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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계절

권여선

 

 

<사슴벌레식 문답>

대학시절 갓 상경한 네 명의 여자들(부영, 경애, 정원, 준희)이 하숙집에서 친구가 된다. 준희의 시점에서 바라본 네 명의 여자들 이야기는 정원의 추모 모임으로 시작된다. 하숙 시절 이야기며, 30살 즈음의 춘천여행 이야기며 젊은 시절 청춘의 이야기로 그들의 우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원은 자살하게 되고, 부영과 경애는 학생운동을 하며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나 경애의 변절과 배신으로 절연하게 된다. 60살 즈음에 들어선 준희는 부영과 경애를 다시 보고 싶어하면서 그들 네 명의 30년 전 춘천여행을 추억으로만 기억한다.

 

어디로 들어와?

어디로든 들어와.

어디로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들어와 이렇게 갇혔어. 어디로든 나갈 수 없어. 어디로든

이런 식으로 표현된 사슴벌레식 문답이 여러 번 등장한다. 문학적 표현이어서 그런지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곱씹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표현들이다.

<실버들 천만사>

20대 딸 채운과 엄마 반희가 12일 여행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이혼 가정에서 겪었던 채운과 반희의 상처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엄마 반희는 <우리 모녀 사이에 수천수만 가닥의 실이 이어져 있다면 그걸 밧줄로 꼬아 서로를 더 단단히 붙들어 매자.> 라는 말을 하면서 둘의 영속을 다짐한다.

나 역시 20대 초반의 딸을 둔 엄마로써 20대 딸과 엄마 둘만의 여행이 조금 부러워보였다. 엄마와 딸 단 둘이 여행을 하다 보면 좀 더 솔직하게 과거를 회상하며 아름다운 추억이나 상처와 후회 모두 이야기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가족 모두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가족 여행이 더 좋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일흔 두 살에 죽은 마리아. 그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죽은 마리아가 살아온 삶을 알 수 있다. 성당에 다니던 마리아에게는 성당 지인들이 많은데, 그들의 입을 통해 마리아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를 보여준다. 옛날엔 많은 여성들이 남녀차별을 겪었는데, 마리아 역시 딸이라고 집안에서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집안 몰래 본인이 파독 간호사를 신청하여 독일로 떠난다. 독일에서 간호학교를 다니던 중 독일인과 사귀게 되어 청회색 눈동자의 남자아이를 낳게 된다. 그러나 아직 결혼 신고도 안 된 상태에서 남자친구는 격무에 시달려 돌연사하게 된다. 이방인이었던 마리아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기엔 힘들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 그 아이를 독일인 가정에 입양 보낸다. 마리아는 한국에 돌아와서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장애가 있는 남자 아이를 입양하여 키웠고 그 손주까지 돌보고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 가사도우미를 하면서도 그녀의 큰 기쁨은 태극기를 팔러 다니는 일이었다.

성당 지인들이 이렇게 어렵게 살아온 한 여성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떠벌이는 모습에 맘이 안 좋았다. 또한 가사 도우미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그들끼리도 그녀를 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 여자의 가엾은 인생을 한낱 잡담꺼리로 만들어 버리는 장면에 종교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인다. 마리아는 부모가 차별만 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에서 공부하고 아이 낳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했기에 한국아이도 입양하고 태극기도 팔러 다녔을 것이라 짐작한다.

<무구>

은퇴한 소미 부부는 여유롭게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미의 대학동기인 현수가 소미를 사기 치는 바람에 이렇게 노후가 여유로워졌다. 40대 중반에 다시 만나게 된 친구 현수는 부동산 업자였다. 현수는 지방 국도변에 있는 몹쓸 폐가를 소미에게 팔아넘긴다. 그 땅은 개발은 커녕 주변에 묘역이 들어선다는 말로 소미는 불안해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현수는 잠적을 해버리고 사라진다. 땅 주변 동네 사람들도 모두 사기꾼 같아보였고 안 좋은 소문만 돌았다. 하지만 소미는 무구하다고 생각한 그 땅을 팔지 않았다. 주변에 리조트가 들어서면서 인근이 개발되었고, 은퇴한 남편은 그 땅에 건물을 지어서 지금은 임대사업자가 되었다.

누군가를 사기를 치고 누군가는 사기를 당한 케이스인데, 사기 당한 사람이 오히려 덕을 본 경우다. 이런 경우는 정말 흔하지 않다. 젊은 시절의 친구들이 이런 식으로 동창이나 친구들 뒤통수치는 경우 우리 주변에서 많이 본다. 아마 작가도 한번쯤 이런 일을 겪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깜빡이>

두자매(혜영, 혜진)와 엄마(신숙), 그리고 이모(신애)가 안국역에서 식사 모임을 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모가 치매가 온 건지 길을 잃어 만나기로 한 장소에 제대로 오질 못한다. 동생 혜진은 엄마가 길을 잃은 이모에게 남편의 도움을 받으라고 한걸 보고 언니가 동생을 버렸다고 느낀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 동생 혜진이 언니 혜영에게 내가 치매에 걸리면 언니도 나를 그렇게 버릴 거냐고 물어본다. 언니 혜영은 난 너를 찾아갈 거라고 한다. 우린 둘 다 남편이 없으니까 하면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미래의 모습을 그려보곤 하는 것 같다. 나도 건강이 나빠지면 어떡할까? 노후에 나를 돌봐줄 사람은 있을까? 그러다보니 가족과 혈육에 점점 의지하려고 하는 것 같다. 동생 혜진이의 두려움도 이런 것에서 기인한 것 같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아들 오익은 엄마의 전화에 너무 힘든 나날들을 보낸다. 엄마는 딸 오숙이가 자꾸 전화를 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잠을 잘수 없다고 아들에게 하소연한다. 그러면서 엄마는 죽어도 안 끝나고 죽고 또 죽어서도 갚아야 하는 빚이 원채라고 하면서 원채 이야기를 자꾸 한다.

오숙은 아프기도 했고 성적도 안 나와서 대학을 못간 건데, 자기만 대학을 안 보내고 오빠만 대학 보냈다고 엄마에게 차별했다고 한다. 오숙은 남편이 돈을 잘 벌어서 엄마에게 꼬박이 용돈을 보내는 상황이었는데, 이제 그 용돈을 끊었다. 그래서 아들 오익에게 원채라는 빚을 정으로든 뭐로든 오숙에게 갚아야 한단다. 박사과정에 있는 아들 오익은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이 안 되니, 오숙에게 잘하라는 말로 들려 부담을 계속 느낀다.

<각각의 계절> 모든 단편 속의 주인공이 여자들인데, 남녀차별의 내용을 여기저기서 발견하게 된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에서 첫 등장인물이 아들 오익인데, 이야기를 쭉 읽다보면 딸 오숙이 차별을 받았으니 결국 아들 오익이가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기억의 왈츠>

1인칭 시점의 주인공이 동생부부와 교외의 숲속 식당을 다녀온 후 대학원 시절에 사랑했던 경서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경서와 다른 친구들인 구선배, 승희와 함께 숲속 식당을 다녀온 것이 생각나면서 그 시절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다. 경서는 주인공을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 속에는 123일에 숲속 식당에서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겼다.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둘이 함께 왈츠의 스텝을 밟는 날

두 겹의 차원이 동일한 무늬로 만나는 날

그날 우리 숲속 식당에 가자

 

주인공 나는 그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상속문제로 엄마와 오빠의 학대로 상처 받은 상태였다. 집에서 쫓겨나 상처로 얼룩진 상태여서 경서의 사랑을 받아줄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해 양력 123일이 음력 123일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매년 새해가 되면 123일의 음력 날짜를 확인할 것이란 다짐을 하며 혹시라도 모를 경서와의 재회를 기대해본다.

 

이 작품 역시 여성 차별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부모의 차별과 오빠의 학대로 상처받은 주인공이 사랑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던 그 시절 회환의 감정을 다룬다. 아름다운 장소에서 아름다운 것만 추억해야 하는데, 강아지의 학대 장면에서 본인의 아픔을 떠올리는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학대 받은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경서와의 아름다운 왈츠로 젊은 시절 기억이 가득차길 빌어본다.

 

<총평>

이 소설은 각종 문학상을 받은 7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단편집이다. 그래서 많은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독서모임 회원도 쉽게 읽힌다고 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읽어보니 쉽게 읽히긴 하는데, 그 속뜻은 이해하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처음 읽었을 때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듯 했는데, 두세 번 읽으니 작가의 의도가 보이는 것 같다. 처음엔 약간은 우울한 내용도 보이고, 학생 운동에 열심히 참여했을 작가의 모습도 보이고 해서 무겁다고 느꼈다. 2, 3번 읽으니 이 책은 여자의 삶을 다양하고 세밀하게 다루고 있으며,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부분의 장치를 여기저기 심어 놓은걸 발견했다. 특히 문학적 표현 속에서도 여성의 차별과 아픔, 그리고 걱정 이 모든 것들이 담겨져 있는 심오한 책이다. 다시 읽으면 또 새로운 내용이 보일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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