.

"대관절 당신이 누구길래 우리더러 돈을 달라우?"

"달랄 만하니까 달라지!"

"무엇이 어째서 달랄 만하오?"

"그것은 허준이하고 할 말이지, 허철이하고는 할 말이 아니야 …… 건방지게 지껄이지 말고 가지고 왔거든 순순히 내놓아."

"여보, 건방진 것은 댁이 아니요? 백제 남으 돈을 뺏으러 들면서 이유도 말을 아니하니 그게 무슨 경우란 말이요?"

", 요게 꽤 까스랍게 군다! 이렇게 말썽을 부릴 테야!"

"아니 말썽을 부리는 것은 댁이지 내요?"

저편은 점점 성이 나는 모양이다. 얼굴이 상기가 되어 온다. 그러나 화를 꾹 누르고 타이르듯 위협하듯 말을 한다.

 

"괜히 이러다가는 신상에 좋지 못해 …… 우리를 누구로 알고 이래?……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모르더라고 …… 허준이가 그새 돈을 칠팔천 원이나 내어주면서도 꿀꺽 소리 못하는 것을 보면 알조지 무얼 여러 잔말이야?"

"머 어째?…… , 이 도적놈아."

하고 영호는 일부러 고개를 내밀었다. 도적놈아 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서광식의 왼손이 영호의 따귀를 내리친다.

그것을 피하려 고개를 옴칫할 때에 피스톨의 겨냥도 벗어났다. 그 순간 영호는 나는 새와 같이 와락 덤벼들어 우선 저편의 바른편 손목을 주먹으로 내리 쳤다. 피스톨은 땅에 떨어졌다.

두 몸뚱이는 한데 어우러졌다. 영호는 생각던 것보다 상대자가 만만치 아니 함을 알았다.

6

영호가 서광식이를 가까스로 밑에 깔고 앉아 일변 포켓 속에 넣었던 고무 주머니를 꺼내어 클로로포름 가제를 사용하려고 할 때다.

영호는 싸움에 정신이 팔려 등 뒤 즉 영호 자기가 오던 것과 같은 방향으로부터 화물자동차 한 대가 달려와 이미 그 옆에서 머문 것을 알지 못 하였다.

화물자동차에서는 두 사람의 괴한이 뛰어내려 서광식을 덮어누르고 있는 영 호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의 동류가 껴눌린 것을 먼 빛으로 보아서도 알 수가 있었던 때문이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영호는 방비 할 겨를을 가지지 못했다. 그는 등 뒤에서 목을 조르고 매달린 괴한을 업어 넘기려 벌떡 일어섰으나 그와 동시에 따라 일어선 서광식이의 주먹에 어퍼컷을 한 대 본 좋게 얻어맞았다.

그리하여 그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것을 서광식이가 그대로 깔고 앉고 두 명의 괴한이 머리와 팔을 눌렸다.

서광식이가 다시 옆에 흘려 있는 고무주머니에서 영호가 사용하려던 클로로포름 가제를 꺼내어 영호의 코와 입을 덮었다.

미이라를 캐러 갔다가 미이라가 된다는 셈으로 영호는 서광식을 잡으려고 준비 해 가지고 갔던 마취제에 되레 자기가 정신을 잃어버렸다.

영호가 완전히 늘어진 것을 보고 그들은 일어섰다.

"망할 자식! 생기기는 얄팍하게 생긴 자식이 웬 아귓심이야!"

 

서광식은 옷의 흙을 털면서 투덜거린다.

그가 아까 떨어뜨린 피스톨을 찾아 간수하는 동안에 나중에 온 두 명의 수하는 영호를 떠메어 화물자동차에 실었다.

"우리가 조곰만 늦게 왔어도 큰일날 뻔했지?"

"그럼…… 자네는 더 기다리자는 것을 내가 어서 가보자고 않드나?……

다 일이 잘 될랴면 그런 법이야 …… 가지고 왔어요?"

그자는 서광식이더러 이렇게 묻는다.

"그 자식이 아니 가지고 왔지 아마 …… 글쎄 돈을 내노라니까 무어라고 긴 소리 잔소리를 늘어놓는단 말이야 …… 그래 따구를 한 대 갈기다가 그만…… 그것 참 망신을 하랴니까 …… 그것도 아마 백영호 놈이 모다 꾀를 가르쳐 준 거야!"

서광식은 여전히 두덜거리며 학생모자를 벗어버린 뒤에 운전대에 운전수 와같이 타고 두 명은 짐차에 올라탔다.

"죽은 게도 발버텀 떼어 먹으랬단다. 기왕 가지고 온 것이니 수족을 꼭꼭 묵고 부대를 덮어씌워라."

서광식은 이렇게 명령을 하였다.

화물차는 머리를 돌리어 시내로 향하여 달아났다.

이편 허철과 영호의 집.

허철은 세시가 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문 밖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영호가 오나, 그렇잖으면 영호가 실수를 하여 일이 글러져 가지고 악당들이 습격을 해 들어오나 가슴을 졸였다.

그러나 세시가 되도록 아무 소식도 일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놀라 고집 쓰고 야단야단하는 병석의 부친을 업고 나가다시피 자동차에 태웠다.

무슨 괴변이냐고 묻는데도 그저 큰일이 날 테니 당분간 어디로 피신을 해야 한다고만 대답하였다.

허철이에게는 대단한 용기와 과단성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날 밤으로 무사히 인천 월미도호텔에 피신을 하였다.

또 영호의 집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속을 졸이며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휘엿이 밝도록 영호가 아니 돌아올 때에는 장수를 잃은 병정들같이 기운이 빠지고 근심을 하였다.

그중에도 향초는 여간만 걱정을 아니하였고, 김서방은 그의 법식대로 뛰어나가 보겠다는 것을 오복이와 상준이가 각각으로 붙잡아놓았다.

밝는 날 온종일 기다렸으나 역시 소식이 없다. 상준이가 꾀를 내어 석양 때 허철의 집을 가보았으나 집 안은 텅 비고 하인들만 남아 있었다. 물으니까 어젯밤에 영감님을 모시고 시골로 갔다는 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날이 저물고 밤이 깊었다. 영호가 나간 지 만 일 주야가 되었다.

불안과 긴장에 싸여 밤은 더욱 깊어갔다. 열두시가 지난 뒤다. 아래층을 지키느라고 현관에 지키고 있던 김서방은 딸그닥하는 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현관문의 핸들이 움직이는 것이다.

7

영호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팔은 등 뒤로 결박을 짓고 다리도 꽁꽁 묶였다.

휘휘 둘러보니 한 칸쯤 되는 조선방인데 천장에 십촉짜리 전등이 무료 히 켜 있다.

벽 사면 중 두 면은 그대로 벽이요, 한편은 쌍창이 달리었고 한편은 외짝밀창이 달린 것으로 보아 어느 집 건넌방인 것을 알 수가 있다.

방바닥의 장판이며 지전지며 벽에 붙은 주련 같은 것으로 보아 꽤 호사스럽게 사는 집인 듯하다.

영호는 아직도 머리가 띵하다. 한 몇 해 잠을 자고 난 것같이 의식을 잃었던 그동안이 아득하다.

그러자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아마 안방에서 하는 이야기인 듯한데 그중 사내 소리는 확실히 서광식이다.

"저 녀석도 그년처럼 그리 보내지요?"

이것은 서광식이가 하는 소리요 그 말을 받아 "멍청한 소리 마라."

하고 나무라는 것은 분명히 그의 누이 서광옥이인 것이다.

"왜요?"

"글쎄 생각해 봐라…… 한 집안에서 그런 인간이 둘이나 생겼다면 거기 서도 의심을 내어 소문거리가 될 텐데, 하물며 허철이라면 그래도 부자 놈의 자식인데 다가 또 제노라고 해서 얼굴을 아는 사람이 적잖은데 그게 무사하겠니?"

서광옥이의 이 말에 영호는 후닥닥 뛰고 싶었다. 그는 고개를 여러 번 크게 끄덕거렸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 그런 것을 모르다니!"

 

하고 탄식하였다.

그는 학희의 있는 곳을 안 것이다. 그도 뒤로 묶인 결박에 힘을 주어 보았으나 꿈쩍도 아니한다. 이렇게 포로가 되어 앉아가지고 비로소 학희의 있는 곳을 알게 된 것이 안타까우나 역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이 된다.

"그럼 어떻게 해요?"

"어떻게 하기는 무얼?…… 붙잡아 두었다가 제 아비가 말을 들으면 놓아주지."

"소리를 치고 지랄하면?"

"제 아비의 사건을 들어서 위협을 해놓지?…… 좀 건너가 보아라. 깨있으면 내가 이야기를 좀 해보아야겠다."

문 여는 소리가 나며 쿵쿵 마루를 걸어오는 소리가 들리었다. 영호는 얼핏전대로 쓰러져 죽은 듯이 누웠다.

문을 열고 굽어다보는 듯하더니 도로 안방으로 건너간다.

"아직 안 깨어났어요."

"지금 멫신데?…… 세시니까 두 시간이나 되잖었니?"

"아까 약을 또 썼지요. 깨나서 지랄을 칠까 봐서."

이야기 소리는 잠깐 그쳤다가 서광옥이가 다시 묻는다.

"너 참 오늘 가보니까 그년 어떻드냐?"

"명칠이 말이 차차 풀이 죽어간다고 그래요…… 워너니 제가 들어가도 전 같으면 지랄을 하고 그럴 텐데 본체만체하든걸요…… 그러고 입을 꽉 다물고는…… 아이구 그런 독종!"

"거 안되었다…… 연해 지랄을 하고 날뛰고 해야 안심하고 거기다가 두어 둘 텐데, 그렇게 풀이 죽어서야 오래 두었다가는 놓치기 쉽겠다…… 메 칠 후에 도로 데려올 셈 치고…… 명칠이 녀석이 감시나 잘 하고 있드냐?"

"그럼요. 그저 문앞에 가 꼭 붙어앉어서 일시도 안 떠나는 모양이야요."

영호는 도로 일어나 앉아 그들의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혼자 연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잡혀온 것도 그렇게 여러 날 된 것이 아니라 두 시간 밖에 아니 된 것을 알았다.

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곳을 벗어만 나자. 무엇보다도 학희를 구 해내야지.

그는 다시 한번 묶인 팔목에 힘을 주고 기운을 써보았다.

그러나 살만 아팠지 역시 꿈쩍도 아니한다.

영호는 문제의 여자를 언제 만나도 만나야 할 것이니 어디 한번 대면해 보 겠다고 생각하고 일부러 크게 '하는 신음소리를 쳤다.

그러자 문소리가 나며 다시 방문이 열리더니 광식이가 앞서고 광옥이가 뒤를 서서 들어온다. 방금 피워 문 해태가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연기를 가늘게 올리고 있다.

광옥이는 앞으로 나서서 영호를 유심히 치어다보고 있더니 "아니 이건 누구를 붙잡어왔니?"

하고 첨에는 놀랐다가 되레 웃으며 광식을 돌아본다.

8

광옥은 광식이가 대답할 겨를도 없이 한걸음 더 나선다.

"원 참! 꿩 대신 닭이라더니, 이건 닭 대신 꿩이로구나! 호호호호 …… 아니 백선생 이게 웬일이시우?"

영호는 그래도 광옥이인만큼 눈이 매섭구나 생각하였다. 이판이니 영 호도 뱃심이나 부릴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허허허허"하며 한바탕 웃었다.

광식이는 눈이 둥그랬다가 비로소 알아채고는 "저런 망할 자식!"

하고 눈을 흘긴다.

"대관절 점잔지하에 이게 무슨 꼬락서니요!"

광옥은 연해 조롱하는 미소를 띄어가지고 영호를 놀리는 것이다.

언뜻 보면 스물대여섯이라고 보겠지만 그래도 중년에 걸친만큼 그의 몸은 난숙 하였다.

그러나 그 난숙함이 육감적으로 난숙된 것이 아니요, 고우면서도 칼날같이 매서운 그의 표정과 아울러 찬바람이 도는 듯한 것이다.

영호는 문득 광옥이가 어떻게 해서 자기의 얼굴을 그렇게 자세히 아나 싶어 놀랍기도 하고 궁금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꾸를 해주었다.

"점잖은 사람이 진 날 개 사귄 셈만 대지요 …… 대관절 담배나 한대 주 구려! 이 집이 이렇게 인색하오?"

"아이고 참 깜박 잊었어 …… 이애 안방에 가서 담배 가져오느라 …… 그러고 닭을 잡으려다가 꿩을 잡었으니 인제는 닭마저 잡아와야지 …… 애들 데리고 가서 허가 부자를 다 붙잡어오느라."

광식은 문을 열고 나가고 영호는 너털웃음을 쳤다.

"서광옥이가 그래도 제법인 줄 알었더니 아직도 아둔하군! 내가 이렇게 나서면서 그 사람들을 그대로 두고 왔을까 봐?"

"! 그런 연극은 그만두어요."

그동안 광식은 해태갑을 들여놓고 밖에서 머뭇머뭇한다.

"어서 가봐라 …… 백선생님이 지금 꾀를 내셔서 그런 소리를 하신 걸 너는 곧이듣고 있니?"

광식은 문을 닫고 내려서다가 방을 향 하여 "누구 하나 들여보내요?"

하고 묻는다.

"그만두어라 …… 조심해서 다녀오느라. 함부루 굴지 말구."

"…… 그렇지만 자식놈은 없을걸요."

"?"

"아까 망을 보니까 열두시 반에 자동차를 타고 나가드래요. 아마 돈 가지고 오는 체하고 어데로 피신을 한 게지요. 그녀석 백가가 시켜서 …… ""좌우간 가봐라. 없으면 애비만 잡어 오려무나."

조금 있다가 사랑방인 듯한 데서 우세두세 소리가 들리며 대문 소리가 들리더니 도로 조용해진다.

영호는 속이 졸였다. 허철이가 아까 시킨 대로 피신을 했으면이거니와 만일 그렇지 아니했다면 큰 봉변을 하고 말 것이다.

광옥은 담배 한 개를 뽑아 영호의 입에 물리고 불까지 그어댄다.

"이렇게 귀한 손님을 결박을 지어놓고 대접해서 죄송합니다."

그는 영호의 얼굴을 꺄웃이 굽어다본다. 그의 눈에는 순전히 조롱만이 아닌 딴 무엇이 있음을 영호는 비로소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뚝 떼고 담배를 꿀맛같이 쭉 들이빨면서 배포 유하게 대꾸를 하였다.

"천만에! 이런 데 붙잡혀 와서 결박도 아니 지우고 있을 반편 녀석이면 차라리 자살을 하겠소."

"호호호호 …… 참 그래! 우리 호걸남아 백영호씨가 아니면 그런 호기( 豪氣) 도 내기 어려운 일이야."

"그럼 그렇잖고?…… 내가 지금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잡혀 앉인 줄 아우? 허허!…… 당신허구 당신 오랍동생 그리고 당신 부하 해서 모조리 데리고 갈 양으로 이러고 있는 줄을 모르고!"

"아이구 용용 …… 괜히 횃대 밑에 장담은 그만 해두어요."

실상 영호는 그들을 붙잡아가지고 간다는 것은 헛장담이나 지금 곧 이 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지는 아니한 것이다.

단지 계집 하나만 믿고 사내들은 다 나가고 없으니, 사람 살리라고 소리나 몇번 지르면 행순하는 순사든지 동리 사람이든지 필시 달려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계집은 클로로포름으로 또 마취를 시키고 저는 달아날 것 ── 혹 피스톨 같은 것으로 쏠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래 가지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가 구조를 받으면 사건이 해결 되 기전에 경찰의 간섭을 받게 되겠으니 그것은 지금까지 지켜오던 것을 깨 트리고 말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학희 부녀가 무슨 이유론지 그와 같이 사건을 경찰에 알리기 싫어한 것인데 섣불리 굴어서 그것이 되레 학희에게 무슨 중대한 누가 끼친다면 위문이 폐문될 터이니까.

9

"여보 백영호씨, 우리 타협합시다."

광옥은 지금까지의 조롱질하던 태도는 버리고 말을 고쳐 점잖게 수작을 붙인다.

"타협?"

하고 영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는 싸우든 악당하고 타협은 할 줄 모르오."

"아따 그렇게 부룩송아지처럼 고집을 쓰지 말고 …… , 첫째 당신을 놓아줄 테니 당신은 우리 일에 간섭을 하지 말 것 …… 글쎄 왜 이해 없이 우리 일에 뛰어들어서 남을 방해하고 당신 위태한 고비를 겪고 그러시요?"

"그거야 이해를 목표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이해를 초월해서 일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 나름이지."

"! 당신도 이해를 순전히 초월한 것은 아니든데요 …… 학희가 욕심 이나서 그러지?"

영호는 할 수 없이 허허허허 하고 웃었다. 그건 그렇다. 그것으로 보면 순전히 이해를 초월했다고 크게 장담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거봐요 글쎄 …… 그러니까 당신이 필요한 학희도 내어줄 테니 그 조건으로는 유대설의 짐 속에서 찾아낸 그 암호문서를 우리를 주어요 …… 그것은 당신이 가졌지 않었으면 학희가 가졌을 테니까 …… ""내가 가진 줄은?…… 익선동 노파의 집을 습격했구려?"

"좀 늦어서 당신한테 그 짐을 다 뺏겼소."

영호는 그 짐 속에 암호문서가 없더라고 하려다가 그러면 학희가 가진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학희를 더 괴롭게 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자기가 가졌다거나 아니 가졌다거나 분명한 눈치를 보이지 아니하였다.

 

그러나저러나 간에 영호는 타협도 하고는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타협은 붙잡혀와 가지고 묶여 앉아서 하는 타협이니 그것은 타협이 아니라 굴복이다.

굴복은 영호의 자존심이 허락치 아니한다.

또 임시방편으로 우선 이곳을 벗어나기 위하여 타협을 할 수가 있기는 하나 그런다면 이 조그마한 계집의 웃음거리가 될 터이니 그리하기도 싫었다.

더구나 암호문서와 학희와 교환하자는 것은 그렇게 하면 일후에 학희의 원망을 살 것이매 더구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자, 어쩔 테요? 두 가지 조건을 가지고 타협을 하겠소? 아니하겠소? 자 좀더 자세하게 이야기할 테니 들어봐요…… 지금 당신은 바로 가서 그 암호문서를 가지고 다시 와요.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한 삼사 일 동안에 일을 다 끝낸 뒤에 학희를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당신 집으로 데려다 줄 테니 …… 그렇지만 당신이 여기서 놓여나가서 암호문서를 가져오지 아니한다든지, 또 암호문서를 가져왔다더래도 다시 우리 일을 간섭하 거나 학희를 구해내려고 서둘면 그저 당장에 학희의 왼편 젖가슴 밑으로 피스톨 탄환이 뚫고 들어가요."

더구나 아니 될 말이다. 악당과의 타협인지라 저편에서 조건 이행을 해줄는지 아니 해줄는지도 모르는데, 더구나 불리한 조건으로는 영영 안될 말이다. 영호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좀더 싸워봅시다."

이 말에 광옥은 잠시 눈을 매섭게 뜨고 영호를 노려본다. 그러다가 다시 풀어져 가지고는 영호의 귀를 잡아 쌀쌀 내두르며 어린애를 놀리듯이 "아이고 요 깍정아! 아이고 요 고집불통아 …… 그렇거든 좀 견데봐."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한다.

"여보 담배나 한대 더 붙여주고 가구려."

영호의 이 말에 광옥은 해뜩 돌아보더니 허리를 굽혀 얼굴을 가까이 대고 꺄웃이 굽어다본다.

영호는 굽어다보는 그의 가느다랗게 웃는 눈에는 요염한 추파가 가득 넘쳐 흐른다.

"고거 귀엽다 …… 생긴 거랑 하는 짓이 …… 그래 담배 붙여 주께 응."

그는 담배를 뽑아 우선 자기의 입에 물고 불을 붙이더니 두어 모금 쪽쪽 빨고 나서 그 끝을 영호의 입에다 대어준다.

영호는 속으로, 이게 어쩔 양으로 이러나? 상해에서 오른 매독균이나 없나하면서 입을 내어밀려니까 담배 대신 광옥이의 입술이 와서 쪽 소리를 내며 맞춰진다.

10

영호가 멍하니 치어다보고만 있는 것을 보고 광옥이는 자지러지게 한번 웃어 댄다.

"? 싫어?…… 흐흥? 좋거든 거저 좋다고 그래 …… 자 인제는 정말 담배."

그는 담배를 다시 두어 번 빨고는 영호의 입에 물리어 준다.

"인제는 미인계를 쓰나? 하다하다 못하니까 …… "영호는 심술궂게 웃으면서 조롱을 해주었다.

"미인계? 그래 미인계로 알겠지 …… 그렇지만 실상은 조꼼 반했다."

"!"

"괜히 황공감사하잖고…… 이래 보여도 상해서 가진각색 나라 놈들을 수백 명 간을 녹여주든 서광옥이다. 그런 서광옥이한테 귀염받는 것을 영광으로 알어."

"그런 영광은 제발 싫으니 어서 건너가우."

"! 저게 아직도 숫총각이 돼서 저래!…… 이렇게 만나잖고 좀 일 찌 기상 해서나 만났으면 한동안 재미있게 놀았을걸…… 섭섭하네…… 그렇지만 정말이지 조꼼 반했어…… "말뿐이 아니라 그의 눈에는 사실로 적막한 그림자가 스치는 것을 영호는 보았다. 그것을 보고 또 그의 요염한 자색을 보니, 영호는 아까부터 그에게서 발산하는 위압적 매력에 소리없이 끌리는 것 같은 느낌을 깨달았다.

"내 인제 당신이 내 손에 걸리면 자살할 기회나 주리다."

영호는 이러한 말을 하였다. 그러니까 광옥은 웃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노한 것도 아니요, 영호를 꼭 바라보다가 문을 홱 여닫고 안방으로 콩콩 건너가 버렸다.

허철의 집을 습격간 일행이 떠난 지 한 시간은 다 못되고 삼사십 분은 넘었음 직한 때에 그들은 돌아왔다.

"저 망할 자식을! 그거 참! 죽여도 아니 죽고 저걸 어떻게 해!"

광식이가 성난 소리로 두덜거리며 안방으로 들어간다.

"?"

하고 광옥이가 묻는다.

"아비 자식이 다 달어나고 없어요."

 

"두어두어라 …… 저이가 가면 하날로 올라갔겠니 땅으로 파고 들어갔겠니 …… 위선 여기 일이나 끝내고 차차 착수하지?"

"저 자식 잠자코 있어요?"

"…… 나는 갈 테니 늬이도 어서 자고 건넌방에 이부자리나 하나 갖다주어라."

"이부자리요? 있어도 뺏어버릴 텐데 갖다 주어요?"

"시키는 대로 해라. 나는 다 요량이 있어서 그러니 …… 인력거 불러오라고 그래라."

조금 있더니 광옥이는 밖으로 나가는 기척이 들리고 광식이가 이부자리 한 벌을 홱 들이뜨려 준다. 그의 눈은 영호를 금시 잡아먹을 듯이 사나왔다.

그러나 영호는 허철 부자가 무사히 피신한 것만 속으로 기뻤다.

팔다리를 꼭꼭 묶인지라 큰 노력을 들여 겨우 요 위에 누워 이불을 끌어 덮었다. 팔이 뒤로 눌리어 여간 아프고 괴로운 게 아니다.

광옥이의 정말 거처하는 데는 어딘가? 집에서는 별일이나 없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대로 배포 유하게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느직이 잠이 깨었다.

집안이 조용한 것이 아직도 모두들 잠을 자는 모양이다.

도회지의 소음도 아득하고 한 것이 아마 중심지대에서 꽤 멀리 떨어져있는 곳인 듯하였다.

영호는 방향을 짐작하려고 연해 귀를 기울였다.

자동차 소리는 도무지 들리지 아니한다.

외딴집인지 이웃에서도 소리가 들려오지 아니한다.

일어서서 바깥을 내어다보고 싶으나 앞은 덧문을 닫아놓았기 때문에 어두컴컴할 뿐이다.

오정때나 되었음직해서 겨우 설렁탕 한 그릇을 얻어먹었다. 그대로 묶이어 앉아 떠넣어 주는 것을 어린애처럼 받아먹었다. 소변도 요강을 가져다가 보여준다.

밥을 먹여주고 몸시중 드는 친구를 보니 악당의 수하 치고는 그래도 나이진 득 한 데 다가 조금은 인정도 있어보인다.

그렁저렁 해를 지우고 또다시 설렁탕 한 그릇 신세를 졌다. 간에도 차지아니한 다.

담배는 시중 드는 친구가 노상 붙어 있는 바 아니요, 앞에 두어두고 못 먹으니 더욱 먹고가 싶다. 어서 광옥이나 왔으면 먹을 것도 더 좀 청해 먹고 담배도 연해 피우겠는데 하며 기다리노라니까 날이 깜박 저문 뒤에 비로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리었다.

艶 魔[ 염마 1 "밤새 안녕하십니까?"

광옥은 들어오면서 웃는 낯으로 인사를 깍듯이 한다.

"못 안녕했수."

영호는 일부러 불평스럽게 대답을 하였다.

"? 저걸 어째!"

"팔을 뒤로 묶었으니 어데 안녕하겠소?"

"원 저런!…… 그러니까 어제 저녁에 내 말을 들었으면 그런 고생 아니하고 집에 가서 편안히 잤지!"

"여보, 그러지 말고 이것 좀 앞으로 묶어주고 또 무엇 먹을 것도 좀 사다주구려! 왼종일 설렁탕 두 그릇만 얻어먹으니 눈에 거적 쓴 놈이 보이는구려!…… 그리고 위선 담배 좀 한 개 붙여주고…… "광옥은 까막까막 생각하다가 영호의 청을 다 들어주었다. 광식이더러 수하 두 엇을 데리고 들어오게 하여 영호의 뒷결박을 풀어 앞으로 묶었다. 그동안에 자기는 영호의 머리에 피스톨을 겨누고 있었다.

앞으로 묶인 영호는 팔이 좀 덜 아프기는 하나 부자유롭기는 매일반인 것이 팔목을 묶어가지고는 남은 포승 끝으로 허리를 동였기 때문에 두손이 배에 가 착 달라붙어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 묶인 것을 입으로 물어떼지 못 하게 하자는 것이다.

광옥은 밖으로 나가는 수하더러 런치를 시켜오라고 이르고 담배를 붙여 영호에게 물려준다.

"좀 편하지?"

"네 고맙소."

"그런데 오늘 저녁에도 미안하지만 당신네 집 가택수사를 좀 해야겠소."

"아무려나…… 그렇지만 우리 집 가택수사를 하자면 군대로도 일 중대쯤은 있어야 할걸…… ""또 희떠운 소리!"

"정말이야…… 내가 언제 거짓말합디까?"

이렇게 뱃심 좋게 말은 하나 영호는 속이 불안도 하였다. 나올 때에 당부는 잘했지만 곰 같은 미련퉁이 김서방과 아직 몸이 성치 못한 오복이와 약 한 상준이가 잘못해서 실수를 하면 어떡하나 싶었다.

"당신 집에 편지 한 장 쓰시요."

"무슨 편지?"

"편지 가지고 가는 사람에게 집안을 다 보여주라고…… ""승겁 다!"

"안쓸 테야?"

"다시 물을 것 무어야?"

"아니 너는 목숨 아까운 줄도 모르느냐?"

광옥의 얼굴은 칼날 같았다. 꽉 다문 입이며 독기 있는 눈, 서리가 어린듯 한 날씬한 콧날…… 방금 무슨 거조를 낼 것 같다.

"그러나 죽인대도 아직은 못 죽일걸?"

영호는 눈도 까딱 아니하고 싱긋이 웃으면서 말을 한다.

"? 왜 못 죽여?"

"암호서류 한쪽이 내게 있는지도 모르니까."

광옥이는 조금 얼굴이 풀려가지고 "죽이지는 않지만 죽잖을 정도에서 모진 고통을 주어도?"

하고 묻는다.

"그런 것쯤이야…… "영호의 입술에서 거진 다 탄 담배를 광옥은 무심결에 가져다가 담배곽 위에 비벼 끈다.

광옥은 무엇을 생각하느라고 잠잠히 있다가 안방으로 건너가더니 무어라고 한참이나 소곤소곤 이야기를 한다.

영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오늘 저녁은 이 구혈을 벗어나야겠다고 생각 하였다. 만일 가택수사를 그대로 당하였다가는 지하실에 손이 미칠지도 모르고 또 학희를 딴 데로 옮겨버릴지도 모르니까.

영호는 고개를 숙이고 팔에 힘을 주어 끌어올려 보았다. 잘하면 입이 닿아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그보다도 감시의 눈이다. 문을 겉으로 잠그지아니하는 것은 다행이나 수십 개 되는 눈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멫시요?"

영호는 외쳤다.

"저 망할 위인이!"

광옥이는 낮은 소리로 나무라며 건너왔다.

"시간은 왜 물어?"

"궁금해서."

 

"여덟시 오십분."

광옥은 팔시계를 굽어다보며 순순히 가르쳐 준다.

그러면 네 시간이나 다섯 시간 안에는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 이 무리들이 집을 습격하기 전이라야지 그렇잖으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다.

"여기 있는 당신 수하가 통 몇이나 되우?"

"그건 왜?"

"내가 빠져나갈 때 한주먹으로 때려잡겠나 못 잡겠나 알어두어야지."

영호는 웃지도 않고 이렇게 말을 하였다. 광옥은 영호의 등을 똑똑 두드린다.

2

광옥은 연해 연호의 등을 두드리며 "도령님 우리 도령님, 인제는 제발 희떠운 소리 좀 그만 해 두 어요, …… 그리고 이른 말 좀 들어요."

하고 꺄웃이 얼굴을 굽어다본다.

"배고파 죽겠으니 어서 무어나 좀 먹여주구려!"

"딴청만 보네!"

"내게는 그것이 제일 큰 문젠걸…… ""조 곰만 더 참우, 곧 오겠지."

만일 말소리만 듣는다면 정다운 부부라고 하겠다.

"그런데 여보."

하고 영호는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유대설이하고 허준이하고 셋이 공모하고서 이재석이 재산 뺏는 이야기나 좀 해보구려?…… 그러고 그 뒤에 상해 가서 지나든 이야기랑…… ""그거? 심심한데 옛이야기나 하까…… "광옥이도 아주 쾌히 대답을 한다. 기실 영호는 어렴풋이 추측은 하였으나 확실히 그랬으리라고 단정은 못하고, 말하자면 넘겨짚어 물은 것인데 그것이 들어맞은 것이다.

광옥은 영호의 옆에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앉아 담배를 붙여 물고 영 호도 붙여주고 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십육 년 전.──

음력으로 바로 정초다.

 

장소는 그때 어느 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작파하고 연애에 세마리가 팔려 번들번들 놀고 있는 유대설의 하숙방.

사람은 그 유대설이 외에 당시 서울 여학생 가운데 제일색이라는 영광을 가지고 그 전해 봄에 ××여학교를 졸업한 서광옥이.

두 사람 사이에 연애는 익을 대로 익었으나 한번 재미있게 지낼 동력( 動力) 즉 돈이 없어 늘 걱정을 하던 터이다.

유대설은 며칠 전에 강화로 내려가 그의 이종 되는 이재석이에게서 돈을 조금 얻어가지고 와서는 밀린 하숙밥 값도 치르고 둘이서 용돈도 쓰고 하던 나머지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오래 가란 법은 없다. 미구에 포켓 속이 싸늘해질 날이 닥쳐오게 된 것이다.

여러 날 두고 혼자 누웠을 때면 이 궁리 저 궁리 하던 대설은 오늘밤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보!"

하고 은근성 있게 광옥을 불렀다.

"?"

광옥이도 무슨 궁리를 하는지 개켜놓은 이부자리에 비스듬히 누워 한 눈을 팔고 있다.

"당신 시집 아니 가려우?"

"머요?"

광옥은 비로소 고개를 돌리면서 대설이가 무슨 표정으로 있는지 그것부터 여 살펴본다.

"시집 아니 갈 테냔 말이야?"

"무슨 잠꼬대를 하는지 모르겠네!"

"잠꼬대는 왜?"

"그럼 어떻게 하는 소리야? 싫어졌거든 거저 싫어졌다고 하지 무슨 승거운 수작이야!"

광옥이는 벌떡 일어나 앉으며 이렇게 다긏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는 그 의 매서운 눈으로 대설을 쏘아보며.

"허허허허."

하고 대설이는 넉살좋게 웃는다.

"아직 채 이야기도 듣잖고 저렇게 성낼 건 무어야?"

"듣고말고 간에 날더러 시집을 가라면 벌써 알조지 무얼 그래?"

"원 그렇게 호둑호둑 튀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보아요…… 글쎄 여보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지내자면 돈이 있어야 아니하오?"

 

"그건 언제부터 하는 소린데 지금 다시 뇌어서는 무얼 해요? 그보담 당신이 어데 가서 돈을 듬뿍 좀 가져와야 할 것이지."

"내야 가져올 재주만 있다면야 왜 주저를 하겠소만, 보구려 강화 있는 내 이 종이 내가 가서 조르면 마지 못해서 준다는 게 겨우 돈 백 원씩 이 구려…… 그것 가지고야 시장해서 견디겠소?"

"그래서?"

"그런데 말이야…… 강화 그 양반이 상처했다고 그러잖아? 그런데 이번에 내려가서 눈치를 보니까 슬그머니 장가를 또 들고 싶은 모양이야."

"나이 멫인데?"

"지금 서른넷인지 그렇지 아마."

"재취장가 들려고 할 만도 하구만…… ""그런데 말이야, 그 꼴에 예수쟁이가 돼서 듣고 본 건 있겠다 여학생한테 맘이 있는 모양이거든…… 응 알었어?"

"전처소생은 없나?"

"세살 먹은 계집애 하나가 노상 빽빽 울고 있지."

나물 날 곳은 첫이월부터 안다고 대설이가 두어 마디 한 말을 가지고 그는 벌써 계획을 세우느라고 그렇게 척척 내용을 묻는 것이다.

3

"그러니 말이야."

하고 대설은 인제 정말 본제로 들어간다.

"당신이 가서 일 년만 눈을 질끈 감고 이재석이 안해 노릇을 하구려, ?"

웬만한 여자 같으면 가령 거절을 아니한다 하더라도 조금의 주저는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 아니 그 전부터 ── 서광옥이에게는 그런 것은 길바닥에 굴러져 있는 바둑돌 하나만큼도 거리낌이 아니 된다.

"그래 볼까?"

그는 대번 이렇게 대답을 하되 눈 하나 깜박하지 아니한다.

"그래 그렇게 가기는 간다고 하고…… 돈은 어떻게 긁어내야 할꼬?"

인제는 벌써 돈 긁어낼 제이단의 문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광옥은 그 의견을 대설에게 묻는 것이 아니다. 말만 해놓고 눈을 까막까막하며 천장을 올려다보고 누워 있는 그의 머릿속에는 장차에 해나갈 일의 윤곽이 들어서는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동안 어떻게 할려우?"

"? 나야 지금도 내려가는마다 그 샌님이 자기 집에 와서 있으라고 조르는 터이니 핑계삼어 잘되였지."

"! 애인을 데리고 시집을 간다! 재미있어…… ""그렇지만 거기 정말 미쳐서 되려 나를 오쟁이를 지어서는 안되네."

"그거야 그때 가서 보아야 알지."

이튿날로 대설은 강화로 내려갔다.

이재석은 벌써 이 사람이 돈을 또 청하러 왔나보다고 못마땅하게 생각 하였으나 한편 가까운 친척도 없는 터에 이렇게나마 찾아오는 그가 반갑지 아니한 것도 아니었다.

저녁상을 마주 받고 앉아서 "형님, 참 아직 저렇게 젊기도 하시고 또 학희도 거두시고 하자면 어데 마땅한 데 규수를 좀 간택해 보시지요."

대설은 우선 이렇게 수작을 붙였다.

"글쎄…… 나이 머 사십이 다 되었는데 혼자 지낸들 어쩌리만 저년 때문에 거 걱정일세."

기실 전전에도 이러한 의미의 말로 이종에게 장가가고 싶다는 눈치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고 여학생들의 거동과 몸맵시를 칭찬하였고, 또 우리 조선가 정도 개량을 하자면 학식 있는 주부가 들어와야 한다는 것을 역설 하였던것이다.

"실상은…… "하고 대설은 파고들어갔다.

"제가 있는 집주인이 말을 하는데 아주 마땅한 규수가 하나 있으니 어데중매를 서라고 그래요."

"."

"양사골 사는 서씨집 맏딸인데 집안이 그다지 넉넉치는 못하지만 양반의 후예라 가도가 있고…… 또 규수가 서울서 손꼽는 미색이래요."

"응 응."

이번에는 응 소리가 두 번이 거푸 나온다. 대단 맘이 당긴다는 뜻이다.

"그런데 또 금상첨화로 작년 봄에 ××여학교를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했지요."

"흐흥! 나이는?"

"열아홉이라는가 봐요."

"이 사람아, 그렇게 아직 어리고 또 도저한 규수가 우리 같은 노 신랑한테 로 올랴고 하겠나?"

너무 입에 맞는 떡이니 한번 겸사말로 다지어보는 것도 사람의 상정이다.

이렇게 되고 나면 그야말로 만사 OK이다. 하기야 그때는 OK란 말은 없었지만.

강화서 우선 서울로 매파가 갔다.

서울서 다시 선을 보러 강화로 내려갔다.

한편은 서울서 손꼽는 여학교 졸업생의 미인이요(그때쯤만도 여학교 졸업생이면 당당했으니까) 한편이 강화의 오십만 원짜리 젊은 부자니 어디 탈잡을 곳이 없는 것이다.

하물며 신부 될 규수가 일언지하에 OK니까.──

신식 결혼을 돈은 많이 들여서 아주 단출하게 거행하였다. (들러리의 한 사람은 유대설이가 섰고!) 노신랑의 입은 다물어질 사이가 없이 벙실벙실 하였다.

어여쁜 신부는 새신랑과 한가지로 애인을 데리고 강화로 내려갔다.

이재석의 귀염이 광옥의 몸을 칭칭 감고도 땅에까지 흘러내렸다.

광옥은 정은 아직 옛애인에게 있다 하더라도 새 남편에게 또한 은근히 하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좋은 팔자다. 한 집에서 두 남편을 거느리고 그러고도 귀염과 사랑 속에서 파묻혀 지내니 부러운 팔자다.

4

광옥이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이재석은 그를 사랑하는 것과 정비례하여 그의 대한 신임도 도타와갔다.

재석이가 광옥이를 신임하게 되는 것은 거기에 광옥이의 수단이 물론 가미 되었다.

그리하여 집안 살림은 물론이거니와 재산에 대한 비밀이며 토 지문권이나 인감 낸 실인(實印)이며 예금통장 같은 것을 전부 광옥이가 맡아가지고 있게 되었다.

은행에서 돈을 찾아올 일이 있다거나 또 예금을 할 때에는 광옥이가 서울까지 올라가곤 하였다.

처음에는 재석이도 나이 어린 안해에게 그런 일을 맡기는 것이 안심이 되지 아니하였으나 한번 두번 시켜보매 도리어 자기보다도 민첩하고 영민 하게 해내므로 그 뒤로는 그저 덮어놓고 일체를 맡기게 되었다.

 

그리하는 동안에 유대설은 죽은 듯이 사랑방 구석에서 식객 노릇을 하였다.

물론 한 일 주일 만이고 보름 만이고 한번씩 돌아오는 안방 문례의 기회가 있기는 하였으나 인간이 본시 내숭한데다가 광옥이의 민첩한 재주로 해서 누구 하나에게도 눈치 채임이 없이 애초에 두 사람이 약속한 일 년을 지냈다.

그러나 그와 같이 뱃심 유하게 그리고 죽은 듯이 기회를 기다리는 유대 설에게도 은근히 근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었다.

광옥이가 아직도 정이 있어하기는 하지만 과연 그가 애초의 계획을 실행 할는지?

나이로 보면 자기가 재석이보다는 젊고 또 그새까지 정두어 지내던 터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재석이가 그다지도 깊이 광옥이를 사랑하지 아니하는가?

거기에 마음이 쏠려서 그대로 주저앉아 버린다면 오쟁이는 대설이 혼자서 지게 될 것이다.

더구나 재석이의 전처 몸에서는 학희란 계집애 하나가 있을 뿐이니 광옥이가 옥동자 하나 낳아놓으면 싫어도 붙잡히기가 쉽고, 또 붙잡히더라도 장차에 재석이의 크나큰 재산이 광옥이와 그 아들의 것이 될 것이니 광옥이가 굳이 악착한 짓을 하려 들지 아니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광옥이가 강화로 시집온 지 일 년이 되고 두어 달이 더 지나간 오월 달…… 어느 날 밤.

재석이는 대수롭잖은 병으로 이삼일째 사랑에 누워 있고 안방에서는 광옥이와 대설이가 만났다.

불을 줄인 어두운 방.

"여보 어떻게 할 테요?!"

대설은 광옥이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다.

"무얼 어떻게 해?"

역시 속삭이는 소리로 광옥이가 되묻는 것이다.

"무어라니?…… 인제는 일 년이 넘잖았수?"

"그런데?"

"! 답답해 죽겠네…… 우리가 약속한 것을 어떻게 할 테냔 말이야?"

"응 그거…… 그거야 그때 그러잖었어? 두고 보아야 한다고…… "만일 그때에 광옥이의 얼굴을 볼 수가 있다면 그의 얼굴에는 심술궂은 미소가 떠올라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머 어째?"

이렇게 묻는 대설의 목소리는 조금 높고 거칠었다. 그들이 처음 이 계획을 세울 때에 시집가는 새 남편에게 정말 미쳐서 자기를 오쟁이지우지 말라고하니까 광옥이 말이, 그거야 그때 가서 보아야지 하고 농담삼아 대답 하던것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요즈음 자기가 혼자서 근심하던 일이 정말 사실로 나타남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앞에 아득하여지며 악이 받치려 한 것이다.

", 어쩌자고 그렇게 큰소리를 내요?"

광옥이는 대설의 알너벅다리를 꼬집는 것이다.

"큰소리고 말고 간에 실컨 약속을 해놓고 지금 와서 나를 오쟁이를 지 울 양으로 그래?"

"오쟁이는 누가 오쟁이를 지워?…… 이렇게 가끔 만나고 또 의식에 그립잖고…… 그 밖에 무엇이 부족하단 말이요? 한평생 이렇게 지나가면 좋잖소?"

대설이에게는 들을수록 골이 오르는 말이다.

이미 이 계집이 그와 같이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계집 뺏기고 먹으려던 돈도 못 먹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두고 말아?!

5

못먹는 감 찔러나 보더라고 기왕에 돈 좀 먹으려다가 계집 뺏기고 돈도 못 먹고 했으니 방해나 놀겠다는 것이 그 뒤에 일어나는 대설의 심사다.

"정 그럴 테야?"

대설은 한번 다지어 물었다.

"그래? 그러면 어쩔 테야?"

"! 나는 기왕 돈 좀 먹으려다가 계집까지 뺏긴 놈이니까 이 위에는 밑 져야 본전이라 너하고 나하고 주고받던 편지나 몇 장 봉투에 넣고 그러고이 계획 꾸미든 사연이나 적어서 우체통에 집어넣고 나는 상해나 만주로 뛰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누구 신세가 가관일걸…… "이 말이 끝나자 잠깐 잠잠하더니 해해해해 하고 숨을 죽여 웃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대설의 너벅다리를 꼬집는다.

그 웃음과 이 동작으로, 그러면 광옥이가 지금까지 한 말은 자기를 놀라게하느라고 한 장난임을 깨달았다.

 

"사내가 어쩌면 그렇게 자발적게 굴어?"

"자발적고 말고 간에 그렇게 말하는데 그럼 누구는 골이 아니 날까?"

"나를 그렇게 못 믿었소?"

"못 믿지야 아니했지만…… ""그럼 왜 그랬어?"

"날더러 왜 그랬느냐지만 글쎄 방금 한 말을 생각해보아…… ""아이구! 글쎄 어쩌나 보느라고 장난으로 그런 것을 이 위인이 그저 겁 이나서…… "그러나 실상 광옥이는 장난으로 그런 것도 진심으로 그런 것도 아니었었다.

그는 이미 큼직한 계획이 뱃속에 서리고 있었고 실행할 날을 바로 앞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대설이를 떼어버리고 싶었다.

대설이쯤은 인제는 그의 눈에 좋은 상대자가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큰돈을 짊어지고 외국으로 가자면 좀더 변변하고 좀더 그럴 듯 한 남자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돈을 듬씬 가지고 나서면 광옥이의 인물이 또한 인물인지라 그러한 사내를 구해 내기는 결코 어렵지 아니하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우선 대설의 속을 떠보아야 할 것이다.

속을 떠보아서 만만하면 손끝의 밥풀처럼 톡 튕겨버리고, 그렇잖고 제법 버티면 우선 그대로 데리고 나서고 할 요량으로.──

그랬더니 아니나다를까! 황소같이 식식거리고 덤비지 아니하는가!

그리하여 그는 대설을 뗄 것을 우선 단념한 것이다.

"여보, 이렇게 추근추근하고 있을 게 아니라 위선 어떻게 돈이나 멫 만 원 몽똥거려 가지고 상해 같은 데로 뜁시다. 인제는 빠를수록 좋잖소?"

한동안 말이 없이 제가끔 제 생각에 잠겼다가 대설이가 이렇게 속삭거렸다.

그러나 광옥이의 입에서는 의외에는 끔찍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요런! 사내가 배짱이 그따우로 좀스러워서 무엇에다 쓴단 말이요?……

그래 고것 돈 멫만 원을 먹자고 이 짓을 했소?"

"그럼?"

"먹을 테면 그래도 멫십만 원 들어먹고 말 테면 말지…… 글쎄 그까짓 것돈 멫만 원을 가지고 외국으로 가서 메칠이나 산단 말이요?"

"하긴 그렇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먹어지나?"

 

"당신은 못먹어도 나는 먹어요."

"글쎄 먹을 수만 있다면 좋지만 그러다가 체하면…… ""잔말 말고 당신은…… "하고 광옥은 더욱 낮은 소리로 이리이리하라는 지시를 시켰다.

이튿날 광옥이는 친정에 급한 볼일이 있다고 어리광으로 병석의 남편 재석을 어루만져 놓고는 서울로 올라갔다.

어루만져 놓거나 묘한 핑계가 없더라도 의심할 재석이가 아닌지라 그는 아무 여념이 없이 그저 그가 속히 돌아오기만 당부하였다.

광옥이가 서울 친가에 간 지 사흘 만에 편지가 왔다.

무엇 무거운 짐을 가지고 내려가야 하겠는데 불편하니 누구 사람을 하나 보내주되 대설이가 좋을 듯하다는 것이었었다.

대설은 그날로 서울로 올라갔다.

무얼 이상한 것을 사가지고 오나? 하고 재석은 눈을 까막거리며 기다렸다.

6

광옥이의 이야기는 잠깐 중단이 되었다. 영호를 먹이려고 주문한 런치 가온 것이다.

포크와 칼로 반찬을 썰고 쏘스를 친 뒤에 광옥은 포크로 밥을 떠 들었다.

", 입 벌려."

영호는 입을 딱 벌리고 밥을 받아먹는다.

광옥은 반찬을 먹이기도 잊어버리고 갠소롬한 눈으로 영호의 받아 먹는 양을 자못 귀여운 듯이 바라본다.

"아이고! 고것 제비새끼 같다."

"그렇게 버릇없이 굴지 말고 어서 저 고기나 떠넣어 주구려."

"아이 참, 잊었어…… …… 팔자가 늘어졌구나!"

"누가 해달라는 것을 해주고 이런 공치하를 하오?…… 좌우간 멕 여주면 서어서 그 담 이야기나 하오."

"재미있소?"

"."

"그래도 명색이 탐정이래서 그런 이야기는 귀가 솔곳한가 봐. 가만 있어…… 이것 다 먹고 천천히 합시다. 두시까지는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러고는 어데로 가오?"

"나 잠자는 데로…… 그런데 요새는 좀 조심해야지, 경찰서에서 활동이 심해서…… 글쎄 요 망나니만 아니었으면 벌써 일을 다 해가지고 지금쯤 상해로 가서 두 다리 쭉 뻗고 누웠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죽여도 아깝잖다!"

"지금 멫시요?"

"왜 시간은 그렇게 자꼬만 물어?…… 아홉시 반."

영호는 시간이 갈수록 자꾸만 속이 졸였다. 그러나 이 위인이 두시까지 여기 있을 테라니 그때까지는 어떻게 변통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런치를 얻어먹고 둘이서 담배를 하나씩 붙여 물고 그러고 나서 다시 광옥 이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대설이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에는 광옥이는 일의 팔구분까지 진행을 시켜놓고 있었다.

광옥이는 미리부터 그때의 ××은행 지배인 허준이와 비밀히 일을 꾸몄던것이다.

즉 이재석이가 ××은행에 예금한 칠팔만 원의 현금은 물론이요, 그의 부동산 문권을 전부 은행에 잡혀가지고 도합 사십만 원 돈을 만들었다.

애초의 구약(口約)으로는 사십만 원 가운데 십만 원을 허준이가 먹기로 했는데, 급기야 일이 다 되고 나서는 이십만 원씩 반타작을 하자고 버티었다.

그리하여 부득이 사십만 원을 이십만 원씩 나누어 가지고 그 길로 광옥이와 대설은 상해를 향하여 떠나버렸다.

은행에서야 이재석이의 실인이 있고 또 위임장이 있는지라, 더구나 그 일을 지배인 허준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마련했으니 본인인 이재석이가 모르도록 비밀히 하기에 그다지 힘이 들지 아니한 것은 물론이요, 또 조금도 법에 어그러짐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강화에서 무엇 무거운 물건을 가지고 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던 이재석은 일 주일 후에 서울로 올라왔다.

와서 처가에 가보니 벌써 강화로 내려갔다는 것이다.

대설이의 종적도 간 곳이 없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내려가 조사해 보니 그때에 그는 돈 한푼 없이 거지가 되었음을 발견하였다.

더구나 비밀히 간수하여 두었던 암호서류까지도 없어진 것이다.

빼앗긴 원한은 크다. 하물며 재산도 재산이려니와 그다지도 극진히 사랑 하던 안해에게 그리고 먹여살린 이종 유대설이에게 그런 일을 당하고 보매 눈이 벌컥 뒤집힌다는 말쯤으로는 도저히 형용이 되지 아니한다.

일이 그리 되었으니 빼앗긴 것을 찾는다느니보다 복수할 생각이 앞을 섰 다.

그는 나머지 집칸이나 있는 것을 팔고 이리저리 변통하여 몇천 원이 수중에 들어오자 바로 조선땅을 떠났다.

목표는 상해다.

학희는 어떻게 할까 하고 여러가지로 생각하였으나 첫째 조선 안에는 누구 마땅히 맡아서 길러줄 사람도 없고 또 떼어놓고 가기도 애처로와 유랑 생활에 불편할 줄 알았지만 그대로 데리고 나선 것이다.

상해에 이르러 얼마 아니 되어 재석은 그들 남녀가 확실히 상해에 있 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줄기차게 찾아다니던 결과 필경 원수의 남녀를 만나게 되었다.

생각한 바와 같이 그들은 둘이서 붙어살고 있었다.

7

광옥이가 강화서 그 남편의 토지문권을 금고 속으로부터 꺼낼 때에 그 토 지문권보다도 더 긴절하게 보관한 듯한 비밀문서를 그는 무엇인지는 모르나 상당한 조건이 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해로 온 뒤에 대설과 밤이면 가끔 그놈을 꺼내놓고 암호를 풀어 보려 애썼으나 아직 풀지 못한 터이었었다.

이날 밤도 두 남녀는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그 암호문서를 내어놓고 탁자 양편에 마주 앉아 고개를 꺄웃거리며 이야기를 하던 터인데, 그때에 도어가 소리 없이 열리며 들어선 것이 이재석이었었다.

재석은 그들의 처소를 염탐하여 가지고 밤 고요한 틈을 타서 그들이 침실에 들어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들어온 것인데 아직 자지 아니하고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낭패하였다.

생각지 아니한 인기척에 고개를 들다가 재석이와 우선 시선이 마주친 것 이 대설이다.

그의 놀람은 여간 아니었었다.

얼굴이 대번에 백지장같이 하얗게 되고 암호문서를 쥔 손은 와들와들 떨리었다.

광옥이도 웬일인가 하고 돌아보다가 재석을 발견하였다.

제아무리 광옥이라도 처음은 놀라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재석은 먼저 대설이에게로 달려들며 암호문서를 와락 채뜨렸다.

 

원수는 인제 찾아놓았고 더구나 앞으로 크게 소용이 될 암호문서가 눈에 띄었으니 그것부터 빼앗아 놓자는 것이다.

대설은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손을 옴츠렸으나 그때에 암호문서의 뒤끝은 재석이의 손에 잡힌 때인지라 중간이 박 찢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 마당에서는 암호문서가 큰 문제가 아니다. 혹시 재석은 그 가치를 아는 때문에 중대시할지 모르나 대설이쯤은 원수를 갚으러 나선 재석을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한 일이었었다.

그는 암호문서 한쪽을 찢긴 채 몸을 피하였다.

그때의 재석의 손에는 서리가 시퍼런 비수가 쥐어져 있었다.

피하여 가던 대설은 방구석에서 붙잡혔다.

재석의 내리지르는 비수를 피하고는 두 사람은 그대로 어우러져 방바닥에서 엎치락뒤치락 굴렀다.

한편 광옥은 처음 몇 초 동안 놀라 어찌할 줄 몰랐으나 그는 바로 정신을 수습 하였다.

싸움을 보니 대설에게 불리한 듯하였다. 아직 버티고 서로 한사코 싸우 나누구에게서 흘렀는지 피가 옷이며 방바닥에 시뻘겋게 번지었다.

싸움에 대설이가 진다는 것은 광옥이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것을 의미 하는것이다.

그는 나는 듯이 침실로 달려들어가 피스톨을 쥐고 나왔다.

"싸움 그만두고 일어서라."

날카로운 소리로 광옥은 외쳤다. 그의 손에 쥐어진 총부리는 재석의 머리를 겨누었다.

두 사람은 일어섰다. 광옥이의 총 겨냥은 여전히 재석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이년!"

하고 눈에 살기를 가득 담은 재석은 꾸짖었다. 수만 마디로 하고 싶은 말이 가슴에 꽉 찼으나 그 밖에는 더 나오지 아니한 것이다.

"! 이년!"

광옥은 한번 싸늘하게 코웃음을 쳤다.

"댁 생명은 아뭏든 지금 내 수중에 있소. 웬만하면 쏘아 죽일 것이로되 그건 인정상 그만두는 것이니 돌아가오. 그렇지만 다시 추근추근하게 내 뒤를 쫓다가는 용서 아니하오."

광옥은 얼음장같이 차게 마치 검사가 논고를 하듯이 야멸치게 뒤를 눌렀다.

 

재석은 이를 보드득 갈았다. 그의 눈에서는 금시에 불이 튀어나올 듯 하였다.

재석은 천천히 도어를 향하여 걸어갔다.

그는 도어 앞에서 돌아섰다. 그때에 그는 비로소 자기의 왼편 손가락 하나가 없음을 발견하였다. 다시 한번 부서지라 하고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가 오늘 밤에 피스톨을 준비 아니하고 온 것은 천추의 유한이다…… 그러나 날은 오늘뿐이 아니다. 두고 보자."

그는 이렇게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8

칼에 찔린 팔을 우디고 대설은 겨우 의자를 찾아 앉고 광옥은 피스톨을 손에 든 채 한동안이나 말이 없이 방 가운데 서서 있었다.

십 분이나 지난 뒤에 대설이가 생각이 나서 허둥지둥하였으나 암호 문서의 뒤끝은 보이지 아니하고 첫 꼭대기만 방바닥에 굴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도 이십만 원에서 얼마 쓰지 아니한 큰 돈이 남아 있을 때 인지라 그다지 안타까이 여기지 아니하였다.

그날 밤으로 그들은 집을 옮기었다.

늘 뒤를 살피며 자주 집을 옮기고 그러는 동안에 일년 이태 삼년 사년 세월은 무사히 흘러갔다.

차차 맘을 놓고 살 수가 있게 되었다.

광옥이의 돈 쓰는 품은 일 년에 만 원을 가지고 부족하였다.

돈을 그렇게 쓸 뿐 아니라 그는 곧잘 외도를 하였다.

중국 사람 서양 사람 할 것 없이 캬바레나 그 밖에 환락경에서 만나던 맘에 든 사나이들을 불문곡직하고 데려다가 침대의 동무를 삼곤 하였다.

그럴 때면 대설은 딴 방에서 꼬불트리고 밤을 새우는 것이었었다.

처음에는 항의도 하고 강짜도 하였으나 나중에는 그것이 당연한 일인것처럼 대설은 본체만체하였다.

십 년이 지나갔다.

대설은 차차 늙어갔다. 광옥은 점점 젊어갔다. 그의 남자를 농락하는 수단은 날로 익어갔다.

그는 남자를 농락하되 결코 돈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었다. 되레 돈을 들여가면서 남자를 가지고 놀았다.

돈 많은 부자가 오입을 하고 다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있는 돈을 곶감 빼먹듯이 빼먹노라니 점점 줄기만 할밖에.

광옥이가 조선으로 돌아오기 얼마 전 즉 상해의 십오 년 생활의 결과는 이십만 원의 대금을 다 써버리고 겨우 돈 만 원쯤 예금통장에 남아 있을 때다.

돈이 이렇게 없어지매 대설에게 대한 광옥의 푸대접은 한층 더하였다.

그런데다가 또 우연히 상해로 굴러온 광옥의 오랍동생 광식이가 그들을 만나가지고는 그 역시 돈을 함부로 대고 쓰며, 또 이유없이 대설을 미워하는것이었었다.

어느 날.

광옥이가 침대에 누워 있노라니까 대설이가 탁자 옆에서 전에 없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거 멀 그렇게 좋아하오?"

"?…… …… 풀었어."

대설은 요즈음 몇 달 동안 한쪽 남은 암호문서에 매달려 골몰하는 줄을 광옥은 알았던 것이다.

그들은 돈이 차츰 말라가매 자연 구미가 암호문서로 당기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풀었어?"

광옥은 반가와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이 한쪽이 있어야지!"

"그때 뺏어 두었드라면!"

"글쎄 말이야!"

"작자는 그 뒤 어데로 갔을까?"

"글쎄…… 조선으로 돌아갔겠지. 제가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라구…… ""아뭏든 그놈 한쪽을 마저 뺏어야 할 텐데…… ""저도 이놈 한쪽이 없으니까 아직 손은 대지 못했을 거야."

대관절 이게 재석이가 만들어둔 암호가 아니오? 글씨를 보아도…… ""그렇지."

"그러면 제가 아는 것인데 손을 아니 댔을 리가 있을라구?"

"이것 없이 손을 댈 수 있는 것이면 이런 것을 만들어둘 필요가 어데 있어?"

그리하여 두 남녀는 제가끔 딴 생각을 하면서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그치었다.

 

그리한 지 삼사 일이 그대로 지나갔다.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어느 날.

광옥은 아침부터 밖에 나가 놀다가 늦게 돌아왔고 광식이도 늦게 돌아온 때 였었다.

별로 나가는 일이 없는 대설이가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아니하였다. 심상 히 생각하였으나 밤이 새고 그 이튿날 오정때가 되어도 아니 돌아왔다.

비로소 의심이 나서 우선 예금통장을 찾으니 보이지 아니하였다.

'아차!' 하고 후회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9

그렇지 아니하여도 조선을 한번 돌아와서 재석이에게 암호문서의 한쪽을 마저 빼앗고 또 허준이를 위협해서 돈 십만 원이나 긁어내고 하려던 차이다.

그런데 대설이가 발등을 밟고 나선 것이다.

즉시 이것저것 팔고 어쩌고 해서 천 원 가량 되는 것을 밑천삼아 조선 땅을 다시 밟은 것이 삼 주일 전의 일이다.

아주 계획적으로 광식이를 시켜 그럼직한 부하를 긁어모았다. 활동을 개시 하였다.

제일착으로 익선동 그 노파의 집에 대설이가 숨어 있음을 손쉽게 알아내었다.

몇 차례 암호문서를 빼앗아내려고 협박도 하고 또 수하 한 놈을 그 행 랑방에 두어 계교도 썼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학희 부녀가 서울에 있고 역시 대설의 주위에서 감도는 것을 발견 하였다.

그 뒤 재석이가 손가락 소포 사건을 일으킨 것을 보고 비로소 그들이 대설을 잡아간 줄 알았다.

손가락 소포 사건은 광옥이에게 대하여 너에게도 복수의 손이 간다는 위협의 연극이었었다. 그러나 재석은 광옥이가 방금 서울에 있어가지고 보다 더 무서운 활동을 하느니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재석이는 괜히 손가락 소포로 나를 위협하려다가 되려 내게 되 잡힌 셈이 되었지."

이 말로써 광옥은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면 재석씨는 죽을 때까지도 허준이가 그 공모에 든 줄은 몰랐나?"

 

하고 영호가 물어보았다.

"몰랐기 쉽지…… 아마 상해서 그때 바로 조선으로 온 게 아니라 딴 데로 돌아다녔지? 그랬으니까 그 뒤도 알어볼 틈이 없었을 테고, 또 알어 보려 했자 알 수도 없을 테니까."

"대관절 그 불쌍한 사람을 왜 죽였소?…… 아모리 당신이기로니 맘에 걸리잖소?"

영호는 광옥이가 재석 노인을 죽인 일이 문득 생각나서 증오에 타는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호호호호…… 아이고 무서워! 옳지, 장래 장인영감을 죽였다고 그래서 이렇게 분개하는구려?…… 아이고 그렇게 성을 내니까 암상스런 게 더 귀엽다!"

"네라끼 수언!"

"찢어죽여도 아깝잖을 요독한 계집년이란 말이지? 호호. ── 그렇지만 이 거 봐요…… 내가 죽인 것도 아니고 또 그애들도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래요. 그 김가 그 녀석이 지랄을 하니까 다리를 쏜다고 쏜 것이 먼 데 있는 그 영감이 맞은 것이래요…… 캄캄 어둔데 누가 누군지 알었겠소?"

"그래도 어쨌든 죽기는 당신 때문에 죽잖았소?"

"허기야 그렇지…… 그러나 할 수 없는 일이지. 지금 그것을 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하면 죽은 사람이 살어오우?"

"맘에 조곰도 꺼리끼잖애?"

"그런 말은 나더러 묻지 말어요. 내가 사람의 맘을 내바린 지가 발써 이십 년이 가까워 오는데 지금 물어서 무얼 하겠소? 염마(艶魔)야 염마…… ""그럼 대설이도 죽였구려?"

"아니 제절로 죽었어…… 그게 죽기 때문에 되려 일이 더디어진걸…… "영호는 더 말하고 싶지가 아니하였다.

족히 인간이라고 여길 대상이 못되는 인간이다. 곱고 고운 인간의 탈을 쓴 그야말로 염마다.

그 염마에게 그런 줄 번연히 알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힘으로 인하여 야릇한 매력을 느끼는 영호 자기 자신이 몸서리가 나게 무서웠다.

"? 무서워? 호호, 그러나 내가 당신은 잡어먹잖을 테니 염려 말어요…… 그리고 일 끝나거든 나하고 같이 상해 갑시다 응."

광옥은 영호의 볼때기를 사뭇 한점 베어먹고 싶은 듯이 꼭 꼬집는다.

영호는 그것을 피하려고 고개를 쌀쌀 내두르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요 가!"

"아이고 정말 노염이 났어! 그렇지만 인제 봐요 응…… 우리 도령이 이렇게 노염이 나서 어떻게 해?"

영호는 대꾸를 하지 아니하려고 입을 꼭 다물고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인제 봐요. 내가 하눌이 무너져도 당신을 붙들어가지고 상해로 갈 테니…… 나는 내가 좋은 사람을 그대로 놓쳐본 적이 없어…… "이렇게 말을 하고 그는 안방으로 건너갔다.

10

오늘 저녁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 영호는 잠이 오건만 참아가며 시간을 기다렸다.

밤이 훨씬 깊은 뒤에 안방에서 광옥이 남매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랑에서 웅성웅성하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광옥이가 건너오는 소리를 듣고 영호는 조는 것처럼 눈을 감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저런! 우리 도령이 앉어서 졸아요…… 아이 누워서 자잖고!"

광옥이는 들어와서 요를 펴준다. 영호는 일부러 잠에 취한 소리로 "지금 멫시요?"

하고 물어보았다.

"새로 한시 반…… , 묶여서 자기가 멋하겠지만 그대로 참고 자우…… 그러고 오늘 저녁에는 미안하지만 방문 밖에 파수병을 세워두어야겠어."

"?"

"집이 텅 비었으니까…… ""파 수병은 말고 대포라도 걸어놓구려…… 그렇지만 그 파수병더러 담배나 좀 자주 멕여주라고 일르구려…… ""잠은 아니 자고 담배만 피울 테요?"

"낮잠을 잔데다가 방금 또 졸았더니 인제는 정신이 새맑어오는 게 오늘밤 잠은 다 잔 모양이요."

"그건 그러시요만…… 저 여보게."

하고 광옥은 밖에 대고 부른다.

언제 와서 있었는지 벌써 소위 파수병이라는 것이 앞문 밖 툇마루에서 ""하고 대답을 한다. 그 목소리가 낮에 영호의 시중을 들어주던 친구인 듯하다.

 

"이따가 이 양반이 담배 멕여 달라거든 멕여 드리게…… 그러고 또 일르지만 놓치는 날이면 자네는 죽네…… 달어나랴고 하거든 덮어놓고 쏘아."

이렇게 매섭게 다져 이르고는 해뜩 웃으며 영호를 돌아본다.

"아예 달어날 생각 말고 있어요. 괜히 그러다가 다치지 말고 응…… 자내가 위선 한대 붙여주지."

그는 담배를 붙여주다가 어젯밤처럼 키스를 강탈하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광옥이는 돌아가고 집안은 완전히 조용하여졌다.

가량에 한 삼십 분쯤 되었을 때에 영호는 일을 시작하였다.

묶인 다리라 오므릴 수가 없으므로 우선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바싹 숙여가지고 묶인 채 허리에 동여맨 두 팔목을 끌어 올렸다.

그래도 입이 잘 닿지 아니한다. 다시 팔목을 요리조리 틀어 허리 묶인 것을 위로 올리었다. 그래가지고 해보니 이번에는 겨우 입이 닿는다.

그러나 든든한 동바를 이빨로 물어 끊는다는 것은 용이치 아니한 일이다.

더구나 똑똑 소리가 나서는 파수병이 뛰어들을 것이요, 야긋야긋 물어 떼자니 밤새도록 해도 끝이 아니 날 것이다.

한 시간 가량이나 애를애를 써가지고 겨우 한 줄을 물어 끊었다.

이놈을 인제는 푸는 것이 한참 일이다. 턱으로 비비고 내어두르고 그리하여 드디어 양손의 자유를 얻고 이어 묶인 다리도 풀었다.

그는 묶었던 줄을 요 밑에 숨기고 이불을 그러덮고 누웠다.

"여보?"

영호는 보드라운 소리로 파수병을 불렀다.

"왜 그래?"

"이리 좀 들어오시우."

"왜 그래 글쎄?"

대답하는 조가 겁이 나는 모양이다.

"들어와서 담배 좀 붙여주."

"담배는 경치게도 먹는다! 염소 새낀가! 좀 참구려."

"아니 당신네 수령이 시킨 대로만 해주면 그만 아니요? 듣잖으면 내일 다 꼬아 바칠 테요."

"! 꼬아바친다면 누가 무서워하나?"

이렇게 큰소리는 하였어도 그는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들어서는 그는 잔뜩 언 놈처럼 피스톨의 겨냥을 영호의 머리에 대고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아니한다.

 

영호는 고개로 담배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는 왼손으로 담배곽을 집어 한 개 뽑아서 영호의 입에 물려준다.

그리고는 다시 성냥곽을 집어 한편 발로 디디고 왼손으로 불을 그어다 대어 준다.

영호는 뻑뻑 두 번쯤 빨다가 갑자기 "에체"하고 재채기를 하였다. 그 통에 놀란 파수병의 팔은 움찔하여 머리에 겨누었던 겨냥도 홱 틀어졌다.

그 순간 영호는 뛰어 일어섰다.

13. 서 팔 호실 1 영호는 뛰어 일어나면서 파수꾼의 피스톨을 쥔 바른편 팔목을 잡아 틀었다.

푸시시 하고 한 방 발사된 소음 피스톨은 힘없이 좍 벌리는 파수병의 손에서 미끄러져 내려졌다.

무기를 빼앗았으니 이따위 파수병 하나쯤이야 떡 주무르듯 할 수가 있다.

손 재게 요 밑에 두었던 동바로 결박을 지워놓고 영호는 뛰어나섰다.

그대로 나오려다가 안방을 굽어다보니 역시 텅 빈 품이 건넌방과 다름이 없다.

다시 휘휘 둘러보니 마침 철필과 잉크가 있다.

그는 벽에다 굵직굵직한 글자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마담! 신세 많이 끼치고 가오. 그러나 파수병에게는 허물이 없고 당신이 이불을 준 것과 앞으로 묶어준 것과 또 파수병더러 담배를 먹이라고 한 데 잘못이 있읍니다. 이 글을 발견하는 대로 곧 상해를 향하여 떠나든지, 그렇지 아니하거든 자살할 약을 늘 준비하여 두시오."

이렇게 써 내던지고 영호는 그곳을 뛰어나왔다.

어쩐지 섭섭하여 뒤가 돌아다보이는 자기를 영호는 나무랐다.

, 인제는 무엇보다도 집으로 빨리 가보아야 할 것, 그리고 날이 밝으면 한시바삐 학희를 구해내야 할 것. 이런 생각을 하며 영호는 좁은 길을 이리저리 한참이나 헤매다가 겨우 큰길을 찾았다.

둘러보니 바로 청운동이다. 그는 다시 한번 오던 길로 해서 잡혀 있던 집을 알아둘까 하다가 그랬자 필요가 없음을 깨닫고 그대로 집을 향하여 두 달 음질을 쳤다.

잡혔던 집을 알아두자는 것은 그곳을 역습하여 그들 일파를 붙잡자는 것이 나 영호가 벗어난 것을 발견한 그들은 직각으로 장소를 옮길 터이니 소 용이 없는 일이다.

효자동 전차 종점까지 나온 영호는 경무대 앞으로 해서 삼청동으로 돌아섰다.

이편 영호의 집에서는 아래층을 지키던 김서방이 현관문의 핸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누구야?"

소리를 쳤다.

"문 열어주어요. 백선생 편지 가지고 왔소."

이것은 저편의 대답이다.

"편지?"

"."

김서방은 가서 쇠빗장을 벗기려 하다가 다시 생각하고 이층의 상준이를 불러 내렸다.

"선생님 편지를 가지고 왔다는데…… ""누가?"

"저 밖에 있어."

"그 편지 문 밑으로 들여보내우."

상준이가 앞으로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사실 이 편지 가져왔다는 것은 광옥이의 수하들이 이곳에 와서 자정부터 두 시간 동안이나 침입하려고 가지각색으로 벼르다가 실패한 나머지의 최후 계책 이었었다.

유리창에는 모두 겉으로 든든한 쇠창살이 있고 이층 역시 그러하다. 현관문이며 뒷문은 다 닫기었다. 들부수고 들어가자면 못할 것을 없으나 그것은 자기네가 여기 도적 왔소 하고 외치는 것과 일반이다.

그리하여 최후의 계책을 써본 것인데 편지를 문 밑으로 들여보내라니 또한 실패다.

가짜 편지라도 써가지고 왔더라면 필적을 속나 아니 속나 한번 들여 밀겠지만 그나마 준비를 해가지고 오지 아니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두 시간의 노력을 그대로 내던지고 뚜벅뚜벅 회군을 하였다.

영호가 돌아온 것은 그들이 물러간 지 한 이십오 분쯤 지나서였다.

집안 사람들은 영호의 돌아온 것을 보고 모두 안심하는 한숨을 내어 쉬었다.

영호가 잡혀갔던 경로 이야기를 하매 향초는 놀람 반 기쁨 반에 어쩔 줄을 모르고 김서방과 오복이는 즉시로 그 집을 습격하자고 서둘렀다.

그러나 영호는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알려준 뒤에 옷을 갈아 입었다.

경성자동차부에 전화를 걸고 그들이 한강 건너서 찾아왔다는 차를 다시 빌려 왔다. 경찰서에서 기별해 준 대신 차를 함부로 버리고 다닌다고 설유까지를 받았다고 한다.

영호는 네시가 가까운 줄 알면서 바로 집을 뛰어나섰다.

2

동소문 밖에 살인사건이 생기던 날 그날 낮에 대학병원 정신과에는 새로운 환자 하나가 진찰을 받게 되었다.

환자는 묘령의 여자다. 단발은 하였으나 긴치마에 버선을 신었다. 그 환자는 너무 야단을 부리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마취를 시켜 침대 인력거에 태워가지고 왔다.

그리하여 환자는 아직도 깨어나지 아니한 채 진찰대 위에서 혼곤히 정신을 잃고 누워 있다.

그를 데리고 온 사람은 의사에게 대강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즉 환자는 자기 누이동생인데 본래부터 몹시 신경이 예민하였었다.

그런데 한 일 년 전에 우연히 연애를 하게 되어 그야말로 죽을 동 살 동 모 르고 열중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약 한 달 전에 그만 그 남자에게 버림을 당하였다. 그 남자는 새로운 애인이 생겨가지고 그와 같이 자기 누이를 버린 것이다.

실연을 당하자 극도로 정신이 흥분된 차에 엎친 데 덮친다고 하루는 길에서 옛 애인과 그의 새 연인인 여자가 나란히 걸어가며 정답게 속삭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것을 본 이 여자는 그대로 달려들어 그의 옛 애인의 새로운 연인을 물어 뜯고 쥐어뜯고 옷을 갈가리 찢고 욕을 해주고 하였다.

그때부터 그는 완전히 미쳤다. 사람을 보면 누구 할 것 없이 덤벼들어 쥐어 뜯고 욕을 하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니 된 것은 자꾸만 거리로 뛰어 달아나가려는 것이다.

별 종작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울고불고 한다.

머리도 썩 좋던 것인데 이번에 제가 제 손으로 저렇게 잘라버린 것이다.

그러니 정신병실에 입원을 시켜 치료를 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데리고 온 사람의 이야기가 대강 끝이 나자 환자는 깨어났다.

 

그는 머리가 아픈 듯이 이마를 찌푸리다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의사와 간호부가 둘러선 것을 보고 진찰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사가 제지 할 사이도 없이 뛰어나 달아나려고 하는 것을 데리고 온 사람이 붙들었다.

"놓아 이 녀석아 놓아!"

하고 몸부림을 하며 악을 쓴다.

"이애 이거 왜 이러니! 이러지 좀 말고 저기 가 누워 있거라 어서…… ""이런 멀쩡한…… 어따 이 사람이 도둑놈이여요. 도둑놈이여요…… 지금 나를 붙잡어가지고 암호문서를 뺏을 양으로 이런답니다."

이 말에 방에 모여선 사람들은 모두 웃었다. 과연 미친 사람이 함직한 소리다.

"왜 웃어요? 왜 웃어요? 나는 아모데도 아프지 아니해요. 놓아주어요."

필경 환자는 울기 시작하였다. 이 여자가 학희인 것은 그만해도 독자가 짐작 할 것이다.

광옥이는 학희를 데리고 있느니보다 거짓 미친 사람을 만들어 정신 병실에 감금 시켜 두는 것이 도리어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성공을 하였다.

의사는 대강 진찰을 한 뒤에 즉시 학희를 서팔호실로 옮겨 이층의 가장 난폭한 환자를 두는 방에 넣고 밖으로는 쇠빗장을 잠갔다.

그런데다가 광옥은 명칠이라는 수하 하나를 보내어 겉으로는 병 간호를 하는 체하면서 내용으로는 학희를 감시하게 하였던 것이다.

광옥이는 언니라고 하고 광식이는 오빠라고 하며 가끔 들러서는 그 방에 들어가 유대설에게서 암호문서 빼앗은 것을 내라고 소곤소곤 족쳤다.

학희는 소리를 질러 외치나 그것은 아무도 미친 여자의 발작으로 여기지하나도 참으로 들어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너무도 안타깝고 분하매 그는 정말로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밥을 들여주어도 그릇째 내박치고 먹지 아니하였다. 의사가 진찰을 하려도 손등과 옷을 쥐어뜯을 뿐이지 옆에 붙이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밥도 먹이려 아니하고 의사가 회진을 와도 굽어 보지도 아니하였다.

3

창이 휘엿이 밝았다. 간호부는 졸리는 눈을 쥐어뜯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 고 영호와 그의 친구인 대학병원의 의사는 담배를 피우며 듣고 있었다.

아랫목에는 간호부의 어머니가 때아닌 손님의 방문에 놀라 깨었다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영호는 집을 나서던 길로 대학병원에 있는 의사로 친한 친구의 집을 찾아가 두드려 깨웠던 것이다.

눈을 쥐어뜯고 나오는 의사를 급한 일이 있다고 옷을 갈아 입혀 그 길로 대학병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서팔호실의 비번(非番) 간호부가 누구인지 알아가지고는 찾아온것이 이곳이다.

간호부의 이야기가 끝나자 영호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

"그 여자가 실상은 미친 것이 아닙니다. 생사람을 갖다가 잡어넣고 미쳤다고 한 것입니다…… 이 사람아,

"영호는 이번은 의사를 돌아보았다.

"그게 내 약혼한 여잘세!"

의사와 간호부는 다 같이 놀랐다.

"!!"

"!!"

"거 웬 소린가?"

"웬 소리고 머고가 없어…… 나하고 약혼한 여잔데 자기네 집에서 내게로 시집을 아니 보낼 양으로 그렇게 생미친 사람을 만들어서 갖다가 때려 가둔 걸세…… "영호는 일부러 창연한 낯빛으로 대답을 하였다.

"실연했다는 것은 정말이야…… 그렇지만 그 실연이 애인인 내가 그를 버려서 실연이 아니라 자기네 집안 사람한테 방해를 당해서 한 실연이야. 그러나 결코 미치지는 아니 했네…… ""글 써 어쩐지 달르드구먼."

하고 간호부가 비로소 자기의 의심하던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줄곧 정신병실에 있으니까 남녀 할 것 없이 미친 사람은 많이 보는데 어쩐지 그이는 좀 달러요…… 어떻게 보면 미친 것도 같지만 어떻게 보면 성한 사람이 생으로 미치러 드는 것도 같애요……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면서 태연했었는데."

"정신과 의사가 진찰을 했다는 게 그게야?"

이번은 의사가 분개한 듯이 정신과 의사를 비난하는 말씨로 간호부에게 묻는다.

 

"그렇게 야단을 치니까 초곤초곤 진찰도 못했나봐요."

"그래도 원…… ""그거야 그렇기가 쉽지."

하고 영호는 말을 돌리었다.

"요짐은 좀 안정되었다지요?"

"…… 풀이 죽어서 야단도 치잖고 그래요."

"그러면 여보게…… "하고 영호는 의사를 돌아보았다.

"나는 여기서 이야기를 좀더 자세하게 듣고 갈 테니 자네는 먼점 돌아가게…… 오늘 낮에 일 볼 사람이 되겠나?"

"아니 괜찮아."

하면서도 그는 하품을 커다랗게 뱉는다.

말로는 그래도 인제 자기 할 일은 다 했으니까 돌아가고 싶어하는 눈치다.

"아니야…… 그렇게 겸사할 게 아니라 먼점 가게…… 우리 사이에 뭣 그런 체면 차릴 것 있나?"

영호는 의사를 먼저 돌려보냈다. 돌려보내는 것이 간호부와 비밀한 상의를 하기 위한 것은 물론이지만 그는 돌아가는 의사에게도 당분간 아무에게도 발설을 하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의사를 문 밖에서 작별하고 영호는 간호부와 같이 다시 들어와 앉았다.

"그런데 그 여자를 거기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정말 미치든지 죽든지 할테니 어쩌면 좋겠읍니까?"

영호는 우선 이렇게 물어 간호부의 속을 떠보았다.

"그러문요…… 정말 미치든지 애가 밭어서 죽든지 하지요. 글쎄 성한 사람을 미쳤다고 때려 가두었으니 견디겠어요?"

"거 어떻게 구해낼 수 없을까요?…… 실상 한가지 방법이 있기는 하지만…… ""방법이 있다면 해보시지요."

"그런데, 그건 댁에서 꼭 들어주어야 성공을 하지 그렇잖으면 실패합니다."

"제가 들어야 해요?"

간호부는 자기더러 들어달라는 말에는 난색을 보인다.

4

 

모든 계획을 꾸며 두었던 터라 영호는 집을 나올 때에 준비한 지폐 뭉치를 꺼내어 간호부 앞으로 밀어놓았다.

"초면에 이거 퍽 실례올시다만 받어주십시요…… 그러고…… ""아이 그게 무업니까!"

이렇게 반색을 하며 간호부는 돈을 도로 밀어놓는다. 그는 실상 돈이( 백원인데 얼마 되는지는 모르나) 겁도 나지만 구미도 나기는 하는 눈치다.

"아니 그럴 게 아니라 내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요."

영호는 다시 설명을 하였다.

"지금 댁에서 내 일을 거들어주기가 어렵다는 것은 혹시 일이 탄로가 날까 봐서 그러는 거지요?"

"글쎄……"

"머 별거 없어요…… 탄로가 날 이치도 없겠지만 그런댔자 환자를 잘 못 지켰다고 면직밖에 더 당하겠읍니까? 그렇게 되면 내가 나서서 딴 병원에 주선을 해드리고 그리고 새로 취직이 될 때까지 생활은 보장해 드리지요…… 자 그러니 이건 위선 약소하나마 그대로 받어두시고 우리 일 상의를 합시다."

영호는 돈을 집어 경대 서랍 속에 넣어주었다. 간호부는 그것을 말리려고도 아니하고 아무 말도 아니한다.

"어느 사람이 감시를 하고 있다지요?"

"…… 그 방문 옆에 가 꼭 붙어앉어서 일시를 떠나지 않아요…… 그러고 누구 견학 온 사람이라도 혹시 그 방을 굽어다보면 상을 무섭게 하고는 그 환자는 특별하니 들여다보지 말라고. 그리고…… ""밤에는?"

"밤에는 그 방 건너편에 빈 방이 하나 있는데, 거기 들어가서 자요…… 열두시 지나서 자러 들어가는데 생기기는 그렇게 아무렇게나 생겼으면서 웬게 잠귀가 그렇게 밝은지 발자국 소리가 나면 으례 내어다보는걸요."

"잠귀가 밝다…… "하고 영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간호부들하고 더러 농도 하고 장난도 하고 해요?"

"그럼요…… 퍽 숭굴숭굴해요."

"과자나 과실 같은 것 더러 사서 간호부들하고 나누어 먹고 차도 달여 먹고 그럽니까?"

", 가끔 그래요."

영호는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 되었읍니다…… 그런데 댁에서 입는 옷──간호부 제복──한 벌더 없어요?"

"마침 한 벌 빨어논 것이 있기는 하지만 좀 해졌어요."

"

 

괜찮습니다…… 그놈을 오늘 좀 가지고 가십시요. 나는 이따가 아홉시에 정신병실에 다시 들려서 자세 말씀을 해드리지요…… 그렇지만 그 간호 부복은 동무들이라도 보잖게 어데 잘 간수해 두십시요."

이렇게 우선 예비 준비를 해두고 영호는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 날이다 밝고 전기불이 나갔다.

영호는 침실로 들어가 한 시간 가량이나 고심해 가지고 편지 두 장을 썼다.

얇은 종이에다 잔글씨로…… 그래서 착착 접으면 손가락 사이에도 숨길 수 있게 만든 것이다.

편지를 써가지고 응접실로 나와 눈을 쥐어뜯는 김서방을 불러다가 보였다.

"글씨가 영감님 글씨 비슷한지 좀 보게?"

영호는 견본이 없으므로 손가락 소포에 씌었던 글씨와 제일여관의 숙박 부에서 보던 글씨를 생각하여 가면서 그 필적을 본떠서 쓰느라고 쓴 것이다.

그러나 김서방은 편지보다도 편지의 문맥을 보고는 눈을 번쩍 거리며 "아가씨 어데 있어요?"

하고 묻는다.

"그럼 있잖고 어데 하눌로 올라갔을까?…… 잔말 말고 그 글씨가 영감님 글씨하고 같은가만 보아."

"글쎄…… 같은 것 같은데요."

김서방은 편지를 다시 한번 유의해 보며 대답을 하나, 김서방 자신이 남의 필적을 알아볼 만한 정도가 못되는 만큼 장담은 할 수 없는 눈치다.

영호는 편지를 도로 받아넣고 아홉시가 되기 전에 집을 나와 종로 나가서 흰 구두 한 켤레를 사가지고 대학병원으로 자동차를 몰았다.

오늘 아침 만나던 간호부는 기다리는 듯이 정신병실의 현관에 나와 있었다.

5

학희는 인제는 떠들고 몸부림할 기운조차 잃었다.

아무리 떠들고 몸부림을 하며 야단을 쳐야,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미친 사람으로만 여길 뿐이다.

 

그야 그렇건 말건 너무도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것을 실컷 야단이나 쳤으면 좋겠으나 정신의 격동과 아울러 변변히 먹지도 아니하고 이래 지내왔으므로 그의 심신은 극도로 피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정악이 받치면 소리 마디나 지르고 들어오는 의사를 쥐어뜯기나 하고 하지 대부분을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 침울하게 보내었다.

그것이 심하여 어제 오늘은 간호부에게 맥도 보이고 의사가 진찰하는 것도 다소곳하고 하는 대로 내맡기었다.

그저 일념에 아버지가 빨리 와서 구해주시기만 심중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었다.

열한시쯤.

간호부가 치료전과 검온기를 가지고 들어왔다.

하는 대로 검온기를 입에 물고 맥보는 팔을 내맡기고 있노라니까 간호 부가 무슨 종이쪽을 손바닥에 쥐어준다.

간호부와 시선이 마주쳤다. 간호부는 눈을 끔적한다.

간호부가 대강 일을 보고 나간 뒤에도 학희는 그대로 잠깐 앉아 있었다.

그것은 의사나 간호부가 다녀 나가는 족족 밖에서 지키는 자가 한번씩 들여다보는 줄을 아는 때문이다.

한참 후에 문을 등지고 돌아앉아 간호부가 쥐어주던 종이쪽을 폈다.

"학희야."

하고 첫대가리에 쓴 것이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아버지가 써보내신 것이다.

이때에 학희는 얼마나 기뻤었던가!

그의 가슴은 두근거렸다. 등 뒤를 한번 돌아본 뒤에 편지를 읽었다.

"자세한 말 아니한다. 이따가 밤에 또 기별이 있을 테니 그대로 시행 하여라.

그러고 그렇게 천연스럽게 있지 말고 정말 미친 양으로 야단을 쳐라. 더구나 그 계집과 학생놈이 오거든 마구 야단을 쳐라.

밤에 기별 가는 것 부디 명심하여 시행하여라. 아비."

학희는 "아이구 좋아라!"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꼭 참았다.

그는 편지를 꼭꼭 씹어 북편으로 난 쇠창살로 해서 내던지고는 한바탕 야단을 쳤다.

지키는 사람이 의외라는 듯이 한번 굽어다볼 뿐 간호부들은 으례 그런 것이라 여김인지 와서 보지도 아니한다.

오후에 그 학생 ── 광식이가 왔다.

수직하는 자와 밖에서 소곤소곤하는 이야기다.

 

"어때?"

"한 이삼 일 풀이 죽었더니 오늘부터는 또 야단을 쳐요."

"…… 되려 잘되었다. 별로 수상한 눈치는 없지?"

"없어요."

광식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것을 학희는 뛰어가서 밖으로 나오려고 덤벼 들었다.

"이 녀석아! 이 녀석아! 놓아라. 왜 날더러 미쳤다구 이렇게 가두어 두니?

응 이 지옥으로 갈 녀석아!"

학희가 이렇게 발악을 하며 몸을 빼쳐 문으로 덤비는 것을 광식은 우악스럽게 와락 떼밀었다. 그러고 독살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면서, 그러나 말만은 남이 들어도 다정할 만큼 순순히 타이른다.

"이애야, 글쎄 너 왜 이러니? 이러니까 이런 데다 데려다 두지! 너를 이런 데다 이렇게 두어두는 내 맘은 어떻겠니?"

이렇게 남이 알아듣게 큰말로 일러놓고는 다시 조그만 소리로 "그러니까 그걸 내놓아…… 내노면 놓아줄 테니…… "하고 눈방울을 사납게 굴린다.

"머 어째? 무얼 내놓아? 무얼 내놓아? 나를 죽여보아라 내놓나?"

"허허 이애가 이 왜 이럴까! 참 큰일났군!"

광식은 이렇게 탄식을 하며 도로 나왔다.

그가 돌아간 뒤에도 학희는 가끔 야단치기를 잊지 아니하였다.

"밤에 기별…… 밤에 기별."

이렇게 속으로 외우면서 지리한 해가 저물었다.

인제는 어서어서 밤이 깊고 그러한 뒤에 아버지의 기별이 와야 할 터인데…… 혹시 무슨 고장이나 생기잖으려나…… 근심 반 기쁨 반으로 초조히 기다렸다.

6

밤 열시가 거진 되어서…… 학 희의 갇히어 있는 방문 앞으로 간호부가 와서 멈춰 서며 "아이고 졸려."

하고 하품을 한번 한다.

하품이란 놈은 균도 없이 곧잘 전염을 하는 것인지 학희 방을 감시하던 친구가 간호부를 따라 하품을 한번 커다랗게 내뱉는다.

 

"오늘 저녁에는 왜 이렇게 졸릴까!"

간호부는 혼잣말같이 한다.

"글쎄 나도 좀 졸리는걸…… ""홍차나 한잔 달여먹을까 부다."

하고 간호부는 돌아서서 간다.

"여보, 나도 한잔 얻어먹읍시다그려."

수직꾼이 간호부의 등 뒤에다 대고 부탁을 한다.

"글쎄…… 생각나면 한잔 갖다 주고…… ""그러지 말고, 한잔 가져와요."

한 십 분 후에는 간호부가 마노색같이 고운 노르붉은 홍차 한잔을 김이 오르는 채 가지고 올라와서 수직꾼을 준다.

"아이구 이거 참, 이거 참 감사해서…… "그는 홍차를 덥석 받아서 꿀맛같이 훌훌 들이마신다.

"그렇지만 그것 자시고 잠 못 잤다고 날 원망은 마시우."

간호부는 웃으면서 농삼아 뒤를 다진다.

"아따! 염려 말어요…… 나는 잠 아니 자는 것이 내 직분이니까 되려 좋지요."

이러한 지 삼십 분 후에는 수직꾼 명칠이는 교의 위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졸다가 못하여 방으로 들어간 그는 열한시가 되었을 때에는 세상 모르고 코를 들들 골았다.

그가 간호부에게 얻어먹은 홍차 한잔 속에 보통 용량의 갑절이나 되는 아 다린( 수면제) 이 들어 있었다는 것은 제아무리 귀신이라도 그 당장에 알아내지는 못했던 것이다.

수직꾼의 때아닌 코고는 소리가 높았을 때 아까 그 간호부 즉 오늘 아침에 영호와 약속을 한 그 간호부는 살금살금 걸어 올라왔다.

그의 손에는 옷보퉁이가 들려 있다. 그는 수직꾼의 방문 앞에 와서 "여보"

하고 한번 불러보았으나 대답이 없다. 이만하면 안심이다.

그는 학희의 방 앞으로 와서 빗장을 살그머니 열고 옷보퉁이를 들이밀었다.

학희는 옷보퉁이를 받아 한편 구석으로 가서 펴보았다.

맨 위에 새까만 손가방이 있고 그 위에 아까 같은 편지가 놓여 있다.

"학희야, 이 옷을 갈아 입고 이 가방을 들고 앞에 가는 간호부를 따라 나와서 기다리는 자동차를 타라. 네가 신었던 신발이며 그 밖에 남는 것은 이보에 싸가지고 나오느라. 주저하지 말고 재빨리 서둘러라.

 

아비."

학희는 일초도 유예치 아니하고 간호부옷을 입었다.

머리에 쓰는 것도 단발머리를 어떻게 오므려서 쓰는 시늉을 하였다. 신발도 흰구두로 바꾸어 신었다.

이렇게 하고 일어서서 보니 속에는 조선 구식옷일망정 겉으로는 버젓한 간호 부다.

그는 버선이며 고무신이며를 거두어 보에 싸고 또 편지를 아까 낮에 하 듯이 들창 밖으로 내던지고 그러고 나서 살그머니 문을 열었다.

자유의 첫걸음을 내어디디었다.

휭하고 멀미가 나며 몸이 쓰러지려는 것을 바로잡아 일으켰다.

복도로 나섰다.

환자란 모두 정신병자들뿐이니 학희를 보고 웬 간호분가 하여 의심낼 사람도 없거니와 누구 하나 내어다보는 사람도 없다.

층계에서 간호부가 돌아선 채 기다리고 있다.

학희는 천연덕스럽게 척척 걸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도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아니하였다. 이렇게 눈에 아니 띄고 나올 수 있을 줄 알았다면 구태여 간호부로 변장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앞선 간호부가 필경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학희도 따라나섰다.

앞선 간호부는 여전히 뒤는 돌아보지 아니하고 손을 들어 바른편을 가리키고는 자기는 왼편으로 가버린다.

학희는 다시 한번 머리가 휘어질 뻔하고 몸이 비틀비틀하는 것을 이 래서는 아니 되겠다고 정신을 가다듬어 사방을 살펴보았다.

7

앞에는 언덕을 내려가 큰 건물이 시커멓게 가리어 있다.

머리 위에서 솔잎이 휘파람을 분다. 고개를 들어 보니 좌우로 낙락장송이 드문드문 서서 있다. 하늘에는 달은 아니 보이나 별빛이 희미하다.

어딘가? 하고 바른편을 유심히 살피니 서편 멀리서 두 줄기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좍 뻗어나간다. 자동차다!

학희는 그편을 향하여 빨리 걸어갔다.

자동차 옆에 당도하니 머리에 붕대를 동인 운전수가 내려서서 문을 열어 준 다. 몹시 낯이 익었으나 기억은 나지 아니하였다.

차 안에서는 의사처럼 깨끔하고 점잖게 생긴 사람이 천연스럽게 돌아보고는 말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이 사람 역시 어디서 본 듯한데 기억은 나지아니 한다.

자동차는 폭음을 내며 움직였다. 학희는 자기가 나오던 곳을 돌아보았다.

우중충한 솔숲 사이로 솟아 있는 시커먼 그 집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뒤를 자꼬만 돌아보지 마십시요."

같이 탄 의사 같은 사람이 이렇게 주의를 시키는 말을 듣고야 학희는 비로소 자기가 달아나는 사람의 본능적 행동이 무의식중에 나타났음을 깨 달았다. 그 다음부터는 천연스럽게 가장의사를 따라 급한 환자를 왕진가는 것처럼 앞만 바라보았다.

자동차는 속력을 놓아 달리었다. 학희는 어디로 가는지 분간치 못 하였으나 대학병원 앞에서 곧장 애오개로 달리었다.

학희더런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주의를 시키던 그 사람은 이번에는 자기가 연신 뒤를 돌아본다.

차는 애오개에서 서편으로 달리어 종로 네거리까지 와가지고는 다시 전 동 큰길을 북으로 달리었다.

여기까지 오고 나매 학희는 인제 살아났나 보다 싶어 한숨이 후유 내쉬어졌다.

학희가 한숨 쉬는 것을 힐끔 돌아보던 그 사나이는 싱긋이 혼자서 웃는다.

한데 어쩐지 그는 얼굴이 몹시 상기가 되어가지고 귀때기며 볼이 불 그 레 하였다.

별사람도 다 있다! 학희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일순간이요,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아버지가 어디선지 까맣게 기다리다가 자기가 돌아온 것을 보고 두 팔을 벌려 덥석 안아줄 것만 즐겁게 생각하고 있었다.

차는 안동 네거리에서 또다시 동으로 달리다가 재동 어귀로 들어가 재동 학교 뒷길 옆에 머물렀다.

학희는 그 사람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어둠침침한 골목길을 한참 빠져나가니 좀 큰거리가 나서는데 이곳은 학 희도 아는 곳이다. 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아침산보를 다니던 길이다. 즉 계동 큰길로 나선 것이다.

다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왼편 주택지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서 앞선 그 사람은 웬 배젊은 사람과 마주쳤다.

"없드냐?"

 

"."

'자세 둘러보았어!"

"."

학희 생각에도 감시하는 사람의 있고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였다.

학희가 아침산보를 다니면서 눈에 띄던 그 집…… 나도 저렇게 얌전스럽게 집을 한 채 짓겠다고 유념하던 그 집으로 학희는 안내를 받으면서 별 일도다 있다고 생각하였다.

현관을 척 들어서니 문소리를 듣고 나오는 게 이 집 주부인 듯한 젊은 여자요, 또 바라보이는 방문이 열리며 김서방이 뛰어나왔다.

"김서방!"

하고 학희가 부르니까 김서방은 비로소 알아보고는 그냥 쫓아나왔다.

"아가씨!"

하며 학희의 팔을 움켜잡는 김서방은 벌써 울고 있는 것이다. 학희는 김 서방의 우는 참뜻을 알지 못한다. 그래 반가와 우느니라 여길 뿐이다.

"아버지는?"

학희는 둘러보다가 김서방더러 묻는 것이다.

김서방보다도 누구보다도 아버지 ── 그 크고도 상냥한 아버지가 먼저 눈에 띌 것인데 웬일일까? 하는 것이다.

14. 刺 客[ 자객] 1 영호는 눈치 빠르게 김서방에게 눈짓을 하고는 "좌우간 이층으로 올라가십시다."

하고 앞서서 올라갔다.

학희는 손에 들고 온 것을 김서방에게 내맡기고 이층으로 따라 올라갔다.

뒤따라 김서방이며 향초며 상준이며 모두 올라갔다.

다만 식모만이 저이가 어쩔 양으로 고운 색시를 저렇게 자꾸만 데려오나!

하는 듯이 혼자서 웃다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미처 오복이도 달려와서 이 층으로. 그리하여 응접실이 뻑뻑하게 그득히 모였다.

학희는 이 방에서나 아버지가 기다리시나 하고 둘러보았으나 역시 보이지 아니하였다.

"어데 계셔?"

김서방은 학희가 묻는데 대답을 못하고 어물어물하자 영호가 얼핏 대답을 가로맡았다.

"잠깐 시골 가셨읍니다."

재석 노인이 죽었다고 바로 대답하여 그렇잖아도 심신에 타격을 받아가지고 극도로 쇠약한 학희에게 겸쳐 충동을 주지 아니하려는 것이다.

"시골요?"

학희는 또다시 김서방을 돌아보며 묻는다.

"어느 시골 가셨어?"

"저 저, 저는 알 수 없읍니다."

"어느 시골 가신단 말씀은 없고요."

하고 영호가 붙였던 수염을 떼고 얼굴에 그렸던 자국을 손수건으로 씻으면서 김서방을 대신하여 대답한다.

"아까 막차로 떠나시면서 뒷일을 모다 부탁하시고 가셨읍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조금만 기다렸으면 만날 텐데, 그렇게 고생하고 돌아오는 딸을 기다리잖고 시골을 가시다니 이상은 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영호를 자세히 보았다.

보노라니까 비로소 그가 산에서 산보를 할 때에 자주 만났고, 만날 때마다 유심 히 서로 치어다보다가는 외면을 하던 사람인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만날 때마다 퍽 인상이 깊었던 만큼 학희는 곧 잘 알아낼 수가 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오복이도 알아내었다. 손가락 소포의 연극에 쓰던 그 운전 수다. 그리하여 그는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였다.

학희는 향초가 상냥하게 권하는 대로 소파에 가 앉아 김서방의 지낸 이야기도 듣고 자기의 이야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서방은 동소문 밖 일건을 어물어물 하느라고 딴에는 매우 애를 썼다.

영호는 학희의 거처할 곳이 마땅찮아 이리저리 궁리를 하여 보았다.

아래층 식당방에서 향초와 같이 있게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위태하다.

자기 침실을 내어주자니 좀 체모가 없는 듯하다.

할 수 없이 그는 지하실로 내려가 S호실의 탁자 위의 것을 대강 치운 뒤에 학 희의 짐만 남겨놓고 다시 올라왔다.

오복이나 상준이는 지하실이 있고 그 속에 설비가 되어 있는 줄 어렴풋이 짐작하니까 관계치 아니하지만 김서방이나 향초에게는 같은 침실로 들어가는 것같이 보이는 것이 좀 멋하였다. 그러나 그런 것을 돌아볼 때가 아니라 영호는 학희에게 출입하는 방식을 가르쳐 가면서 지하실로 데리고 내려갔다.

 

학희는 좀 서먹서먹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다 하였다.

S호실에 자기의 짐과 또 아버지의 외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저으기 안심하는 듯하였다.

"여기면 대포 외에는 아마 아무도 범접하기 어려울 테니 안심하고 편안히 쉬십시요. 이야기는 내일 차차 해드리지요."

영호는 학희가 어려워는 하면서 꼬치꼬치 무슨 말을 물으려는 것을 이렇게 막아 버리고 침실로 돌아왔다.

좌우간 학희를 구해냈으니 인제 안심을 하였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학희가 놀라지 아니하게 그 아버지의 참변을 이야기 해주며, 또 학희를 빼앗긴지라 더욱 맹렬히 덤벼들 광옥이 일파를 소탕 시킬까 가 역시 큰 두통거리다.

이튿날 아홉시쯤 잠이 깨어 막 응접실로 나오는데 생각지 아니한 전화가 왔다.

2

"백선생이시군?"

하는 전화 소리가 벌써 서광옥이다.

"…… 아 참 마담! 요전날은 너무 폐를 끼쳐서…… 올 때 인사나 하고 올렸더니 계시잖드군요. 그래 벽에다 멫 자 적어놓고 왔지요."

영호는 아주 의젓하게 대답을 하였다. ── 또 반갑기도 하였다.

"아니 요 깍정아! 거 무슨 짓이야?…… 그러고 대학병원에다가 둔 줄은 어떻게 알고 고년을 훔쳐갔어?"

"그거! 뭐 별것 없지요…… 광식이가 대학병원에서 나오는 것을 내 염탐꾼이 보았고. ── 그 덕에 그 친구가 한대 얻어맞기는 했지만 ── 그리고 그날 밤에 당신네 남매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그래서 옳거니 생각 했지. 허허허허."

"저걸 어떻게 해 글쎄…… …… 여보 인제는 그애도 데려가고 했으니 그럼 그 암호문서나 우리 주고 그만 손을 끊구려."

"그건 안될 말."

"?"

"동소문 밖 살인사건만 없었더래도 당신네 전부를 용서해서 그만하고 상해 로든지 물러가게 하겠지만 지금은 그 사건 때문에 애매한 학희한테 경찰의 주목이 집중되지 아니했소?"

 

"그렇지."

"그러니까 당신 하나는 용서해서 상해로 피신하게는 해주겠지만 당신 오 랍 동생 광식이하고 또 부하들은 모다 불가불 붙잡어야 하겠소."

"나만은 용서해? ?"

"그거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러는 것이지."

"호호호호…… 그래 내 눈에 녹아나지 않는 사내가 있을 리 없지…… 그러나저러나 간에 여보 도령님, 인제는 용서 없으니 그리 알고 잘 생각 해요…… 이번에는 정말 용서 아니할 테야."

"! 붙잡어다가 결박을 지어놓고도 손을 못 대었으면서 또 그런 흰 소리를 하오?"

", 두고 바요."

전화는 그만하고 그치었다.

영호는 지하실에서 올라온 학희를 아래층에 내려보내지 아니하고 응접실에서 밥을 올려다가 먹게 하였다. 혹시 신문을 볼까봐 그리하는 것이다.

학희는 생각하던 것보다는 몸이 그다지 쇠약하지는 아니하였다. 안심이 그에게 원기를 준 것이다.

학희는 식사를 하면서 영호에게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었다.

영호는 동소문 밖에서 영감님도 김서방과 한가지로 살아나온 양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학희는 영호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더우기 안심을 하였다. 그는 자주 감사와 신뢰하는 시선을 영호에게 보내었다.

그러나 그뿐이다. 감사하고 신뢰하는 것 그것 외에는 아무런 것도 더는 보여주지 아니하였다.

오라버니나 아버지에게 대하여 신뢰하고 감사하여 하는 그러한 단순한 학 희의 태도에 영호는 적지 아니하게 마음 한구석이 섭섭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러한 내색을 보일 수도 없는 일이다.

다만 아메리카에서 자란 만큼 남녀의 교제에 익어 담담한 때문이니 인제 장차에…… 하는 것으로 위로를 삼았다.

학희가 밥을 먹는 동안에 아래층에서 올라온 향초와 김서방은 둘이 다 이상한 생각을 품었으나 자기네의 깊이 생각할 바가 아닌지라 김서방은 다만 기쁘고 다만 슬픈 마음에 어릿어릿하기만 하고 향초는 이것저것 찬도 권하고 밥도 더 권하고 하였다.

향초는 주인 영호가 이와같이 애인을 구해내어 반가이 그리고 정답게( 그는 정답게 지내느니라고 생각하였다.) 지내는 것을 보니 허철의 생각이 불현듯 이 일어났다.

더구나 요전에 상준이가 다녀와서 시골로 가고 없더라고 한 말을 듣고는 더욱 마음이 조민하고 쓸쓸하였다.

그리하여 그 소식이라도 물어볼까 하는데, 영호는 학희와 이야기에 세 마리가 팔리어 자기에게는 주의도 아니한다.

"그런데 대체 시카고에 가서 자라신 모양인데, 어떻게 그렇게 조선말을 아니 잊으셨습니까?"

영호에게는 그것이 궁금도 하지만 그것으로써 상해 이후의 그들 부녀의 지나 온 사정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 어찌하여 그 하늘에 사무치는 복수를 지금까지 미루어 왔는가?

3

그러나 그것은 영호가 생각하던 것보다는 이유가 단순하였다.

학희는 자기의 기억에 남는 것과 그 뒤 그 아버지에게서 들은 말을 종합 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상해의 어느 날 밤.

학희의 아버지가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게다가 왼편 엄지손가락까지 잃어버리고 돌아온 그때의 광경은 그때 학희의 나이 비록 네 살밖에 아니 되었었지만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잊히지 아니하고 그 장면이 선연히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뒤에 이재석은 몸에 피스톨을 품고 원수를 찾아 상해에서 일 년이나 헤매었다.

그러나 원수는 만나지 못하고 준비하여 가지고 간 돈이 다 없어졌다.

돈이 없으면 백사장 같은 상해 바닥에서 어찌하는 도리가 없다.

다시 한번 한을 머금고 원수 갚기를 후일로 미룬 뒤에 그들은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십 년을 지내는 동안에 학희는 그곳 조선 사람의 학교에 다니며 자랐다. 그 아버지는 근근자기하여 돈을 모았다.

속에는 무서운 원수 갚을 칼을 품었지만, 그러나 일상생활은 온순한 신사요, 더구나 크리스찬인지라 오래잖아 그에게 대한 지방의 신임이 두터워졌다. 그것을 발디딤삼아 약간의 재산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으로 나오기 전 이태 동안은 본토인 시카고로 건너가서 거기서 돈 이 부쩍 늘었다.

 

이만하면 하는 생각으로 그들 부녀는 상해로 돌아왔다.

몇 달 동안 두류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그러면 이미 조선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조선으로 나온 것이 일 년 전의 일이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와 서울을 중심으로 일 년 동안이나 각처로 돌아다니며 찾았으나 원수는 만나지 못하였다.

할 수 없이 다시 서울로 돌아온 것이 거진 한 달 전의 일이다.

"그러면……"

하고 학희의 이야기가 끝난 뒤에 영호가 물었다.

"제일여관에서 아버지께서 무슨 편지를 받어가지고 박박 찢으면서 적반하장이라고 하신 그 편지는 뉘게서 온 것입니까?"

"그게 유대설이가 협박을 한 거래요…… 웬 아이를 시켜서 어떤 사람이 주더라고 보냈더라나요."

"무어라고 협박을 해요?"

"암호문서 한 토막을 보내라고."

"어데로 보내라고?"

"광화문우편국 구지(?) 국지가 무엇인지 국지(局止)로 보내라고…… ""그래 어쨌어요?"

"그건 안 보내고 메칠 후에 그냥 편지에다, 너 인제 내 손에 걸리면 죽인다고 써보내섰지요…… 그러고 저는 우편국에 가서 지키라고 그러시길래 가서 지키니까 와서 편지를 찾어가지고 가드구만요. 그때 뒤를 따라가서 집을 알었지요."

영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러고는 그가 있는 방 모양으로 꾸미느라고 커텐 귀를 몰래 잘러가지고 × 상회에 가 끊고 하섰군요?…… 실상 소용도 되잖은 것을…… "학 희도 웃고 영호도 웃었다.

영호는 학희를 다시 지하실로 내려보내고 향초와 김서방도 아래층으로 내려 보낸 뒤에 인천 월미도호텔로 시외전화를 걸었다.

허철은 영호의 목소리를 듣고 무척 반가와하였다.

허준의 병은 그날 밤 그렇게 무리를 하였으나 별로 도지지도 아니하고 되레 차츰 나아가는 편이라고 하고 그러고 어서 바삐 서울로 돌아가서 향초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영호는 그동안 보지 못한 신문을 걷어 모아다가 순서대로 사회면을 훑어 보았다.

그러나 사건이 미해결인 채 있으므로 경찰을 공격하는 필치로 썼을 뿐 아 무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아니하였다. 역시 경찰은 한사코 ' 양장한 젊은 여자와 그 의 동행인 '젊은 사나이를 찾는 눈치인 것이 분명하였다.

 

이날 밤.

다른 때보다도 각별히 더 주의를 했어야 할 것이거늘 무슨 실수인지 영호의 집 현관문은 빗장도 걸리지 아니한 채 열리어 있었다.

자정때부터 검은 그림자가 그 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하였다.

4

저녁 후에 영호는 지하실 S호 방에서 학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별로 이렇다 할 이야기거리가 준비되었던 것은 아니나 기회와 눈치를 보아 될 수 있으면 학희가 놀라지 아니하도록 그 부친의 불행을 이야기해 주려하는 것이다.

"그날 밤에 참."

하고 학희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묻는다.

"그 집에 제 모자가 떨어졌지요?"

"."

영호는 지금도 자기의 품 속에 있는 그 조그마한 모자를 생각하면 조금 얼굴이 닳았다.

"거 그대로 버려두섰어요?"

"제가 거두어 왔읍니다."

"…… 그거 머 하찮은 것이지만…… 제 짐 참긴 데는 없는데요?"

"네 미처 갖다 두지 못 해서…… "설마하니 체모 없이 품속에서 꺼내 놀 수는 없고 그냥 어물어물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웬일이실까?…… 메칠이나 되면 오신다고 그리셨어요?"

학희는 새로이 궁금한 듯이 묻는 것이다.

"글쎄 아마 한 일 주일 되겠다고 그리 섰는데…… ""아이고! 일주일…… 어떻게 기다려! 내일이라도 오섰으면 좋겠구만…… 퍽 반가워하실 텐데…… 그새 아버지 퍽 걱정으로 지내섰지요?"

"…… 그런데 저렇게 다 자라신 이가 아버지를 꼭 젖먹는 애기가 어머니를 찾듯 하십니까?"

"그럼요!…… 저는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가 어머니 노릇까지 하시면서 길 러주 섰는데…… ""아버지가 영 아니 오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영호는 속이 있어 묻는 말이건만 학희는 다만 웃는 말로 알아듣는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눈을 크기 뜨고 엄살을 하듯이.──

"아이고! 아니 오시면 어쩌라고요?…… 큰일나게?"

"어째 큰일이 나요?"

"보고 싶어서."

이래서는 정말 큰일이 나겠다고 영호는 속으로 근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아직 말해 주기를 단념하고 딴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다가 열한시가 지나서 자기 침실로 올라왔다.

품에 품었던 학희의 모자를 꺼내어 머리맡의 테이블 위에 놓고 그는 침실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자정때부터 이 집 문앞을 감돌던 검은 그림자는 한 시간 동안이나 동정을 살피며 앞뒤로 감돌았다.

새로 한시쯤 되어서 검은 그림자는 가만히 현관문을 밀쳐보았다.

딱 맞히는 반응 대신 문이 슬며시 열리는 것이다. 의외의 결과에 검은 그림자는 잠깐 주저하다가 그대로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들여다보이는 방 ── 상준이의 방에서 코고는 소리가 드르렁 드르렁 들려온다.

검은 그림자는 사풋 올라서서 발짝 소리도 없이 이 방 저 방 문을 열고 휘휘 둘러본다.

식당 방문을 열고는 한참이나 향초의 얼굴을 보다가 픽 웃고는 도로 문을 닫았다.

더 방이 없나 하고 회중전등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한 다.

이층으로 올라서서 아래층의 코고는 소리도 막히고 교교하니 바스락 소리조차 없다.

그는 실험실 문의 도어 손잡이를 틀어보다가 이편 응접실 문을 살며시 열고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무도 없음을 보고 방으로 들어서서 다시 한번 휘 둘러보았다.

그는 영호의 침실 도어의 손잡이를 틀었다.

문이 소리없이 열린다. 영호는 이 문조차 잠그기를 잊어버렸던지!

검은 그림자는 문이 잠기지 아니한 것이 의외로운 듯이 아까 현관에서처럼 잠깐 주저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침실 도어를 환히 열고 문턱에 섰다.

 

그런데 이건 또 웬일! 그새까지는 영호의 침대는 이편 응접실편 벽앞에 있어가지고 도어를 열면 도어에 가리어 보이지 아니하였는데 언제 옮겼는지 저편 벽 앞에 침대가 놓여 있고 그 위에서 영호는 평화로이 잠을 자고 있는것이 아닌가?

영호의 침대를 향하고 한 걸음 내디디는 검은 그림자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쥐어져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사풋사풋 검은 그림자는 고요히 육박하여 마지막의 한 걸음을 내어디디며 전신의 힘을 다 주어 칼을 쥔 바른편 팔을 내리질렀다.

5

퍽 하고 칼끝이 살을 뚫는 소리 대신 쨍그랑하는 쇳소리와 아울러 검은 그림자는 그 앞에 푹 거꾸러졌다.

그러자 이편에서 허허허허 하고 웃는 너털웃음 소리가 들린다.

"이 사람 거울 속의 그림자를 찔르러 드는 자객도 세상에 있단 말인가?"

그렇다. 자객은 거울 속에 비친 영호의 침대로 향하여 겨냥을 대었던 것이다.

영호의 침대는 역시 위치를 변치 아니하고 이편 응접실 쪽으로 있었던 것이다. 저편 벽에 붙여둔 큰 체경에 가리어 둔 커튼을 반만 걷어놓으면 도어에서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그곳에 침대와 사람이 있는 줄 알게 되었다.

자객 자신이 거울에 비치지 아니하느냐고?

그거야 커텐을 반만 걷어놓았으니까 이편에서 들어가는 사람은 비치지 아니 한다. 자객은 부러진 칼자루를 쥐고 벌떡 일어섰다.

그는 거울 속과 이편 진짬의 영호를 한번 별러보고는 속아서 실패한 안타까 움에 이를 부드득하였다. 그의 눈은 막다른 골목에 몰려들어간 야수와 같이 무섭게 번쩍거렸다.

와락 영호에게로 덤벼들려던 자객은 또다시 멈춰섰다. 영호의 손에는 일전 × 별장에서 빼앗은 소음 피스톨이 쥐어져 있는 것이다.

"허허허허…… 여보게 광식군."

하고 영호는 저편의 심장을 똑바로 겨냥한 채 이렇게 재미있게 웃으며 불렀다.

그는 과연 서광식이다. 학생복도 그대로요 사방모자는 체경 앞에 떨어져있다.

"내 자네를 기다린지 오랠세…… 어찌 자네의 왕림이 이다지 더딘가? 허 허허 허. 언젠가 전화로 내가 약속했지?…… 내가 자네 앞에 이렇게 웃어줄테라고…… "광식은 말이 없이 식식거릴 따름이다.

영호는 벨을 눌렀다.

상준의 방에서 자던 사람들이 놀라 우당퉁거리며 뛰어올라왔다. 맨먼저 올라온 것이 상준이다.

"상준이 너는 내려가서 현관문을 잠거라. 그리고 김서방을 올려보내라."

그러나 김서방은 벌써 올라왔다. 오복이도 올라오고 향초도 뛰어올라왔다.

향초는 광식을 보고 더구나 놀랐다. 영호를 죽이라고 독약을 주며 꾀던 그 인물인 줄 대번 알아본 것이다.

영호의 명령으로 김서방이 동바를 가지고 와서 든든히 결박을 지웠다. 결박을 지우는 김서방은 이를 부드득부드득 갈았다. 원수를 눈앞에 잡아 놓은 쾌감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김서방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가씨? 아가씨 어디 가셨어요?"

김서방은 휘휘 눈을 내두르다가 영호에게 시선을 멈추고 묻는 것이다. 영호는 웃으면서 일어섰다.

향초도 한가지로 의심이 나는 모양이다.

영호는 두툼한 수건으로 광식의 눈을 가리어 위아래층으로 끌고 다니다가 도로 침실로 돌아왔다.

그는 비로소 여러 사람 앞에서 지하실의 비밀을 공개하였다.

그들은 숨소리도 없이 보고만 있다가 광식을 끌고 내려가는 영호의 뒤를 따라 섰다.

지하실로 내려간 영호는 '1’호방을 열고 전등을 켠 뒤에 광식의 눈 가린것을 풀어 놓았다.

내부는 감방과 다름이 없다. 감방과 다른 것은 침대가 있는 것과 또 벽에 굵다란 쇠사슬의 한끝이 박혀 있는 것이다.

영호는 그 쇠사슬의 이편 한끝을 광식의 허리에 채우고는 결박을 풀어주었다. 쇠사슬의 길이가 닿는 곳까지에는 자유로 몸에 가질 수가 있게 되었다.

광식은 저항하여도 소용없음을 각오하였는지 침대 끝으로 걸어가서 팔짱을 끼고 입을 꽉 다물고 그리고 눈을 감았다.

"광식군, 오늘은 편히 쉬게. 나는 찾어온 손님을 자네네처럼 결박을 지워서 재우든 아니하네."

이렇게 이르고 여러 사람을 데리고 그 방을 나왔다. 겉으로 빗장을 걸고 다시 자물쇠를 잠갔다. 이만하면 장발장이라도 탈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안심이 아니 되는지 영호는 김서방에게 피스톨을 주어 그 옆방인 '2'호실에서 거처하게 하였다.

"저 방에…… "하고 영호는 'S'호실을 가리키며 김서방더러 일렀다.

"자네 아씨가 계시니까 만약이라도 무슨 일이 있거든 그냥 대고 쏘아 응."

김서방은 겨우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結 末[ 결말] 이튿날 아침 일찍부터 영호는 붙잡아 둔 광식을 여러 가지로 족쳤으나 그는 종시 입을 봉하고 어떠한 말을 묻든지 대답을 하지 아니하였다.

붙잡았던 영호를 놓쳐버리고 학희를 빼앗기고 게다가 가장 힘입을 수 있는 광식이를 이편에 붙잡히었으니 인제 광옥이는 최후의 발악으로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것이다.

저편에서 그와 같이 적극적으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이편에서 발등을 밟고 나서서 견제를 해야 할 것이매, 그리하자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본거( 本據) 를 알아내어 가지고 습격을 하는 것이 상지상책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을 알아내려고 몇 차례나 지하실에 내려가 꾀어도 보고 위협도 해보고 하였으나 아무 소득도 없이 날이 저물었다.

이날 석간신문에는 의외 사실이 보도되었다.

즉 애초에 사건의 발단인 손가락 소포에 쓰인 서광옥은 이번 동소문 밖에서 살해된 이재석이의 안해요, 유대설은 서광옥과 공모하여 이재석이의 재산을 횡령해 가지고 상해로 같이 달아났던 궐녀의 정부( 情夫) 였었다는것…… 그리하여 그 사실로 미루어 이번 동소문 살인사건은 복수를 하려는 이재석이 대() 서광옥이 사이에 생긴 갈등의 결과인 듯하다는 것…… 동시에 최근 상해로부터 돌아온 형적이 있는 서광옥의 뒤를 염탐중이라는 것들이다.

이렇게 되었으면 경찰의 수사도 웬만큼 사실의 중심에 접근한 것이니, 인제 영호 자기는 사건에서 손을 끊어버릴까? 그러나 저 지하실에 붙잡아 둔 광식 이의 처치가 적지 아니한 문제다.

경찰서로 보낼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한평생 붙잡아 둘 수도 없는 일, 또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놓아주면 후환이 있을 것…… 그리하여 처단을 못하고 있는 중에 마침 뜻하지 아니한 손님이 찾아왔다.

 

광옥이에게 붙잡혔다가 그곳을 벗어져 나오던 날 밤 영호를 수직하던 파 수병이다.

이층 응접실에서 영호와 조용히 단둘이 앉아서도 그는 서먹서먹하며 늘 앞뒤를 살피던 끝에 "나리 사람 살려줍시요."

하고 그는 맨처음 이렇게 말을 꺼내었다.

영호는 그 말의 뜻을 알아채었다. 그날 밤 광옥이가 가면서 만일 포로를 놓치면 죽인다고 하였다. 그런데 필경 놓치었다.

그러니까 이자가 아마 모진 형벌을 받다가 달아나온 것인 듯하였다.

"? 어떻게 하는 말이야?"

"죽을 뻔하다가 겨우 벗어져 나왔읍니다…… 이것 보십시요. 또 이 거랑…… "그는 팔목에 아직도 남아 있는 묶였던 자죽과 발목을 걷어 보이는 것이다.

"그래 이렇게 피해 나왔으면 그만이지 날더러 어쩌란 말이야?"

"천만에요! 지금 위선 피해 오기만 했지, 인제 또 붙잽힙니다. 붙 잽히는 날이면 그때는 영영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바립니다."

"그렇거든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하지?"

"그럴 생각도 있었지만 죄가 좀 경해지기는 하더래도 그래도 벌을 받기는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벌이 무서우면서 왜 참례는 했나?"

"그거야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알었읍니까?…… 그러고 첨에는 그런 괴악한 짓을 하는 줄은 몰랐지요!"

"대관절 지금 소굴은 어데로 옮겼나?"

"옥인동 ×별장으로 도루 갔읍니다…… 지금 모다 모여서 오늘 저녁에 할 일을 상의하고 있읍니다…… 지금쯤 가시면 모조리 잡으실걸요."

이 끝엣 말이 영호의 귀에는 몹시 이상하게 들리었다.

그는 일어서서 왔다갔다 하며 잠시 궁리를 하였다.

조금 뒤에 오복이와 상준이를 불러올려 피해온 파수병을 잔뜩 결박을 지었다. 파수병은 웬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 가지고 어쩔 줄을 모른다. 영호는 다시 지하실로 내려가서 피스톨을 가져다가 오복이의 손에 들려주고 시계를 가리키며 엄하게 명령을 하였다.

", 내가 간지 사십 분 안에 무슨 기별이 없거든 그 사람을 두말 말고 쏘아 죽여…… 지금 × 별장에 저의 일파가 있으니까 가서 잡으라는 것인데, 이 사람이 지금 와서 한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무사할 것이고 그렇잖으 면 무슨 흉계가 있어서 내가 되려 붙잡힐 것이니까…… 응 사십분이 되거든 두 말 말고 쏘아 죽여."

이렇게 이르고 영호는 무서운 눈으로 파수병을 흘겨본 뒤에 밖으로 나가려하였다.

2

영호의 하는 말을 듣고 안공(眼孔)이 점점 더 크게 벌어지던 파수병은 묶인 채 벌떡 일어나 영호가 나가려는 앞을 막고 펄씬 주저앉는다.

"나리님, 그저 살려줍시오. 죽을 때라 환장이 되야서 그렇습니다…… 제발 가지 마십시요…… "그는 허리를 몇번이고 굽히며 개개 빌고 있다.

영호는 속으로 옳다 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겉으로는 여전히 냉혹하게 "그러면 사실대로 말을 다해 봐…… 내가 번연히 아는 일이니까. 일분이라도 속이면 당장 용서를 아니할 테니까."

"네 그저 이번이야 속일 리가 있겠읍니까."

하고 그는 정말로 사실 이야기를 다 아뢰어 바쳤다.

그들은 고육계(苦肉計)를 썼다.

그날 밤 영호를 놓쳐보낸 데 대해서 광옥이는 사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파수병은 그다지 크게 벌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특별히 용서하는 눈치를 보여가지고 그로 하여금 감복하게만 만들어 두었다.

그런 뒤에 일이 모두 이렇게 궁하게 되매 이번 계책을 낸 것이다.

즉 파수병의 손목과 발목을 묶어 묶인 흔적을 남기었다.

그래가지고 다시 탈주해나간 것처럼 영호에게까지 와서 살려달라고 매어 달리게 하였다.

그러면 영호는 그의 입으로부터 근거지가 어디 있는지 알아가지고 습격을 올 것이다.

×별장이 좋다. 속을 텅 비워두고 뒤 솔숲에 복병을 시켰다가 영호의 일파가 지하실로 들어가면 등 뒤로부터 엄습하여 독 안에 든 쥐 잡듯이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선 영호를 붙잡아놓고 다시 밤 들기를 기다려 영호의 집을 습격 하면 광식이와 학희를 도로 빼앗아 올 것은 물론이요, 암호문서도 뒤져 올 수가 있을 것이다.

 

"틀림없는가?"

영호는 파수병의 진짜 자백이라는 것을 듣고 다시 다지어 물었다.

", 그저 이실직고했읍니다."

"서광옥이 있는 집은?"

"그건 저도 모르고 오늘 저녁에 지금 ×별장에 와서 있읍니다."

"서광옥이도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나?"

"지하실 속에 있읍니다."

"복병은 도통 멫명?"

"명칠이까지 이제 와서 네 명입니다."

영호는 즉시 준비를 시작하였다.

우선 지하실에서 광식을 결박을 지워 올려다가 파수병과 한가지로 클로로포름으로 마취를 시키었다.

영호는 광식의 학생복을 벗겨 입고 사방모자까지 푹 눌러 썼다.

목소리도 그럴 듯하게 흉내를 내었다. 얼굴은 어두운 밤이니까 변장을 아니 해도 좋다.

다시 파수병의 옷을 벗기어 김서방에게 입히었다.

영호는 지하실에 둔 유대설의 짐 속에 들어 있던 예금통장과 도장과 그리고 현금 오백 원까지 꺼내어 포켓 속에 집어넣었다.

그리하는 동안에 김서방과 오복이는 마취되어 떨어진 광식이와 파 수병을 자동차에 떠메어다 쿠션에 앉히었다. 결박한 것을 가리느라고 외투를 가져다가 앞을 덮었다.

밖에서는 자세히 보이지도 않지만 취한 손님이 자동차 안에서 조는 것으로밖에는 더 보이지 아니하게 되었다.

상준이에게 집을 지키도록 주의시켜 맡기고 영호는 오복이와 김서방을 데리고 자동차에 올랐다.

옥인동 ×별장에 이르러 들어가는 언덕배기에 차를 멈추고 우선 영호와 김 서방만이 별장으로 향하여 올라갔다.

오복이는 자동차와 마취된 두 명의 포로를 지키었다.

영호와 김서방은 별장을 왼편으로 돌아 지하실 내려가는 층계에 이르렀다.

잠깐 어릿어릿하다가 영호가 광식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이 리들 나오게."

하고 불렀다. 그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솔숲에 검은 그림자가 쑥쑥 비어져 이편으로 왔다.

"웬일이야?!"

 

그들은 모두 이렇게 묻는 것을 손을 저어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오래잖어 백가가 여기를 올 테니 이 방에 들어가 꼼짝 말고 기다리게."

영호는 바깥에 쇠빗장이 있는 방 하나를 회중전등으로 비춰 보였다. 그들은 두말 아니하고 그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전에 영호가 촛도막과 머리털을 발견하던 방문이 열리며 광옥이의 희미한 얼굴이 촛불에 비치어 나온다.

3

영호는 복병들을 꾀어 들여보낸 방을 겉으로 빗장을 걸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누나요?"

물었다.

"아이고 이애야. 이게 웬일이냐!"

하고 광옥은 반기어 뛰어나온다. 영호는 ", 가만 있어요."

이렇게 제지를 하여 놓고 김서방더러 소곤소곤 일렀다.

"자네는 나가서 오복이하고 그 두사람을 하나씩 업어다가 이 다음 방에 집어넣고 결박을 푼 뒤에 빗장을 든든히 걸어놓게…… 그리고 오복이는 자동차에서 기다리고 자네는 지하실 문 밖에서 기다리게…… "김 서방은 회중전등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영호는 광옥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들어가며 문을 닫기를 잊었다.

방에 들어가서 비로소 광옥이는 영호를 알아보고 사뭇 놀랐다.

그는 무의식중에 아이구머니 소리를 치고 뒤로 물러섰다. 일이 또 실패 된것을 깨달은 것이다.

영호는 허허허허 하고 한바탕 유쾌하게 웃었다.

그는 방안을 휙 둘러보았다. 전처럼 가마니쪽이 깔리고 그 위에 보료가 깔리었다.

불은 촛불이다.

보료 한편 머리에는 새까만 피스톨이 한 개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위스키 병과 잔이 놓여 있다.

광옥은 연해 피스톨에 주의가 갔으나 영호도 그 눈치를 채고 여유를 주지 아니하였다.

광옥이는 놀란 것을 곧 수습하여 가지고 한번 싸늘하게 웃으며 보료에 앉았다.

"내가 또 한번 졌다!"

그는 혼잣말같이 하고 영호를 바라본다.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적의 앞에 있는 것이라는 눈치는 조금도 보이지 아니하고 태연자약하다.

영호도 그의 앞 가마니쪽 위에 발을 개고 앉았다.

"이번은 져도 크게 졌소…… 아마 다시 힘을 못쓸걸?…… 지금 당신 부하들은 모다 저 방에 가두었지…… 또 어젯밤에 자객으로 왔든 광식이하고 오늘 밤에 고육계를 가지고 왔든 황개(黃蓋)는 마취가 되어서 지금 업어다가 역시 감금을 시켰지…… 인제는 남은 사람이라고는 패전지장 당신 하나뿐인데 그나마 오늘 저녁 석간 보았지요? 당신한테 인제는 완전히 혐의가 돌아간 것을 알지요?"

"! 경찰서의 혐의나 수사쯤이야…… "광옥은 여전히 태연하게 담배를 피워 문다.

"그렇게 내내 흰소리를 하지 말고…… …… "하고 영호는 가지고 온 유대설의 예금통장과 도장까지 돈 아울러 그 앞에 내놓았다.

"이걸 가지고 오늘 밤차로 상해로 떠날려오? 그렇잖고 감옥으로 갈려우?"

광옥이는 웃으면서 고개를 쌀쌀 내어두르다가 갑자기 덥석 달려들어 영호의 목을 그러안고 볼을 비빈다. 영호는 조용히 그를 떼어 앉혔다. 광옥이의 눈에는 아렴풋이 눈물이 솟았다. 그러나 그는 역시 웃고 있었다.

"서광옥이가 그까짓 만 원도 못되는 돈을 가지고 패군해 달어날 년이 아닌 줄 알지…… 적어도 멫십만 원 집어삼키려고 왔다가 그걸 가지고 상해로 돌아간다면 위선 당신부터 웃을 거요…… ""천만에! 그거야 내가 자진해서 이렇게 피신을 시킬려고 드는 건데 웃기는 왜 웃겠소?"

이때에 복도에서 쿵쿵거리는 발짝 소리가 들리었다.

오복이와 김서방이 마취된 두 포로를 업고 온 모양이다.

광옥이는 인제는 그런 것은 다 모른다는 듯이 무관심하게 듣고 있다.

그는 조금 피우던 담배를 영호에게 내어준다. 영호는 받아 물었다.

"하여간 반갑소……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은 실상 몰랐어."

이렇게 말하는 광옥이의 얼굴에는 독기도 없고 살기도 없고 그저 평온하였 다. 굳이 있는 것을 찾는다면 가볍게 떠도는 한 줄기의 적적한 그림 자라고나 할는지.

"우리 처음 겸 마지막 겸 술이나 한잔 먹읍시다."

하고 광옥은 위스키와 잔을 집어다가 한잔 그득 부어 영호를 준다. 영호는 겁하지 않고 그대로 죽 들이켰다.

4

주는 위스키를 서슴잖고 받아 들이켜는 영호를 말끄러미 치어다보고 있던 광옥이는 다가와서 그의 등을 톡톡 치며 "제법이야? 사내가 담보가 그만이나 해야지…… 내가 잘 알어 보았어…… 자 나 한잔 부어주."

하고 잔과 병을 바꾼다.

영호는 청하는 대로 부어주었다. 광옥은 죽 들이켜고 나서 이번에는 한잔을 부어 옆에 내려놓는다.

"어째서 이런 쌈판에서 만났어! ? 여보 그렇잖소? 이것도 인연은 인연인가 본데 인연 치고는 섭섭한 인연이야…… 그렇지?"

"인제 그런 소리 해야 소용이 무어요? 잔말 말고 어서 이 통장하고 돈을 간수해 가지고 일어서요…… 열시 반 차면 아직 멫 시간 남었으니까. 그동안은 내가 감시를 해야겠으니 우리 집에 가서 있다가 상해로 바로 떠나시요."

영호는 사실 마음이 괴로웠다. 이 괴로와하는 자기의 마음이 불쾌하고 미웠으나 이성(理性)의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광옥은 여전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만두어요…… 나도 다 생각이 있소."

"생각이 있을 게 어데 있단 말이요. 이거나마 가지고 상해로 가든지 그렇잖으면 저 고운 얼골을 철창에서 늙히든지 그것밖에 더 있소?"

"호호호호! 내가 곱다고 당신 입으로 했겠다?…… 그래 내가 아직 고와 요…… 아직도 십 년은 자신이 있어…… 그 십 년을 재미있게 지내자면 돈이 있어야 하겠는데 요것 멫천 원! 일 년 용돈도 안돼요."

"욕심은 꿀돼지다!…… 그럼 내가 십만 원 주리까?"

영호는 자기의 전재산이라도 털어서 주고 싶은 충동이 무럭무럭 일어났다.

"호호! 당신 재산이 통 얼마나 되오?"

"한 십만 원 되지."

 

"그걸 톡톡 털어서 나를 주면 당신은?"

"나야 젊은 사내가 또 모으면 그만 이지…… "광옥은 영호의 얼굴을 말끄러미 치어다본다.

"고맙소…… 그렇지만 나는 남이 주는 돈은 쓸 맛이 없어. 항차 당신을 한 푼 없는 거지를 만들어놓고 내가 그 돈을 가지고 가서야 되겠소? 혹시 ── 혹시 말이야 ── 당신이 나하고 같이 상해로 간다면 그건 모르지만…… "영호는 대답이 없이 광옥이를 쳐다보았다.

"거봐요…… 아직 당신은 그런 모험은 못해요…… , 그야말로 쓸데없는 이야기니 그만두고…… 술이나 한잔씩 더 먹고 이야기 끝을 막읍시다."

광옥은 부어놓은 잔을 마시고 영호를 부어준다.

", 내가 이야기 끝을 막으께 들어보시요…… 첫째 내 오랍동생이나 또 수하에 부리던 사람은 모조리 붙들려 보내고 나 혼자 달아난다는 것이 안될말…… 달어난대도 돈이 없으니 소용없는 일…… 그렇다고 나도 같이 감옥으로 가자니 가서 지낼 일이 답답하고…… 그러고 그런 것은 되려 괜찮다지만 내가 당신을 만난 뒤로 맘이 와락 변해바렸소…… 웃지 말어요 정말이야…… 그냥 맘이 둥둥 뜨고 세상이 희퍼요…… 살어갈 흥이 떨어져 바렸어…… 그러니 당신 시킨 대로 내 자살을 하리다."

영호는 대답할 말이 없다. 그것이 가장 현명한 수단이요 권하고 싶었던 것이나 광옥이의 입으로부터 그 결심을 들으니 그냥 울고 싶었다.

"내가 죽거든 무덤에 가끔 꽃이나 놓아주…… 그러고 당신 생전은 잊지말어요."

이렇게 부탁하면서 광옥은 영호의 목을 걸싸안고 입술을 찾는다. 영호는 그대로 하는 대로 내맡겼다. 한동안 더운 숨을 쉬다가 광옥은 영호에게서 떨어져 앉더니 위스키잔에다 괴춤에서 꺼낸 하얀 가루약을 털어넣고 거기다 술을 부었다.

그는 잠깐 다시 영호를 바라보다가 쭉 들이켰다. 영호는 술잔을 탁 차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제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었다.

독약을 마시고 난 광옥은 영호를 한 일 분 동안이나 끄윽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친 듯이 몸을 날리어 피스톨을 집어 들고 날카롭게 외친다.

"싫여! 싫여! 혼자는 안 죽어…… 같이 죽어 같이."

영호는 피스톨의 겨냥을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그대로 박힌 듯이 앉아 있다.

탕 탕 탕. 세 방 총소리가 지하실에 울리어 웬만한 대포 소리만큼이나 크 게 울리었다.

5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뛰어들어온 김서방을 보고 영호는 겨우 정신이 들었다.

그는 차라리 광옥이가 쏘는 피스톨에 맞아 같이 그 자리에 엎드러져 죽고싶었던 것이다.

…… 사람을 죽였다든가 도적질을 하였다거나 그 밖에 도덕적으로 죄를 졌다거나 하는 그러한 무엇보다도 더 무겁고 큰 해물을 쓰는 듯이 그의 가슴은 괴로왔던 것이다. 그리고 슬펐다.

피스톨의 맨 처음 것은 영호의 편왼 팔을 안쪽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벌써 검정 양복 위로 피가 스며올라 가마니 편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 다음 두 방은 훨씬 겨냥이 왼편으로 빗나갔다.

광옥이는 첫방을 쏠 때에 벌써 약기운이 몸에 배어 힘이 빠졌던 것이다.

피스톨을 쥔 채 넘어진 그는 한편 몸을 뒤틀어 경련을 하고는 그대로 절명이 되었다.

"큰일났읍니다…… 총소리가 저 밖에까지 대포 소리같이 들렸어요."

김서방이 이렇게 주의할 때에 영호는 비로소 고개를 돌리었다. 그는 두번째 실신한 사람처럼 숨이 진 광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김서방을 먼저 내어보낸 뒤에 영호는 다 못 감은 광옥의 두 눈을 고요히 쓰다듬어 주고는 그 방을 나왔다.

가슴이 답답한 것이 무어라고 소리라도 한번 외쳐보았으면 시원할 것 같았다.

셋이서 자동차를 몰아오노라니까 ×별장을 향하여 순사 둘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순사들에게는 아무 의심도 받지 아니하였다. 피스톨 소리에 순사가 가게 된 것을 영호는 도리어 다행으로 여겼다.

한 달이 지나갔다.

그동안 서광옥 사건의 증인으로 영호와 오복이와 학희와 김서방은 줄곧 경찰서로 검사국으로 불리어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설의 손가락 일건에 대하여는 영호의 코치로 전부 죽은 재석 노인에게 밀어버렸기 때문에 아무런 계루도 입지 아니하였다.

그와 같이 무사하게 된 뒤의 어느 날 가매장(假埋葬)을 한 재석 노인을 홍제원에서 장례지내고 돌아왔을 때다.

 

영호는 광옥이가 죽던 날 밤 가슴에 받은 상처도 저으기 가라앉았다. 그 의 마음은 애초에 쏠렸던 대로 학희에게 가속도적으로 쏠려갔다. 광옥이가 박아놓고 간 못은 그대로 가슴에 박혀버렸지만.──

그러나 학희는 웬일인지 몹시 냉담하였다.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고 그만큼 자기네에게 고맙게 구는 데 대해서는 끔 찍이 감사히 여기면서도, 그러나 손톱만큼도 색다른 눈치는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날도 학희는 새로운 설움을 겨우 진정한 끝에 그는 갑자기 "어데 셋집 하나 없을까요?"

하고 물었다. 옆에는 영호 외에 김서방밖에 없었다.

"셋집요…… 무엇하시게?"

영호는 이렇게 물을밖에.

"하나 얻어서 나가야지요…… 언제까지나 이렇게 신세를 져 서야…… "학 희는 그렇잖냐는 듯이 김서방을 돌아본다.

그때 마침 층계를 쿵쿵거리며 허철이가 향초의 손목을 잡고 뛰어올라왔다.

오늘 아침에 영호가 인천 월미도호텔로 전화를 걸어 해방을 시켜준 것이다.

그는 아직도 완쾌하지 못한 그의 아버지를 데리고 인천서 돌아왔다. 인천서 돌아와 집에 들르고 하는 사이 시간이 그에게는 무척도 지리했던 것이다.

"이 녀석아! 우리 향초를 그래 입때 네 집에다 숨겨두고 사람 애를 태워주면서 못 만나게 했어?"

그는 영호에게 대한 대번 인사가 이것이다.

"그건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것이고, 또 테스트도 좀 해보느라고 그랬네…… "영호는 몹시 수척한 허철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래 파스됐나?"

"."

향초와 허철이가 둘이서는 꼴이 보기 싫을 만큼 좋아한다.

그중에도 놀라는 것은 학희다. 그는 그때까지도 향초를 이 집의 주부로 만여 기 던 것이다.

그러고 끝으로 암호문서의 한쪽은 광옥이와 같이 영원히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는 것을 말하여 둔다.

학희와 영호가 어떻게 되었느냐?…….

그거야 굳이 알려고 할 것도 없다. 그래도 궁금하거든 경성부에 가서 호적 열람이나 할 것이다.

 

朝鮮日報[조선일보] 1934.5.16~11.5

 

 

300x250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