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x250
반응형

무영탑

(현진건, 1939)

원문 PDF 파일 다운로드

현진건-무영탑.pdf

줄거리 및 해설


무영탑


1

신라 경덕왕 시절.

사월 초파일이 내일 모레. 서라벌 서울에는 석가 탄일 준비가 한창 바쁘

다.

눌지왕 때부터 몰래몰래 이 나라에 스며들어 온 서천 서역국의 부처님 도

(道)는 법흥왕 말엽 이차돈의 순교로 활짝 길이 열리고, 삼한 통일을 거쳐

성덕, 경덕에 이르자 그 찬란한 연꽃은 필 대로 피었다.

그 당시의 초파일이라면 설, 대보름, 팔월 한가위보담 더 큰 명절이었다.

파일 놀이에 첫째 가는 연등과 관등. 어느 집에서도 가지각색 등을 맨들기

에 야단법석이다. 모난 놈에 둥근 놈, 기름한 놈, 암팡진 놈, 장구 모양,

북모양, 푸드득 나는 양의 봉황새, 엉금엉금 기는 양의 자라 남생이…….

도림의 대를 베어 곰살궂은 잔손질로 휘엉휘청 등틀을 휘어 매고, 선두리

는 금당지에 은당지, 싸 바르는 종이도 오색이 영롱하다.

여느 집도 이러하거니, 하물며 부처님을 모신 절들이랴. 대천세계를 밝게

밝게 비쵤 등 준비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축하식 봉행 절차와 법연 베풀

자리며, 재 올릴 분별에 웬만한 절들은 벌써 여러 밤을 하얗게 밝히었다.

더구나 황룡사, 분황사, 백률사 같은 큰절들은 당일 거둥을 맞이할 차비에

더욱 공을 들이고 애를 켰다. 다른 절차는 다 고만두드래도 잠시 잠깐이나

마 임금님 듭실 옥좌와 고관 대작을 영접할 처소를 마련하기에 쩔쩔매었다.

비지땀들을 흘리고 쩔쩔매기는 하면서도 중들은 저절로 으쓱으쓱 어깻바람

이 났다. 한 번 거둥에 쌀과 금과 은과 피륙이 산더미로 쏟아지는 까닭이

다. 수가 좋으면 몇십 결 보전의 시주가 나리기도 한다. 부처님이 나셨으니

좋고 임금님이 오시니 좋고 그보담 더 좋기는 생기는 것이 많은 것이요, 음

식이 질번질번하고 새 옷을 갈아입게 되니 대덕 중덕의 웃두리 중은 물론이

요, 비구 사미 따위의 아랫두리까지 싱글벙글 한 시절을 만난 셈이다.

그럴싸해서 그런지는 모르되 목탁과 경쇠 소리도 요새 따라 더 한층 우렁

차게 활기를 띤 듯하다.

왼 서라벌이 발칵 뒤집히도록 야단법석을 하는 가운데 오직 불국사만은 다

가무러진 잿불처럼 절 안이 괴괴하다.

불국사로 말하자면 신라에 크게 불법을 일으키신 제 23대 법흥왕 시대의

초창으로 오늘날 장안에 즐비한 808 사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고찰이

요 초창 이후 여러 번 , 중창과 수리를 겪어 그 규모의 굉걸 웅장한 품도 어

느 절보담 못하지 않은 대찰이다. 더구나 서라벌의 제일 명산 토함산을 등

진 그 절터는 비단 서울 근교뿐 아니라, 신라 전국을 뒤져 보아도 그런 절

묘한 자리를 찾아내기는 그리 쉽지 않으리라. 뒤로는 빼어난 봉우리를 느신

하게 짊어지고, 좌우로는 울창한 송림을 슬며시 끌어당기며, 쪽으로 그린

듯한 호숫가에 넌지시 발을 내어 밀었는데, 앞으로는 광활한 평야가 훨쩍

열리어, 눈길 가는 곳 막힐 데 없으니 명찰에 절승까지 겸하였다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이만한 절이어니 파일 차림도 응당 굉장하련마는, 도모지 그런 기척을 찾

으래야 찾을 수 없다.

밤이 되었건만, 다른 절처럼 이글이글 하늘을 태울 듯한 화톳불도 놓지 않

았다. 펄렁거리는 횃불도 볼 수 없었다. 마지못해 단 듯한 불전의 추녀 끝

에 두어 개 촛불이 가물거릴 뿐. 왼 절 안이 죽은 듯 고요한데 이윽고 ‘큰

방’에서 두런두런 인기척이 난다.

‘큰방’이란 절에 무슨 일이 있으면 공사하는 처소요, 또 이 절 주지 아

상(阿湘)노장의 거처하는 곳이다.

2

불국사 중들은 저녁 불공을 마쳤으니 제각기 제 처소로 돌아가도 좋으련마

는 그들의 발길은 의논이나 한 듯이 큰방으로 하나씩 둘씩 모여들었다.

풀기 하나 없는 그들은 주지 아상 노장을 중심으로 한 겹 두 겹 에워싸듯

둘러앉는다.

그들은 슬금슬금 노장의 기색을 살피며 무슨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듯.

그러나 아상 노장은 감중련하고 그린 듯이 앉았을 뿐이요, 이가 빠져서 합

죽하게 다문 입은 열릴 것 같지도 않다.

노장의 눈치를 보다가 지친 그들은 인제 저희들끼리 서로서로 눈치를 바라

본다. 다 같이 제 흉중에 먹은 마음을 누가 활활 속 시원하게 직설거를 해

줄까 하고 서로 찾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입을 벌리는 사람은 없었

다.

한동안 답답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누구인지 휘유 하고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휘유’소리가 무슨 군호 모양으로 여기 저기에서 반향이 일어나고, 어

떤 이는 제법 일장 설법이나 할 듯이 칵 하고 큰기침까지 하였다.

마츰내 말문은 터졌다.

“흥, 작년 파일도 그양 지내고…….”

누구인지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작년뿐인가, 재작년 파일도 개 보름 쇠듯 안 했는가 베!”

중늙은이 중 하나가 뒤받는다. 나이는 한 오십 가량밖에 되지 않았으나 겉

늙어서 뺨은 살 하나 없이 홀쭉 빨았고, 중풍중 탓인지 또는 신경질 탓인지

뾰족하게 내민 턱을 덜덜 떠는데 목청만을 쨍쨍하게 새되다.

“금년에는 꼭 공사를 끝내고 낙성 겸 굉장하게 파일을 지낼까 했더니, 젠

장 맞을 그 원수엣 놈의 탑이…….”

구레나룻 자리가 새파란 이 절의 원주(살림 맡은 중)가 불쑥 이런 말을 하

다가 제 말씨가 너무 사나운데 스스로 주춤하고, 말은 중두멍이를 하였으나

마 그 부리부리한 눈방울을 불평스러운 듯이 구을린다.

아상 노장은 조는 듯하던 눈을 번쩍 떴다. 침같이 숭숭한 하얗게 센 눈썹

밑에서 그 눈은 이상한 광채를 발한다. 입을 놀리던 중들은 움찔하였으나

노장의 눈은 스르르 다시 감기고 말았다.

“그야 그렇게 말한 건 아냐. 어느 건 공든 탑이라고 그야 공이야 들지.

그렇지만 너무 오래단 말이야, 너무 오래야, 벌써 삼 년 의 세월이 걸리지

안 했나. 삼 년, 삼 년이면 일 년이 삼백육십 일이라, 가만 있자 날수로 치

면 천 날이 넘지 않나 베. 에이 참 날짜로 따져 보니 엄청나군, 엄청나.”

‘떠는턱’은 뼈만 남은 앙상한 손가락을 꼽아가며 한바탕 늘어 놓는다.

“삼 년, 흥. 몇 석 삼 년이 걸릴지…….”

누구인지 곱씹는다.

“그게 무슨 말인가? 아예 그런 말일랑 입밖에도 내지 말게. 삼 년, 삼 년

이 셋씩 걸리면 어떡하란 말인고, 우리는 말라 죽으란 말인가.”

‘떠는턱’은 손을 쩔레쩔레 흔들며 펄쩍 뛴다.

“뚱뚱보는 말라깽이 되고, 말라깽이는 말라 죽고, 킥킥.”

어데서인지 웃음소리가 터진다.

‘떠는턱’의 옴팡한 눈엔 대번에 쌍심지가 선다. 그리고 웃음 터진 곳을

노려보며,

“오 이놈, 네놈은 살푸덤이가 얼마나 붙었다고 그래 석삼 년씩 굶어 봐

라. 산돼지같이 살이 더 찔 테니.”

“그러구 말구. 장실 말씀이 옳다 뿐이오? 다 이를 말이오……?”

장실(丈室)이란 중들끼리 서로 위해 불르는 칭호다.

아까 말 실수로 무참했던 원주가 기회를 얻은 듯이 ‘떠는턱’의 역성을

드는 체하면서 쏟아 놓기 시작한다.

“그렇게 작년만 그양 넘긴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워낙 대공이라 이

태 쯤 걸리는 건 용혹무괴로되, 금년 파일까지도 끝을 못 내다니, 원 일을

하는게 아니라 노라리야 노라리. 굼벵이가 쌓아도 천 날을 쌓으면 열 층탑

이라도 열은 쌓았을 것 아니냐 말야…….”

말씨는 점점 우락부락해 간다.

“자, 이건 역군일세 뭘세, 밥을 몇 솥을 쪄내도 금세금세 없어지고 들어

오는 게 뭐 있느냐 말야. 대공을 끝내기 전이라 해서, 거둥 한 번이 계신

가, 대갓집에서 어엿한 행차가 있는가. 여느 집 재 올리는 것마저 절금이니

대관절 우리네는 뭘 먹고 살란 말이냐 말야.”

하고 주먹으로 방바닥을 나리친다.

3

화랑을 좇아다니다가 입산한 지 얼마 안 되는 ‘빨갱이’가 그 별명마따나

다혈질의 시뻘건 얼굴을 더욱 붉히며 자리를 헤치고 나앉는다.

말하기 전부터 목줄대에 핏대가 선다.

“우리 신라에도 사람이 없지 않은데 도대체 그런 막중 대사를 부여놈 따

위에게 맡기는 게 틀렸단 말이오. 그래 우리 신라에는 석수장이가 한 놈도

없단 말이오? 아무리 한들 그래 그까짓 부여놈 재조를 못 당한단 말이오?

꾀죄죄한 잔손질은 혹 빠질는지 모르지만 큰 솜씨야 어데 어림 반푼 어치가

있단 말이오? 정말 이 서라벌 석수들이 적이 핏기나 있는 놈들 같으면 목을

따고 죽어 마땅하지, 그놈들도 다 죽었지그려. 그런 대공을 시골뜨기 석수

에게 뺏기고 열손 재배하고 가만히들 있으니. 에이 못생긴 것들, 다 죽은

것들…….”

팔을 부르걷고 분개한다.

“아니 여보, 그 말은 그 부여 석수장이를 욕하는 말이오? 또는 우리 신라

석수장이를 욕하는 말이오? 말이란 종을 잡을 수 있게 해야지.”

본래부터 ‘빨갱이’의 화랑 냄새를 싫어하는 ‘떠는턱’이 한마디 따진

다.

“누가 말시비를 캐자는 거요? 이를테면 그렇단 말이지. 그래, 신라에는

석수장이가 씨가 말랐단 말이오?”

‘빨갱이’는 빨끈하며 뇌까린다.

원 부여는 신라 “ , 땅이 아닌가 배. 원 내가 석수장이를 맨든단 말인가.

씨가 말르고 안 말른 걸 내가 어찌 알꼬.”

“이건 말책만 잡으면 제일이오? 아니 그래 그놈이 제 재조만 믿고 거드름

을 피는 게 장실은 아니꼽지 않단 말이오? 능라주단으로 제 처소를 꾸미고

진수성찬에 엇들고 받드니 아주 제가 젠 체하고 이건 누구를 보고 인사 한

마디를 할 줄 아나. 혹 수작을 붙여 보아도 대꾸는 않고 고개만 끄떡끄떡하

고 마니 그래 그놈이 벙어리란 말이요, 먹장이란 말이오? 도대체 제 명색이

뭐란 말이오? 한금해야 돌 쪼는 석수장이 아니오? 원 아니꼽살스럽게.”

“그건 또 딴말이지.”

“아니 그래 장실은 끝끝내 남의 비윗장만 흔들어 놓을 작정이오? 딴말이

무슨 딴말이오? 디 한말이지. 아무튼 일을 해야 공사가 끝이 나든지 재랄을

하든지 할 것 아니오? 이건 멀거니 탑 위에 앉아서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니

탑을 쌓는 게 아니라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잡으려는 건지. 이걸 나날이

쳐다보고 오늘이나 얼마쯤 되었나, 내일이나 끝이 나려나 하는 우리 불국사

승려야말로 불쌍하지 않소? 그놈이 아마 고량진미에 배때기가 불르고 대우

가 융숭하니까 제 고장에 돌아가기가 싫어서 일부러 공사를 질질 끌기만 하

는 거야.”

“처음 올 적에는 밥 한 그릇씩 그양 때려눕히더니만 인젠 아주 귀골이 됩

셨는지 밥은 한 술밖에 안 뜨니…….”

원주가 빈정거린다.

“흥, 배때기에 발기름이 오르면 고량진미도 보릿겨 떡만 못한 법이거

든.”

빨갱이가 또 개탄한다.

뭇 입이 찧고 까부는 사이에 조을고만 있던 아상 노장은 아까부터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다가 이 때야 그 영채 도는 눈을 번쩍 떠서 원주를 본다.

“요새도 그렇게 밥을 자시지 않느냐?”

위엄 있고도 간곡한 목소리다.

원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굽실하며,

“예, 한술을 뜰까 말까 하오이다.”

아상 노장은 눈을 더욱 크게 뜨며,

“응, 그것 안되었구나. 저번에도 일렀지만 별좌(반찬 맡은 중)를 신칙해

서 찬 같은 것 정결스럽게 하느냐?”

“예, 여러 번 신칙을 했습니다. 찬이야 있는 대로는 다 올리옵지요.”

“각별 신칙하여라. 먼데 손님이 병환이나 나시면 어떡하느냐, 알아듣느

냐?”

부드러우나마 꾸짖는 듯한 타이르는 듯한 말조다. 그리고 인제는 내 할 말

을 다 했으니 너희들이야 얼마를 떠들든지 나는 자던 잠이나 자겠다는 듯이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 빨갱이와 원주는 못마땅한 듯이 고개를 외우시고

입을 삐쭉한다.

4

빨갱이는 끊어진 수작의 실마리를 찾으며 원주를 보고,

“참 언젠가 장실이 얘기한 것이지만 요즈막은 밥상은 어데로 올린다누?

제 처소로 올리는가 또는 탑 위까지 모셔 올리는가?”

빨갱이는 노장을 슬슬 곁눈질하고 깍듯이 위해 올리며 빈정빈정한다.

“단층만 쌓았을 적 말이지 인제야 탑 위로는 못 올리지. 벌써 두 층이나

쌓았으니까 무슨 주제로 그 꼭대기에서야 밥상을 받겠다 하겠소. 아츰 점심

은 제 방으로 가져가고 저녁은 역시 일터로 가져간다오. 대중공양(중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밥 먹는 것)에나 한몫 끼었으면 좋으련마는 이건 밥 먹는

자리까지 일정하질 않으니 원 성이 가시어서.”

하다가 아상 노장을 꺼리어 말소리를 낮춘다.

“우리끼리 말이지만 언제든지 아츰상은 그대로 나온대. 한나절까지 뒤어

진 듯이 자빠져 있다가 오시가 훨씬 지난 뒤에야 겨우 눈을 부비고 일어나

서 개울에 나가 늘어지게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제 방에 돌아와서는 점

심을 뜨는 둥 만 둥 일터로 올라간대. 일터에 올라가서는 그대로 끓어앉아

서 그래도 잠이 미흡한지 꾸벅꾸벅 조을기만 하고 저녁 때가 되어도 나려올

줄을 모르니 부득이 저녁상을 일터로 가져갈 수밖에 있소? 공양을 보고도

나려오지를 않고 손짓으로 탑 아래 두라는 뜻만 보인다오. 상이 났는가 하

고 몇 번을 가 보아도 상이 그대로 있다는구려. 열 나절이나 스무 나절이나

제 한이 차야 부시시 나려와서 몇 술을 뜨고 또 올라간대. 그러니 일껏 지

은 더운밥이 다 식고 국과 찬은 몬지투성이가 되고…….”

“제 고장 있을 때 식은 밥 먹던 것이 버릇이 되어서 더운 밥을 먹으면 혓

바닥이 부르터 오르는 게지.”

빨갱이가 혀를 찬다.

“다 어두운 뒤에 또 올라가면 무슨 일을 할 거냐 말야, 흥.”

원주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기 말이지. 그래 탑 위에 올라가면 역시 등신같이 앉아만 있다오.

밤이 이슥하도록 나려올 생각도 않고 어느 틈에 제 방에 나려와서 자는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는밖에.”

“그러면 언제 일은 한다는 말이오?”

‘떠는턱’이 묻는다.

“글쎄 그게 별판이야. 그래도 그 잔손질 많은 다보탑을 끝내고 석가탑을

시작한 것만 별판이지.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걸려도!”

“그것 참 불가사의로군. 이녁들 말 같을 지경이면 그야말로 그 사람이 신

통력을 가진 게로구려. 일하는 낌새도 없는데 세상에도 진기한 탑이 이루어

지니.”

‘떠는턱’이 또 말에 티를 넣었다.

“그러면 내가 거짓말을 한단 말이오?”

원주는 그 사나운 눈알을 흘긴다.

“이 좌중에 물어 보시오. 요즈막에 그 작자의 일하는 걸 본 사람이 있나

없나.”

“어, 그렇게 진심을 내지 마시기오. 일하는 싹도 없는데 일이 되니 그야

말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 아닌가 베. 딴은 나도 일하는 걸 보지는 못했으

니.”

“이상은 한 노릇이야. 우리도 그 석수가 탑 위에 앉고 서로 하는 건 봤지

만 손대는 것은 못 보았는걸.”

누가 맞장구를 친다. 좌중도 그렇다는 듯이 고개들을 끄덕인다.

“저는 여러 번 봤어요.”

먼발치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 하나가 말참예를 한다.

“오, 차돌이냐. 참 너는 잘 알겠구나. 그 방에서 시종을 드는 터이니깐.

그래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차돌의 말에 옳다구나 하는 듯이 반색한다.

파일을 잘못 쉬는 분풀이로 부여 석공에게 원정이 가게 되고, 원정 끝에

그 인격과 행동까지 티를 뜯고, 나종에는 애당초에 일은 손에도 대지를 않

은 것처럼 비난의 화살이 날아, 말은 꼬리에 물어 밤 가는 줄도 몰랐다.

우 하고 토함산 기슭을 스쳐 나려오는 산바람은 큰방 장지를 흔들고 첫여

름의 눅눅한 풀 향기를 들이친다.

우울과 불평과 원망에 어리인 방안의 무거운 공기도 이물처럼 흘러들어오

는 밤바람에 얼마쯤 완화된 듯하였다.

추녀 끝에 달린 풍경이 떵그렁떵그렁 운다.

꼬끼요, 아랫 마을에서 첫 홰를 치는 닭소리가 그윽이 들려온다.

5

“그래, 차돌아, 그 어른이 어느 때 일을 하시던?”

‘떠는턱’은 또 한번 재촉을 한다.

차돌은 그 총기 있는 눈을 깜박거리며 여러 스님을 둘러본다. 이런 자리에

말을 하기가 주눅이 드는 듯, 그 여상진 흰 얼굴을 살짝 붉힌다.

“어서 얘기를 하려무나. 갑갑하구나. 본 대로 말을 못 해!”

원주는 벌써 호령조다.

차돌은 잠깐 고개를 갸우뚱하고 어데서부터 허두를 내어야 옳을지 몰라 망

설이는 듯하다가 가느나마 차근차근한 목소리로 말을 끄집어내었다.

왼 방의 귀와 눈은 차돌의 입술로 몰리었다.

“언젠가 제가 새벽녘에 잠을 깨었지요. 그래 무심코 아랫목을 보니까, 그

어른이 누워 계시는 자리에 그 어른이 계시지를 않겠지요. 뒷간에나 가셨나

하고, 그양 쓰러져 누우려다가 웬일인지 그 날은 잠이 설들어요. 암만 기다

려도 그 어른은 오시지를 않고, 휘젓한 게 어쩐지 무서운 생각이 나요

…….”

하고 차돌은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옳지, 그래 어린 것이 무섭기도 하겠지. 그래, 그래서?…….”

‘떠는턱’이 연송 재촉을 한다.

“지금 생각하니 그 때가 아마 작년 겨울인가 봐요. 눈보라가 몹시 쳐서

문풍지는 덜덜 떨고…… 잠은 점점 달아나고 무섭기는 하고, 그래 제가 일

어나서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옹크리고 있노라니 눈보라가 버석버석 창

에 부딪치는데 어데선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와요. 쩡쩡…… 그 때 ‘석’하

시는 스님은 아직 안 나오시고 왼 절 안이 괴괴한데 이 난데없는 소리를 듣

고 저는 간이 콩만 했다가 겁결에도, 오 옳지 이 어른이 이 눈 오시는 새벽

에도 탑을 지으시나 부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겠지요!”

“오, 그래서?”

어느 결엔지 아상 노장이 눈을 떠서 귀여운 듯이 차돌을 바라본다.

“제가 그대로 뛰어나와 버석버석하는 눈 위로 줄달음질을 쳐서 탑 모시는

곳으로 올라가 보았지요. 새벽이라 해도 아직 날이 덜 새어서 어둑어둑했지

만 눈길은 환했습니다. 올라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어른이 정을 들고 한

참 바쁘게 일을 하시더군요. 제가 곁에 가도 사람 오는 줄도 모르시고 머리

에 등에 눈을 뒤집어쓰신 채 정과 망치를 번개같이 놀리시겠지요. 거기가

워낙 바람모지가 되어서 저는 얼마를 서 있지를 못해 귀가 떨어져 달아날

것 같고 발이 쓰리고 왼몸이 덜덜 떨려서 ‘에이 치워!’ 소리가 저절로 나

와 버렸습니다. 그제야 그 어른이 놀랜 듯이 저를 돌아보시는데 그 얼굴에

는 구슬 같은 땀이…….”

“그 치운데 땀이…….”

누가 감탄을 한다.

“저는 숨길도 얼어붙을 것 같은데 그 어른의 비 오듯 하는 땀을 보고 정

말 놀랬어요. 그 어른은 저를 보시고 빙그레 웃으시며 ‘치운데 왜 나왔니?

어서 들어가거라. 감기 들라.’그래도 제가 머뭇머뭇하고 섰노라니, ‘오,

네가 혼자 무서워서 나온 게로구나.’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시듯이 말씀을

하시고 저를 데리고 나려오시는데, 저는 오금이 얼어붙어 댓 자국을 못 옮

기었는데 그 어른은 여상스럽게 걸어오시겠지요. 참 신통력을 가지신 어른

이에요.”

일좌의 얼굴에는 감동하는 빛이 흘렀다.

“그래, 그 후에도 일하는 걸 또 본 적이 있니?”

원주가 종주먹을 댈 듯이 묻는다.

“보고말고요. 낮에 틈틈이 일하시는 것도 저는 가끔 봅니다마는 사람을

기하시는지 인기척만 나면 곧 일을 중지하시지요. 요새도 꼭 밤을 새우시는

걸요. 아침이 되어 여러 스님이 일어나실 때쯤 해야 처소로 돌아오셔요. 제

귀에는 밤중에도 정 소리가 역력히 들려 와요.”

“참말 명공은 명공이야.”

“천수관세음의 현신이시어.”

“그런 명공을 얻은 것은 첫째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둘째 우리 절의 복이

야.”

“아니, 우리 신라의 복이지.”

제각기 떠들 때에 차돌은 갑자기 손으로 제 귀를 기울이며,

“가만히들 계셔요. 자 자, 저 소리를 들어보셔요, 저 소리를.”

나직하게 속살거린다.

여럿은 귀를 기울였다.

무슨 소리가 그윽이 그윽이 들려온다.

여럿은 숨소리를 죽였다. 귀가 쏠릴수록 그 소리는 더욱 또렷또렷해진다.

똑 똑, 바루 추녀 끝에서 완연히 낙수가 떨어지고 자그륵 자그륵 연잎에

급한 소나기가 지나가는 듯하다가 문득 쩡 하고 우람한 울림이 지동처럼 울

려 온다.

성기고 배게 느리고 자지러지게 , , 높으락낮으락 그 소리는 저절로 미묘한

곡조를 이루어 쪼는 이의 신흥을 알으켜 준다.

여럿은 말없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소리 오는 것을 눈 익혀 보려는 것

처럼.

바깥은 옻빛같이 캄캄하다.

“이렇게 어두운 밤에…….”

일동은 서로 돌아보았다.

그 이튿날 뜻밖에 위로 고마우신 분부가 나리었다. 대역이 끝나기 전이니

어엿한 거둥은 못 하셔도 다른 절에서 불식을 마치신 후, 미행으로 듭신다

는 분부다.

6

불국사의 저녁 나절.

연옥색 하늘을 인 토함산 꼭대기 너머로 너붓이 내다보이는 담회색 구름장

은 서쪽으로 향한 송아리가 햇솜처럼 눈부시게 피어난다. 산기슭 울창한 송

림은 푸른 기름이 질질 흐르는 듯.

절 앞 넓고 넓은 못은, 바람도 없건마는 제 흥에 겨운 듯이 찰랑찰랑 몰려

들어와 새로 쌓아올린 석축에 부딪는다. 바그르 흰 물꽃을 날리고 갈 길을

몰라 쩔쩔매는 듯하다가 더러는 수멸수멸 뒷걸음을 쳐서 멀리 물러가고, 더

러는 옆으로 빙그르 돌아 청운교 연화교 가를 더듬더니 마츰내 돌로 튼 홍

예문을 찾아내어 앞을 다투며 몰켜 나가서는 어지럽다는 듯이 뱅뱅 돈다.

저 건너 언덕에는 그림배 여러 척이 매였다. 물결이 일렁대는 대로 자줏빛

남빛 누른 빛 비단 휘장이 한가롭게 펄렁펄렁한다. 그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화려하고, 뱃머리에 여의주를 문 청룡이 꿈틀꿈틀 움직이는 배는 아마

임금을 모실 배이리라.

물새 몇 마리가 너울거리는 나랫자락을 적실 듯 적실 듯하며 물얼굴을 스

쳐 난다.

그 긴 부리로 넝큼넝큼 송사리 따위를 잡아 삼키다가, 별안간 놀란 듯이

그 반질반질한 작은 몸을 솟구쳐서 높이높이 공중으로 사라진다.

입실(절 어구) 부근에서 들리는 인기척이 떠들썩하게 가까워 오는 까닭이

리라.

거둥이 듭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마쳐 놓고 웃두리 중들은 영접차로, 아랫두리 중들은 구경차

로 절을 텅 비우다시피 하고 들끓어 나왔다가 이제야 제각기 제 맡은 소임

을 생각하고 줄달음질로 들어오는 것이다. 어지러운 그림자, 허둥거리는 바

쁜 걸음. 종용하던 공기는 흔들렸다. 찢어질 듯이 긴장한 가운데 물 끓듯

워글워글한다.

미행이라 하였지만, 도리어 화려하고 가족적인 단란한 거둥이었다.

왕은 젊으신 왕비 만월 부인과 후궁 비빈을 거느리셨고, 배종하는 몇몇 대

관들도 왕명을 받들어 그 부인과 딸들을 데리었다.

이번 거둥은 기실 젊으신 왕비께서 오래 불국사 구경을 못 하시어 한번 소

창을 하시자고 낙성이 되기 전이건만 왕을 조르신 까닭이다. 안압지 서출지

의 뱃놀이도 좋지마는 절 안으로 저어드는 불국사의 그림배엔 버리지 못할

풍치가 있었다. 더구나 이번에 새로 이룩된 다보탑이 세상에도 진기하다는

소문을 들으셨음에랴.

기름 같음 물결 위에 그림배는 꼬리를 맞물고 술렁술렁 떠나간다.

배가 기우뚱기우뚱, 번쩍번쩍하는 금관이 물속에 흔들리자, 수없는 구옥이

어지럽게 춤을 춘다. 희빈들의 예쁜 얼굴들이 연꽃 숭이처럼 둥둥 떴다. 실

바람에 나부끼는 구름 조각과 같이 아른아른한 깁옷자락도 흐른다. 간댕간

댕하는 황금 귀고리와 구실 목걸이가 물거품 사이로 숨기잡기를 한다.

실바람을 따라 고귀한 향기가 그윽이 풍기었다.

중류를 지나자 길게 누운 으리으리한 전각의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부서졌

다.

동쪽으로 청운교 백운교, 서쪽으로 연화교 칠보교가 뚜렷이 나타난다. 불

국사 자랑의 하나인 돌사다리다. 번들번들하게 대패로 밀어 놓은 듯한 충댓

돌과 그 층층 상하에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그 머리에 구녕을 뚫어

늘어뜨린 은사실을 바라보고 배 안에서는 경탄의 속살거림이 일어났다.

“얘, 털아! 참 아름답기도 하고나.”

꽃 같은 희빈들 중에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웬 아가씨가 맥맥히 돌사다리를

바라보다가 제 옆에 앉은 시비에게 소곤거렸다. 그는 은실 금실로 수놓은

끝동 소매를 조금 치켜서 옥 같은 손으로 뱃전을 짚고 그 날씬한 허리를 반

나마 배 밖으로 기울였다.

“어쩌면 돌층층대를 바루 물속에 맨들었어요? 구실 아가씨!”

털(毛兒)이란 시비는 그 동그란 눈을 더욱 동글게 뜨며 맞방망이를 친다.

“그보담도 저 웃사다리와 밑사다리 어름을 좀 봐라. 그 밑에 돌로 홍예를

튼 것이 보이지 않니? 물결이 그 조그마한 홍예 안으로 들락날락하는 게 가

지고 놀고 싶구나.”

구실 아가씨란 이의 그 거슴츠레한 눈은 황홀해진다.

7

그는 이찬(伊飱) 유종(唯宗)의 딸 주만(珠曼)이었다. 흔히는 구실 아가씨

라고 부른다.

“아이 야릇도 해라. 참 거기 물문이 있구먼요. 아가씨는 눈도 밝으시

어.”

털이는 그 동그란 눈을 이번에는 지그시 감은 듯이 하고 바라본다.

“그 물문 안으로 배를 타고 한번 돌아보았으면.”

주만은 혼잣말같이 중얼거린다.

“그게 뭐 어려워요. 좀 돌아보자고 사공에게 그럽지요.”

“글쎄, 그럼 그래 볼까?”

주만은 뛸 듯이 기뻐하며 배 안을 돌아보고,

“우리 저 물문으로 지내가 볼까요?”

하고 물었다.

“그래요, 참 그래 봐요.”

“그러면 작히나 좋을까?”

몇몇 젊은 아가씨들도 손뼉을 칠 듯이 찬성을 한다.

다른 배들이 돌사다리 밑 돌기둥에 닻줄을 매려 할 때에, 주만을 실은 배

만 슬쩍 뒤로 빠져 나왔다. 청운교 백운교 사이의 홍예 밑을 돌고 다시 연

화교 칠보교 물문을 접어들었다.

주만은 뱃전에 찰랑찰랑하는 물결을 손으로 움켜 보기도 하고, 물굽이를

따라 배가 뱅뱅 도는 것을 어린애같이 좋아라 한다.

배가 닿을 데 닿은 뒤에도 주만은 제가 지나온 물문을 보고 또 보며 맨 나

종까지 머뭇거린다.

일행은 벌써 다 배에서 나리어 행여나 뒤질세라 하고 종종걸음들을 친다.

“어서 나립쇼. 너무 뒤에 떨어지면 어떡하실라구…….”

털이는 조바심을 한다.

“뭘 그 동안이 얼마나 되겠니?”

주만은 태연하다.

그들이 배에서 나렸을 때엔, 왕을 모신 옥교는 동쪽 사다리 위에 올르시어

자하문 안으로 납시었다. 일행들은 걸어서 왕의 뒤를 모시었다.

주만은 배 안에서 머뭇거릴 때와는 딴판으로 질질 끌리는 치마 뒷자락을

돌아다볼 생각도 않고 나는 듯이 돌사다리를 오른다. 털이는 방구리 같은

키를 꼬불거리며 아가씨의 뒷자락을 추켜 들고 쌔근쌔근 뒤를 따랐다.

자하문을 들어서자 그렇게 서둘 필요는 없었다. 왕은 옥교에서 나리시어

일행을 데리시고 다보탑 앞에 걸음을 멈추신 까닭이다. 주만과 털이는 쉽사

리 그 행렬에 끼일 수 있었다.

주만은 다보탑을 한번 보고 제 눈을 의심 않을 수 없었다.

저젓이 돌로 된 것일까? 저것이 단단하고 육중한 돌로 된 것일까? 돌을 어

떻게 다루었으면 저다지도 어여쁘고 아름답고 빼어나고 의젓하고 공교롭게

지어낼 수 있었을꼬?

네 귀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 네 마리는 당장 갈기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

다. 사자등 너머로 자그마한 예쁜 돌층층대가 있고 그 층층대를 눈으로 더

듬어 올라가면 편편한 바닥이 되는데 그 한복판에는 위층을 떠받치는 중심

기둥이 있고 네 귀에도 병풍을 접쳐 놓은 듯한 돌기둥이 또한 섰는데 그 기

둥들이 둘째 층 밑바닥을 고인 어름에는, 나무를 가지고도 그렇게 곱게 깎

음질을 해내기 어려울 듯한, 소로가 튼튼하게 아름답게 손바닥을 벌렸다.

첫 층의 지붕엔 둘째 층의 네모 난 돌난간이 둘리어 쟁반 모양 같은 둘째

층 지붕을 받들었고, 셋째 층에는 난간이 팔모가 지고 기둥이 여덟 개가 되

어 세상에도 진기한 꽃잎을 수놓은 역시 팔모 진 지붕을 떠 이고 있다.

주만의 눈길은 그 뛰어난 솜씨의 자국자국을 샅샅이 뒤지는 듯이 치훑고

나리 훑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감흥을 자아낸다.

“절묘, 절묘.”

마츰내 왕께서 먼저 절찬하였다.

“그 돌 다루는 재조는 참으로 하늘이 내신가 하옵니다.”

왕의 곁에 모셨던 이찬 유종이 아뢰었다. 너그러운 뺨에 자가 넘는 흰수염

이 은사실같이 늘어졌다.

“경신읍귀의 재화라 함은 이런 재조를 이름인가 합니다.”

고자처럼 노리캥캥하고 수염도 없이 맨숭맨숭한 시중(侍中) 김지(金旨)가

한문 문자를 써가며 맞방망이를 올린다.

“저 탑이 분명히 돌로 지은 것일까? 바루 밀가루나 떡고물 반죽이라면 몰

라도.”

만월 부인께서도 감탄하신다.

“마마의 비유가 그럴듯하오마는 떡가루를 가지고도 마마는 저렇게 빚어내

기 어려울 것 같소.”

하고 왕은 웃으신다.

8

모든 것이 부처님의 법력이시고 “ 상감마마의 원력이신 줄로 아룁니다. 아

무리 단단하고 유착한 바위라도 높으신 원력 앞에는 나무보담 더 연하옵고

물보담 더 물른 것인가 합니다.”

하고 아상 노장이 합장(合掌)을 한다.

“연전에 감역 김대성(金大城)이 천하의 명공을 얻었다 하더니 저 탑도 그

명공이 쌓은 것인가?”

왕이 물으신다.

“분부와 같습니다. 오직 그 명공의 혼잣손으로…….”

“혼잣손으로?”

왕은 놀래신다.

“과연 천하 명공이란 이름이 부끄럽지 않고나. 늙은 사람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이올시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

여러 사람들도 서로 돌아보며 혀를 내어두른다.

“이십 남짓한 젊은 사람!”

주만도 속에 새기듯 곱삶았다.

“서라벌 사람이오?”

이번에는 이찬 유종이 묻는다.

“아닙니다. 부여에서 왔다 합니다.”

“그러면 부여 사람이오?”

“부여에 유명한 부석(伕石)이란 석수의 수제자라 합니다.”

“지금도 그 석수가 이 절에 있소?”

아상 노장은 다보탑 서쪽으로 여남은 간 떨어진 자리에 두 층만 쌓아 놓은

석가탑을 가리킨다. 그 탑에 걸치어 사다리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아직도

집채만큼씩 한 바윗덩이가 여러 개 남아 있고, 치우고 쓸기는 하였지만 그

래도 돌조각이 여기저기 떨어진 것이 아직도 공사중인 것을 알으킨다.

“이 다보탑은 작년에 끝을 내고 지금은 저 석가탑을 짓는 중입니다.”

일행은 석가탑 앞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아직 완성도 되지 않았지마는 얼른 보기에 다보탑처럼 혼란한 깎음새와 새

김질이 없어 다보탑에 얻은 감흥이 너무 컸던 만큼 여럿은 적이 실망을 하

였다.

제 아무리 “ 명공이라 할지라도 다보탑에 기진역진한 게로군.”

김 시중이 대번에 타박을 한다. 경솔하게 입 밖에는 내지 않았을망정 김시

중과 동감인 사람도 적지 않았다.

주만이만 이 말에 맘속으로,

‘아니오, 아니오.’

하고 외우쳤다. 층마다 술밋한 돌병풍이 둘리고 그 병풍 네 귀에 접어 넣은

듯한 돌기둥이 한데 어우러져 탑신을 이루었는데 그 거칠 것 없이 쭉쭉 뻗

은 굵은 선이 어데인지 장중하고 웅장한 풍격을 갖추어 비록 다보탑과 같이

잔재미는 적을망정 그 수법이 범상하지 않을 것을 일러준다.

“아니올시다. 공은 이 탑이 더 든다 합니다. 탑 한 층마다 온전히 돌 한

덩이를 가지고 지어낸다 합니다. 그러니 공사가 거창하기로는 오히려 다보

탑보담 여러 갑절이라 합니다.”

아상 노장이 타일르듯 김 시중의 말을 반박하였다.

주만은 제가 바루 알아본 것이 무엇보담도 기뻤다. 그리고 속으로, ‘한

층이 돌 하나로 되었다면 다보탑보담 공이 더 들고 말고.’

혼자 뇌었다.

“딴은 공사가 거창은 하겠군. 그 우람스러운 품으로는 그럴 상도 싶소.

그러면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미인에 견줄진댄, 이

탑은 헌헌장부의 기상이 있다 할까? 허허.”

김 시중도 아까 제 말이 너무 경솔했던 것을 뉘우치고, 그 득의의 한문 문

자를 휘몰아 쓰며 얼른 둘러맞춰 버리고 그 노리캥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웃음살을 편다.

“그 석수가 지금도 있다면 잠깐 불러올 수 없을까?”

하시고 왕은 아상 노장을 보신다.

왕의 이 말씀에 여럿의 귀는 번쩍 뜨이었다. 저마다 그 석수를 한번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렇듯이 뛰어난 재조를 지닌 그 석수장이는 과연 어떠한

사람일까. 여럿의 눈을 호기심에 번쩍였다.

그 중에도 주만의 눈이 더욱 빛났다.

“어려웁지 않습니다.”

하고 들어가는 아상 노장의 걸음이 느린 것이 원망스러웠다.

9

얼마 만에 아상 노장을 따라 젊은 석수는 나타났다.

꾸미지 않은 옷매무새며 , 오래 손질을 않은 탓으로 까치집같이 헝클어졌으

되 윤 나는 검은 머리며, 두루미처럼 멀쑥하게 여윈 몸피를 얼른 보는 순

간, 주만의 가슴은 웬일인지 찡하고 울린다.

그는 이런 자리는 난생 처음이라 어찌할 줄을 모르고 먼발치에서 머뭇거릴

제 왕은 가까이 오라는 분부를 나리셨다.

그는 몇 걸음 더 다가들어 와서 어색하게 허리를 굽히는데 그 고개를 땅에

닿을 듯이 숙였다.

“얼굴을 들어라.”

젊은 석수는 한참 망설이다가 분부대로 머리를 들었다.

번듯한 이맛전, 쭉 일어선 콧대, 열에 뜬 것 같은 붉은 입술, 더구나 가을

호수를 생각키게 하는 맑고 깊숙한 눈자위, 제 아무리 천하명공이라 하더라

도 한낱 시골뜨기 석수장이로 이렇게 청수한 풍채와 씩씩한 품위가 있을 줄

은 몰랐다.

젊은이 축의 곁눈질하는 눈초리에는 흠모의 빛이 역력히 움직였다.

주만은 그의 얼굴과 풍골에 다보탑의 공교롭고 아름다운 점과 석가탑의 굵

고 빼어난 맛이 쩍말없이 어우러진 듯하였다.

“어쩌면 재조도 그렇게 좋고, 인물도 저렇게 잘났을깝시오?”

멍하니 석수를 바라보던 털이는 주만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재재거린다.

주만은 그런 소리는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이 아무 대꾸가 없다.

“아가씨, 구실 아가씨, 저 연연한 입술을 봅시오. 마치 연지를 찍은

듯…….”

주만은 듣기 싫다는 듯이 그 가느나마 숱 많은 눈썹을 찡긴다. 털이는 제

아가씨의 눈치도 볼 새 없이 제 눈은 그 석수의 얼굴에서 떼지도 않으면서

노상 종알거린다.

“아이그, 가엾어라. 그 탑을 쌓노라고 얼마나 애간장을 졸였기에 저렇게

말랐을까? 저 뺨에 살점이나 붙었던들 작히나 더 의젓하고 엄전할깝시오?”

주만은 털이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왕은 이윽히 석수를 바라보시다가,

“얼굴도 준수하다.”

칭찬하시고,

“이름은 무에냐?”

“아사달(阿斯達)이라 부릅니다.”

맑고도 씩씩한 목소리다.

“부여에는 부모가 있느냐?”

“아버이와 어미가 다 없습니다.”

“그러면 형제는 있느냐?”

“동기도 없삽고 스승의 집에서 자라났습니다.”

“스승은 누구냐?”

“부석이라 합니다.”

“지금도 살았느냐?”

“예, 살아 있습니다마는 벌써 칠십이 넘어 걸음도 잘 걷지 못합니다.”

털이는 끝끝내 재잘거린다.

“보고 또 보아도 참 잘난 얼굴. 그 검은 머리는 옻빛 같고……”

주만은 잃었던 정신을 수습하려는 사람 모양으로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가

털이를 돌아보며,

“네 눈에도 그렇게 잘나 보이느냐?”

마지못해 대꾸를 해 준다.

“왜 쇤네 눈은 눈이 아닌갑시오? 저 목소리를 들어 봅시오, 어쩌면 저렇

게 청청해요?”

“맑고 부드럽고…….”

하고 주만은 속이 가득한 것을 내뿜는 듯이 숨을 크게 내쉰다.

털이는 또 말끝을 이어,

“우리 서라벌에도 저런 인물이 쉽지 않겠습지요?”

“우리 서라벌에 저런 인물이 있을 말로야.”

하고 주만은 연거푸 한숨을 쉰다.

“왜 우리 서라벌에 그런 인물이 없기야 한갑시오? 첫째로 김 공자가 계신

데.”

김 공자란 말에 주만의 아름다운 얼굴은 별안간 흐려졌다.

김 공자라 함은 시중 김지의 아들 김성(金城)을 가리킨 것으로 주만과 혼

인 말이 있는 귀공자다.

“김 공자 따위야.”

“왜요? 키가 조금 작으시지만 얼굴이 희시고 싹싹하시고 재조 있으시

고…….”

“얘, 입 고만 놀려라. 듣기 싫다. 그 키가 작기만 한 키냐, 곱추지.”

“그래도 당나라까지 가셔서 공부를 하시고 한문이라든가. 진서라든가, 그

어려운 글을 썩 잘하시고, 당나라 벼슬까지 하시고…….”

“그까짓 당나라 공부가 그렇게 장하냐? 그 어수선한 글자나 잘 알면 무슨

소용이 있을꼬?”

“김 시중 대감이 세도가 당당하시고…….”

“세도가 나한테 무슨 상관이냐?”

하고 주만은 화를 버럭 낸다. 털이도 제 아가씨의 비위를 너무 거슬린 것이

죄송하다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렸다.

10

어스레하게 땅거미가 들면서부터 절 안은 더욱 북적거렸다. 왕을 맞이하여

저녁 재를 굉장하게 올리는 것이다.

불전마다 매어 달린 가지각색의 무수한 등들이 차차 불빛이 밝아온다. 임

금님이 듭신 것을 알으키는 용무늬를 올린 청사초롱에 밀초가 부지짓부지짓

타오른다.

이 불바다에 헤엄치듯 갖은 풍악이 울려온다.

두리둥둥 법고가 운다. 엎어치는 바라가 지르렁지르렁. 쾅쾅 태증이 억세

게 고함을 지르는 사이로 가냘픈 호적이 껄떡이며 넘어간다.

법당 뒤 큰방에 임시로 옥좌를 베풀고 듭셨던 왕은 일행을 데리시고 법당

에 납시어 예불을 마치시고 재 올리는 구경을 하셨다.

승무가 한창 자지러지는 판에 주만은 살그머니 총중에서 빠져나왔다.

얼굴이 확확 달아오르고 골속이 힝힝 내어둘린다. 풍악 소리도 아무 곡조

도 없는 듯 잉잉하고 시끄럽게 귀를 찢어내는 것 같다. 재미있는 춤가락도

눈에 어지럽기만 할 따름이다.

사람이 많은 푼수로 방안이 좁아서 공기가 울체한 까닭인가, 그 까닭도 있

었다. 어느덧 첫여름이라 여럿의 땀내와 살내와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그의

비위를 뒤흔든 탓인가, 그 탓도 있었다.

가마에 흔들리고 배에 흔들리고 절 음식이 맞지를 않아 저녁을 설친 때문

인가, 그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원인보담도 그는 제 혼자 있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종용하

고 호젓한 자리가 그리웠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없는 자리,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자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자리가 아쉬웠던 것이다.

그는 오직 저 호올로 무엇을 생각하고 싶었다. 제 넋과 단 혼자 은밀히 무

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법당 문 밖을 나서니 선선한 밤바람이 그의 옷깃 속으로 처근처근하게 기

어든다.

그는 살 것같이 눅눅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지향 없이 걸음을 옮기었다.

주인과 나그네가 모조리 재 올리는 데로 몰리인 듯, 밖에는 개아미 한 마

리 얼씬 거리지 않는다. 그는 불빛을 피하듯 어둑한 데로만 바라보고 발을

내어디디었다. 얼마를 걷지 않아 광선의 테 밖에 헤어나올 수 있었다. 어슴

푸레한 가운데 낮에 보던 다보탑이 저만큼 보인다.

그 탑을 바라보는 찰나 까닭 없이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눈물이 핑 돌 것

같아졌다. 이 묵묵한 돌탑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주만이 저도 생각지 못

하였으리라.

그 탑은 부른다. 손짓하며 부른다.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오라 하는 듯하다

째기발을 디디고, 왜 늦었니, 하는 듯하다.

주만은 허정허정 재게 걸었다. 그는 한 순간이라도 빨리 그 품속에 뛰어들

고 싶었다. 아까 눈으로만 더듬던 자욱자욱과 구석구석을 손으로 어루만져

보리라 하였다. 그렇듯이 고와 보이는 돌결이 얼마나 부드럽고 미끄러운가

뺨을 대고 비벼 보리라 하였다. 그 오뚝 솟은 손잡이들을 휘어잡고 그 자그

마한 돌층층대를 껑충껑충 뛰어올라 가리라 하였다. 그 판판한 밑바닥에 펄

쩍 주저앉아 어느 때까지 어느 때까지 제 넋과 은밀한 수작을 주고받아 보

리라 하였다.

처음 생각엔 거기가 고대인 줄 알았더니 걸어보매 꽤 동안이 떴다. 더구나

서투른 길이요, 어두운 길이라 마음이 급할수록 발은 움펑진펑하여 하마터

면 여러 번 고꾸라질 뻔하였다.

땅바닥을 보고 조심조심 몇 걸음을 걸어가다가 언뜻 다시 고개를 들매 초

생 반달이 탑 위에 걸렸다. 그 빛 물결은 마치 흰 바단 오래기 모양으로 탑

몸에 휘감기어 빛과 어둠이 서로 아르롱거리며, 아름다운 탑 모양은 더욱

아름답게 떠오른다.

주만은 마치 두억시니에게나 흘린 사람 모양으로 걸어간다느니보담 차라리

끌리듯이 탑으로 한 자욱 두 자욱 다가들었다.

문득 탑에만 어리인 그의 눈앞에 난데없는 검은 그림자가 얼른하고 자나간

다.

주만은 깜짝 놀래며 몸을 소스라쳤다.


--- 중략



160

‘구실아기가 내 옆에 있고나.’

하는 생각이 분명히 들자 아사달의 정질은 갈수록 제자리에 놓이지 않고,

눈앞에 그리는 아사녀의 눈매조차 아리숭아리숭 여불없이 붙들리지 않았다.

그의 열에 뜬 머리조차 주만의 뼈에 사모치는 원정으로 찬물을 끼얹는 듯

식어갔다.

그는 이 쨍쨍한 현실에 한 순간 손길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뿔싸! 그는 다시 돌 위로 눈을 돌렸건만 그렇게도 생생하던 안해의 환영

은 하잘것없이 흐려진다. 봄볕에 눈처럼 스러지고 저녁놀 사라지듯 흐지부

지 가무러지려 한다. 그 대신 초죽음 다 된 해쓱한 주만의 얼굴과 그 파랗

게 질린 입술이 실룩 떨고 있다.

아사달은 아물아물해 가는 아사녀의 모습을 불러일으키려고 바작바작 애를

켜며 질팡갈팡 정과 마치를 휘둘렀다.

아사녀가 죽은 줄이야 꿈에도 모르는 주만이로되 아사달의 침통한 얼굴과

애절한 눈초리와 서두는 태도로 보아 이 공사도 아사달에게는 다보탑과 석

가탑보담 못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자기가 조른다 해

도 자리를 뜰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막힌 제 처지를 호소한다 해도

이미 도취의 경지에 들어간 아사달의 마음을 돌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일만 더 늦어지게 할 뿐이 아닌가.

주만의 속은 조 비비는 듯하였지만 아사달의 손 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멀거니 정질의 자최를 더듬어 보매 아사달은 사람의 얼굴을 새기노라고 애

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츰 때가 겨웠다.

한낮이 되었다.

아사달의 손은 좀처럼 쉬어지지 않았다.

주만이가 제 등뒤에 멀지 않게 말굽 소리를 들은 듯싶은 순간,

“아가씨, 아가씨! 구실 아가씨!”

가쁘게 부르는 털이의 소리가 들려왔다.

주만이가 고개를 돌려보니 과연 털이가 죽을 상을 하고 말을 채쳐 오는 꼴

이 보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고나!’

하고 주만의 가슴은 덜컥 나려앉았다.

주만이 마주 나오자 털이는 말에서 나려 종종걸음을 쳤다.

“아가씨, 아가씨, 큰일 났는뎁시오, 왜 여기 이러고 겝시오? 쇤네는 벌써

벌써 멀리멀리 가신 줄 알고 허허실수로 불국사엘 들렀더니, 차돌의 말이

여기 계시다기로 이리로 오는 길입지요.”

털이는 이마에 괸 진땀을 손으로 씻으며 그 동그란 눈을 더욱 호동그랗게

뜬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주만은 오히려 태연히 물었다.

“이거, 이거, 참 큰일 났는뎁시오, 여기 이러고 계시다니, 쇤네 뒤에는

곧 하인배들이 쫓아올 텐덥시오, 왜 달아나지를 않으십시오? 네, 네, 아가

씨, 지금이라도 어서어서 달아를 나십시오.”

“다 틀렸다. 어찌된 곡절이나 들려 다오.”

주만은 이미 단념하고 절마안 지 오래였다. 하필 이 아슬아슬한 판에 아사

달이 그 돌을 새기기 시작한 것으로써 이미 저의 악착한 운명이 작정된 줄

알았던 것이다.

“오늘이 한가위, 신궁 앞에 검술과 궁술의 큰 모임이 열리고 경신 서방님

이 활쏘기와 칼겨룸을 하시는데 거기 구경을 가시자고 대감께서 아가씨를

찾으신 모양입시오. 마님께서 숨기다가 못해서 마츰내 바른 대로 여쭈신 모

양입시오. 대감께서 발을 구르시고 역정을 하늘같이 내시어, 그런 년은 당

장 잡아서 불에 태워 국법을 바루신다고 야단야단을 치시는 걸 쇤네도 밖에

서 들었는뎁시오. 마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더니 저를 넌지시 부르시어 너 빨

리 불국사엘 가서 아가씨가 계신가 안 계신가만 보고 만일 계시거든 빨리

달아나게 하라고 이르셨는데, 아가씨는 여기 이러고 계시니 이 일을 장차

어떡해요, 어떡해요?” 하고 털이는 입을 삐죽삐죽하며 눈물이 듣거니 맺거

니 한다.

주만은 어머니의 자정에 가슴이 찌르르해지도록 새삼스럽게 감동하였다.

버린 딸이요 못쓸 딸이건만 그 목숨을 구하도록 애를 졸이는 모양이 환하게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쇤네는 말을 타고 왔으니 얼마쯤은 빠르긴 빨랐지만, 곧 뒤미처 하인배

들이 달려올 걸입시오, 아가씨, 어서 달아나십시오, 네, 아가씨!”

161

“이왕지사 일은 틀린 일, 지금 달아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만은 길게 탄식하였다.

“웹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지요, 아가씨만 이 자리에 없으시다면 하

인배들이 굳이굳이 찾으려 들지도 않을 것 아닙시오?”

“내 혼자 달아나서 이 구구한 목숨을 보전하면 무엇하랴!”

“아사달 서방님이 저기 계시지 않읍시오?”

“그 어른은 또 큰일을 시작하셨단다. 한번 일을 손에만 대시면 침식도 잊

으시고 생사도 모르는 이. 몇 번 길 떠나기를 재촉도 해 보았지만 들은 척

도 않으시니 어쩌는 수가 있느냐?”

“어규,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털이는 펄쩍 뛰었다.

저편 길 쪽의 떠들썩하는 곳을 바라보매 과연 껌정 벙거지를 둘러쓴 구종

들이 벌떼같이 이리를 향하고 달려온다.

“에구 아가씨, 저것들을 보십시오, 보십시오!”

하고 털이는 주만의 손목을 이끌며 달아나려 한다.

주만은 손목을 뿌리치며,

“지금 와서 허둥거리면 하인배 소시에 창피만 할 뿐.”

하고 주만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털이를 보고,

“너는 여기 있어 저 사람들이 들어닥치거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일러

라. 내 아사달님게 마지막 부탁할 것이 있다.”

주만은 아사달의 곁으로 왔다.

아사달은 비 오는 듯하던 땀을 씻으려 하지도 않고 돌을 새기기에 일단 정

성을 모으고 있었다.

자기를 그리고 그리다가 자기를 찾아와서 죽은 안해의 모양을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제 손으로 다시 살리려고 제 재조와 힘을 다 들이고 있었던 것이

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주만은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가요, 나는 인제 잡혀 가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사달님과 마

지막 작별, 한 번만 그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셔요, 단 한 번만 눈 한 번 깜

짝일 짧은 동안이나마…….”

아사달의 손길은 와들와들 떠는 듯하였다. 정은 돌 위에서 허청을 치고 미

끄러진다.

“네, 아사달님, 얼근 얼굴을 돌리셔요, 다시 한번 자세히 뵈옵게. 이 가

슴 속 깊이 새겨 두게. 뜨거운 불길이 이 몸에 붙을 제도 그리운 그 얼굴을

눈앞에 그리면서 숨이 잦아지게. 그리고 또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아사달은 얼굴을 들었다. 정소리도 끊어졌다.

“아이 고마워라, 아이 고마워라, 아사달님이 나를 보시네.”

주만은 감격에 겨운 듯이 속살거리고 물끄러미 아사달의 얼굴의 이모저모

를 샅샅이 알알이 뜯어보았다.

거의 넋을 잃은 듯이 흥껏 아사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서,

“아사달님, 아사달님. 이만하면 아사달님 얼굴은 자세히 뵈었어요. 내 얼

굴도 자세히 보아 주셔요. 그리고 내 얼굴을 그 돌 위에 새겨 주셔요. 이것

이 나의 마지막 부탁, 네 아사달님, 들어주실 테지요?”

“…….”

“왜 대답이 없으셔요? 왜 금세로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셔요? 왜 뺨 언저

리가 실룩실룩 떠십니까 ? 마지막 이별에 마지막 부탁, 혈마 아니 들어주실

리야 없겠지요? 이 몸, 이 모양이 아사달님의 손으로 그 돌 위에 새겨만 진

다면, 다시 살아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 하잘것없는 몸은

푸른 연기가 된다 해도 이 돌 위에 새겨진 내 얼굴은 몇 백년 몇 천년을 살

아남을 것 아녜요? 우리의 비참한 사랑의 기념으로 돌 하나를 남긴다 한들

죄 될 것이 없겠지요. 네, 아사달님, 이 청이야 들어주실 테지요?”

주만의 입김에서는 단김이 서려 흘렀다.

못 물결도 출렁거리기를 그치고 일순간 얼어붙은 듯이 고요하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선선히 그리 하마 일러 주지 않으시오? 그 돌에 새

기는 건 부처님의 상이에요, 보살님의 상이에요? 무슨 원불을 새기시느니

보담 이 주만을 새겨 주셔요, 네, 아사달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온다.

털이가 가루막고 서서 기다리라고 타이르는 모양이었다.

주만은 몸을 일으켰다.

“자! 아사달님, 나는 가요, 마지막으로 가요. 부명이 지엄하시니 오래 머

뭇 거리고 있을 수 없어요.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을 풀어 주세요. 네, 아사

달님. 그러면 부디 안녕히!”

주만은 종용종용히 걸어나왔다.

162

해님다리를 조금 비켜 놓고 모기내 천변 큰길에는 장작과 솔단이 집채같이

재이었다.

황을 덤썩 묻힌 긴채 관솔에 불을 붙여 군데군데 꽂아놓으매, 검은 연기가

구름장 모양으로 뭉게뭉게 떠오르자, 그 밑에서 시뻘건 불길이 이글이글 타

오르기 시작하였다.

오늘이 마침 팔월 한가위. 신궁 앞 넓은 마당과 서울 거리거리에 구경거리

가 덤뿍 벌어져서 사람들은 많이 빠져나갔건만, 그래도 이 참혹한 광경을

보아지라고 모여든 군정들은 천변 한길이 비잡도록 개미떼같이 덕시글덕시

글 하였다.

마른 나뭇가지가 타서 꺾이는 소리가 후닥툭닥 근처의 공기를 뒤흔들며 화

르르하고 타오르는 불길은, 무명의 업화인 양 반공을 향하고 그 너불너불하

는 어마어마한 혓바닥을 내어두를 제, 주막은 여러 하인들에게 웅위되어 그

장작더미 앞에 와서 섰다.

외동딸이 타 죽는 모양을 차마 볼 수 없었음이리라, 유종과 사초 부인은

그 자리에 모양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종은 사랑 문을 겹겹이 잠그고 혼자서 방안엘 왔다갔다 하며 머리끝까지

치민 격분과 극통을 걷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이 고이한 년, 에이 고이한 년, 내 딸이, 내 딸이!”

하고 이따금 힘줄이 우글쭈글한 주먹을 불끈불끈 쥐었다.

사초 부인은 남편을 끝끝내 속일 수 없어 이실직고는 하였으나, 혈마 딸이

잡혀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자기 잠든 사이에 자최를 감추

었으니 지금쯤은 멀리 서라벌을 떠나 있을 터이고, 또 잡으러 간 사람들이

제집에 부리는 하인들이니 기를 쓰고 잡으려 들 것 같지도 않아서 실상은

마음을 놓았다. 그래도 미심다워 털이를 보내기까지 하였으나, 간 곳을 모

른다는 털이의 기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천만 뜻밖에 자기

딸이 잡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기색하고 말았다. 얼마 만에야 겨

우 깨어는 났으나 자리 보전하고 누워서 헛소리만 하고 있었다.

불길이 웬만큼 타 오르는 것을 보자 주만은 천천히 불 앞으로 걸음을 옮기

었다.

“애구 아가씨, 애구 아가씨.”

털이는 울며불며 질색을 하고 뒤에서 제 아가씨를 부둥켜안았다. 여러 하

인들도 고개를 외우시었다.

“놓아라, 놓아라.”

주만은 조용히 털이를 타일렀다.

“네 정은 고맙다만 질질 끌수록 나에게는 고통. 한시바삐 저 불 속으로

뛰어들어 모든 슬픔과 원한을 잊어 버려야…….”

“애구 아가씨! 애구 아가씨!”

털이는 더욱 제 아가씨의 허리를 단단히 부여잡으며 울며 부르짖었다.

주만은 털이에게 안긴 채 한동안 그린 듯이 서 있다가,

“대감님과 마님께 못 뵈옵고 간다고 사뢰어라. 그리고 내 죽은 뒤에 타고

남은 재가 있거든 그림자못 아사달님이 새기신 돌부처 발아래 묻어 다고.”

말을 마치기 전 여러 사람이 악! 소리도 지를 겨를도 없이 주만은 불 속으

로 나는 듯이 뛰어들었다.

“애구구!”

털이는 그대로 땅바닥에 넘어지며 울었다.

그 때였다. 쏜살같이 말을 달겨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연기 속으로 사라졌

다.

그 사람은 말 위에서 그대로 껑충 몸을 날려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다음 순간엔 벌써 불덩이 다 된 주만의 몸을 두리쳐 업고 선뜩 땅

에 나려서는 모양이 보이었다.

땅 위에서 번개같이 주만의 옷에 붙은 불을 손으로 부벼 끄는 듯하더니,

주만을 업은 채 비호같이 달려가 버렸다.

모였던 군정들은 와글와글하였다.

“그게 누구야, 누구야?”

옆 사람의 옆구리를 꾹꾹 찔르며 이 별안간 나타난 용사의 근지를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의 동작은 너무 빠르고, 또 검은 연기가 부근 일대

를 뒤덮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사람의 정체를 자세히 알아본 이는 없었다.

여럿의 시선이 말 닫는 곳으로 바라볼 때에는 벌써 그 사람의 모양은 까마

아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이 바람결같이 나타났다가 바람결같이 사라진 인물은 과연 누구이었던가?

“하늘이 구하신 게다, 하늘이 구하신 거야.”

“아무리 법이 엄하기로 외동딸을 태워 죽이다니 말이 되나! 신명이 도우

신게지.”

“어여쁜 그 얼굴과 의젓한 그 태도만 보아도 비명횡사할 이가 아니거

든.”

“뭘 제 고운 님이 와서 구해간 게지.”

“어쩌면 그렇게 대담하고 말을 잘 탈까?”

“아무튼 예삿사람은 아니야.”

모였던 군정들도 악착한 꼴만 구경을 할 줄 알았다가 뜻밖에 좋은 구경 한

가지를 덤으로 더하게 된 데 매우 만족한 모양으로 제각기 떠들며 헤어졌

다.

163

나는 범보담 더 날래게 불길 속에 뛰어들어 주만을 구해낸 이는 경신이었

다.

오늘도 검술과 궁술 겨룸에 보기 좋게 장원을 하여 만사람의 칭찬을 받았

으되, 이 영광에 싸인 자기를 보고 누구보담도 더 기뻐할 이찬 유종의 얼굴

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고 궁금하였다.

어쩐지 마음에 키이어 여러 낭도들의 폭풍우 같은 환호와 찬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슬그머니 빠져 나와 주만의 집으로 말을 채쳐 오는 길에 해님다리

가에 사람이 백절 치듯 모인 것을 보았다. 무슨 까닭인가를 물어보니, 이찬

유종이 제 실행(失行)한 딸을 태워 죽이는 것이란 말을 듣고 쏜살같이 뛰어

든 것이었다.

이찬의 불 같은 성미에 일이 탄로만 되면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그는 어

렴풋이나마 미리 짐작도 하였다.

그리고 어젯밤에 얼른 본 주만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양이 한량없이 애

처로웠다. 그 다소곳한 머리와 수줍은 눈길에 풀기 하나 없는 것이 한량없

이 가엾었다. 암만해도 무슨 악착한 사단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가슴이 섬

뜩하였다.

한두 번밖에 대해 보지 않았으나 그 뛰어나게 아름다운 용모와 씩씩한 기

상과 대담한 태도가 경신에게는 엄청난 경이었다, 눈부신 존재였다. 벌써

마음을 바친 데가 있는 그이거니 제 안해가 되기는 사내답게 단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번 가슴 속 깊이 박힌 그 안타까운 그림자는 좀처럼 가시어지

지 않았다. 부모님께도 사뢰지 못한 그 괴로운 속을 처음 만나는 자기를 턱

믿고 숨김없이 하소연한 것이 어떻게 정다운지 몰랐다. 더구나 자기와 청혼

된 남자가 낙명이 될까 염려하여 신랑 쪽에서 파혼까지 해 달라고 하는 그

마음씨는 곰살궂고도 여무지었다.

세상에도 희귀하고 열렬하고 비장한 주만의 사랑이 올곧게 열매를 맺기를

경신은 진정으로 축수하였건만, 마치 친누이동생과 같은 깨끗하고 애연한

정을 느끼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만이가 생목숨을 끊게 되었거늘, 어찌 제 몸의 위험을 살필 수

있느냐, 제 체모를 돌아볼 수 있느냐.

경신은 들숨 날숨 없이 복잡한 서울 거리를 헤어 나와 개운포 한길로 달리

었다. 서울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인가가 없는 들판에 나온 뒤에야 경신은

턱에 닿은 숨을 돌리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쫓아오는 사람도 없는 듯.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하자 첫째 머리에 떠오르기는 제 등에 업힌 주만이가

어찌 되었나 하는 염려였다.

팔과 고개가 제 어깨에 척 늘어져 힘없이 흔들흔들하는 것을 보면 그대로

혼절된 모양이었으나, 촉촉하고 따스한 온기가 주만의 가슴 언저리로부터

제 등에 배어 스며드는 것을 보면 아직 숨기는 남아 있는 듯하였다.

“어디든지 치우고 들어야 할 텐데.”

경신은 혼자 속살거리고 또다시 말을 채쳐, 자기가 서울 오름나림 길에 드

는 주막을 찾아들었다.

종용한 방 하나를 치우고 주만을 들여다 눕히었다.

옷자락이 군데군데 타서 떨어져 너불너불하는 대로 흰 살이 드러난 것도

가엾거니와 뺨 언저리엔 덴 자욱이 밀룽밀룽 부풀어 오르고, 그 좋은 머리

도 끄슬려져서 오글오글해진 모양이 참혹하였다.

“애구 가엾어라, 불난 집에서 뛰어 나오셨군. 저렇게 기색을 하셨으니 냉

수나 좀 떠 넣어 보시지. 그리고 데인 자리엔 간수나 발라 보시지. 애구 끔

찍해라! 많이도 다치셨네. 그래도 숨이 붙으신 게 천행이시군.”

혼동된 주인 노파는 방에 따라 들어와 이부자리를 깔고 나서 제 아는 대로

구호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경신은 노파와 같이 주만의 꽈리같이 부르튼 입술을 벌리고 냉수를 몇 숟

갈 떠 넣어 보았으나, 물은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왔다.

“다치신 것도 다치신 거지만 워낙 놀래셨을 테니 잠깐만 진정을 하시도록

하시지.”

하고 노파는 나가 버렸다.

떡 한 시루 쪄낼 동안이나 지냈으리라.

주만은 무엇을 찾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경신은 놀랜 듯이 옆으로 다가 들며 부르짖었다.

“구실아기님, 구실아기님!”

주만의 입술은 달싹달싹하였다. 분명히 무슨 말을 하는 모양이나 모기 소

리보담도 더 가늘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구실아기님, 구실아기님, 무슨 말씀이요? 무슨 말?”

주만은 얼굴을 찡그리고 짜증을 내었다.

“아이, 아사달님, 아이 아사달님은 그래도 못 알아들으셔요?”

경신은 아사달이란 낱말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

까운 청춘을 불 속에 장사할 뻔하고 숨이 붙은 둥 만 둥한 이 생사관두에

헛소리로도 제 사랑의 이름을 찾는 것을 보고, 경신은 그 지긋지긋한 사랑

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새삼스럽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 그 돌에 내 내 얼굴을 새 새겨 주셔요. 네, 아사달님이 이 손에 그

돌을 만져 보여 주셔요. 어디 나 나를 닮았나, 안 닮았나 더듬어 보게.”

164

아사달은 넋 잃은 모양으로 주만의 돌아서 가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손버릇같이 다시 정을 들기는 들었다. 그러나 어는 결엔지 아사녀의 환영은

깜박 사라져 버렸다 아까까지는 . 어렴풋이라도 짐작되던 그 흔적마저 놓치

고 말았다.

아무리 눈을 닦고 돌얼굴을 들여다보았으나 눈매까지는 그럴싸하게 드러났

지마는 그 아래로는 캄캄한 밤빛이 쌓인 듯 아득할 뿐.

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골머리만 부질없이 힝힝 내어둘리었다.

그러자 문득 그 돌얼굴이 굼실굼실 움직이는 듯하며 주만의 얼굴이 부시도

록 선명하게 살아났다. 마치 어젯밤의 아사녀의 환영 모양으로. 그 눈동자

는 띠룩띠룩 애원하듯 원망하듯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다.

“이 돌에 나를 새겨 주세요. 네, 아사달님, 네, 마지막 청을 들어 주세

요.”

그 입술은 달싹달싹 속살거리는 것 같다.

아사달은 정을 쥔 채로 머리를 털고 눈을 감았다.

돌 위에 나타난 주만의 모양은 그의 감은 눈시울 속으로 기어들어 오고야

말았다. 이 몇 달 동안 그와 지내던 가지가지 정경이 그림등 모양으로 어른

어른 지나간다.

파일 탑돌이 할 때 맨 처음으로 마주치던 광경, 기절했다가 정신이 돌아날

제 코에 풍기던 야릇한 향기, 우레가 울고 악수가 쏟아질 적 불꽃을 날리는

듯한 그 뜨거운 입김들…….

아사달은 고개를 또 한번 흔들었다. 그제야 저 멀리 돈짝만한 아사녀의 초

라한 자태가 아른거린다. 주만의 모양을 구름을 헤치고 둥둥 떠오르는 햇발

과 같다 하면, 아사녀는 샐녘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한 광채밖에 없었다.

물동이를 이고 치마꼬리에 고 발간 손을 씻으며 바시시 웃는 모양, 이별하

던 날 밤 그린 듯이 도사리고 남편을 기다리던 앉음앉음, 일부러 자는 척하

던 그 가늘게 떨던 눈시울, 버드나무 그들에서 숨기던 눈물들…….

아사달의 머리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사녀와 주만의 환영도 흔들린다.

회술레를 돌리듯 핑핑 돌다가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조각조각 부서지

는 달그림자가 이내 한 테로 합하듯이, 두 환영은 마츰내 하나로 어우러지

고 말았다.

아사달의 캄캄하던 머리 속도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하나로 녹아들어 버린 아사녀와 주만의 두 얼굴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아사달은 눈을 번쩍 떴다.

설레던 가슴이 가을 물같이 맑아지자, 그 돌얼굴은 세 번째 제 원불(願佛)

로 변하였다.

선도산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햇발이 그 부드럽고 찬란한 광선을 던질 제,

못물은 수멸수멸 금빛 춤을 추는데 흥에 겨운 마치와 정 소리가 자지러지게

일어나 저녁 나절의 고요한 못둑을 울리었다.

새벽만 하여 한가위 밝은 달이 호올로 정 자리가 새로운 돌부처를 비칠제,

정 소리가 끈치자 은물결이 잠깐 헤쳐지고 풍 하는 소리가 부근의 적막을

한순간 깨뜨렸다.

(‘동아일보’, 1938.7.20.~1939.2.7.)

※천년 고도 경주를 찾으신 분은 반드시 불국사에 들르시리라.

그 절묘한 돌층층대를 거쳐 문루를 지나 서시면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앞에 나타나리라.

천겁의 바람과 비에 시달린 오늘날에도 오히려 엄연히 남아 있어, 하나는

그 여성적인 혼란한 곡선미로, 또 하나는 그 남성적인 호장한 직선미로 마

음 있는 이의 발길을 머물게 하리라.

석가탑의 일명은 무영탑, 아사녀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

이 별명을 얻은 것을 터득하시리라.

불국사 남서방에 영지(影池)란 못이 있으니 이 못이야말로 아사녀와 아사

달이가 빠져 죽은 데다.

지형이 변한 오늘날 옛 터전을 그대로 상고는 못할 노릇이로되, 지금 보아

도 그 못 어란이 여간 휘널르지 않은 것을 보면, 못 둘레가 십리가 넘었다

는 것이 빈말이 아닐 것이요, 그 물이 수정같이 맑은 적엔 거기 비친 그림

자는 더 진하고 더 똑똑해질 테이니, 그림자못이란 고명도 그럴듯하다 않을

수 없으리라.

그 못 기슭의 천연석에 새긴 돌부처는 그 수법이 범상치 않으나 그 새김

의 선이 너무 섬세한 것은 아사달이가 마지막에는 제 원불을 새겨 제 안해

와 제 애인과 및 자신까지 천도를 한 것이로되, 암만해도 아사녀와 주만의

환영이 끝끝내 눈에 밟힌 탓인지 모르리라.

그리고 주만의 생사는 작자로도 잘 알 길이 없다. 혹은 그 큰 화상이 잘

아물리어 그 때 살아났다면 작자는 독자와 함께 안심하고 그의 앞길을 경신

에게 맡겨도 좋을 줄로 본다.


300x250
반응형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